서경덕

서경덕(徐敬德, 1489년 3월 18일~1546년 8월 13일)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다. 가구(可久), 화담(花潭)·복재(復齋).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송도 출신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거의 독학으로 공부를 했다. 특히 사색으로 학문을 탐구한 것으로 유명한데, 하늘의 이치가 궁금하면 벽에 하늘 천(天) 자를 써서 붙이고 몇날 며칠 이에 대해 사색한 뒤, 사색이 끝나면 다른 글자를 써 붙이는 식이었다. 그의 학문은 이(理)와 (氣) 중 기에 중점을 두는 주기론으로, 기가 모여 만물을 이루고, 흩어지면 태허(太虛)가 된다 여겼다. 이 때문에 철저한 주리론자인 이황에게는 비판을 받았다.

기생 황진이가 서경덕을 유혹하려다 실패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박연폭포, 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리기도 한다.

사후[편집 | 원본 편집]

생전에는 벼슬을 얻으려 하지 않아, 종 9품 말단 관직인 참봉에 제수된 것이 고작이었다. 이후 명종 22년에 호조좌랑에 추증되었고, 선조 때에 이르러 제자인 허엽박순을 중심으로 다시 추증 논의가 일었는데, 선조는 서경덕의 학문이 기수(氣數)만을 논하고 수신(修身)은 언급하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그의 공부에는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다며 미심쩍어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에 박순이 서경덕을 옹호하고, 또 이이가 "서경덕의 공부는 본받을 만한 것은 아니지만, 요즘 학자들은 성현들의 학문을 모방해 말할 뿐 마음으로 터득한 것이 없는 데 비해, 서경덕은 깊이 생각하고 스스로 깨친 것이 많았다"며 설득해, 마침내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이후 서경덕의 고향인 개성 지역을 중심으로 그를 문묘에 종사하자는 주장도 일었으나, 끝내 좌절되었다. 특히 여전히 서경덕의 학문에 여전히 불신을 거두지 못한 선조는, 개성부 진사 장예근의 상소에, "서경덕을 우의정으로 추증한 것도 이미 과한 일인데, 더구나 어찌 감히 정몽주와 나란히 할 수 있겠는가?"라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의 제자들 중 많은 이들은 동인, 그중에서도 북인 쪽에 섰다. 그러나 박순과 같은 제자는 서인의 중추가 되었다.

일화[편집 | 원본 편집]

본디 유학자이지만, 후일 조선 유학의 주류가 된 주리론과 비교해 서경덕의 학문은 이질적인 점이 많고, 은거해 살았던 삶 때문인지 민간 설화에선 도사신선에 가까운 이미지로 나온다. 특히 소설 《전우치전》에서 전우치와 도술대결을 하여 승리한 이야기로 유명하며, 영화 전우치에서는 그를 모델로 한 '화담'이 악역으로 등장했다.

외부 참조[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