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엽

허엽(許曄, 1517년 12월 29일~1580년 2월 4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陽川), 는 태휘(太輝), 는 초당(草堂)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서경덕이황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조에게 향약의 시행을 권하였으나, 이이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동서분당 당시 동인의 영수가 되었으며, 정동(正東) 쪽을 뜻하는 묘지(卯地)가 별명으로 붙을 정도로 동인 내에서도 입장이 강경하였다. 동문수학한 사이인 박순과는 본래 서로 친밀한 사이였으나, 허엽이 동인, 박순이 서인의 중추적 인물이 되면서 사이가 갈라졌다.

이이, 이황 등에게 학문이 부족하다고 디스를 당했으나, 경전 익히는 것을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아 이 점은 사람들이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초당집》, 《전언왕행록》 등이 있다.

가족관계[편집 | 원본 편집]

자식으로는 허성, 허봉, 허균, 허난설헌 등을 두었는데, 모두 글 쓰는 재주가 훌륭하였다. 그러나 이후 허균이 역모 혐의로 사형을 당하면서 가문도 쇠락하게 되었다.

일화[편집 | 원본 편집]

강릉시의 명물인 초당두부를 처음 만든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초당두부의 이름 역시 그의 호를 딴 것이다.

외부 참조[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