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미스 해전

살라미스 해전
군사 충돌 정보
날짜 기원전 480년
위치 에게해 살라미스 섬 인근 해역
결과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
교전단체
그리스 연합군(아테네, 코린토스, 스파르타 등) 페르시아
에우리비아데스
크세르세스
병력:
200척
병력:
1,300척
손실:
100척 이내(살라미스에서만 40척 이내)
손실:
절반 이상 손실
  • Battle of Salamis

배경[편집 | 원본 편집]

고대 그리스는 BC약 8세기경부터 폴리스를 건설하고 동방의 페니키아로부터 조선술과 항해술을 배워 해양활동을 하였으며, BC 5세기 무렵에는 에게해흑해 일대의 해상무역을 독점하고 시칠리아이탈리아 남부 지역 등지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퍼져있는 상태였다. 동시에 이 시기에는 페르시아가 비롯한 현재의 중동 일대를 통일하고 서진하여 그리스들의 폴리스와 페르시아의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페르시아는 그리스 원정을 3회에 걸쳐서 시작하였는데 1차 원정은 폭풍으로 실패하였으며, 2차 원정은 마라톤 전투의 패배로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기원전 481년 18만명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 헬레스폰트에 부교를 설치하여 해협을 건넌 뒤 트라키아, 마케도니아를 거쳐 그리스를 침공하였다. 동시에 이 지상군을 지원하기 위해 수송선과 함께 전투함 1,300여척으로 구성된 페르시아의 함대가 에게해 북부 연안을 따라 출병하게 된 것.

해전 직전[편집 | 원본 편집]

그리스 전체 폴리스들이 상황은 대규모의 페르시아 원정군 앞에서 결속되지 못하고 분열된 상황이었다. 아테네스파르타등 일부 도시 국가는 결사항전을 주장하였으나 상당수의 폴리스들은 항복하였던 상황. 심지어 아테네에서도 강력한 함대를 건설하여 페르시아군에 대항하자는 테미스토클레스와 함대만으로는 페르시아군의 지상군을 막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아리스티데스가 대결을 벌였을 정도. 이로 인해 시민투표까지 가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테미스토클레스가 승리하자 그는 서둘러 전투함을 건조하여 200척에 이르는 3단 노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건설하였다. 이와는 별개로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 지역의 폴리스들은 북부의 폴리스들을 포기하고 육상방어가 유리한 코린트 지협에 방어선을 구축하자고 주장하였으나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보다 북쪽에 방어선을 구축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의견에 스파르타가 동조하여 육상의 방어선은 이보다 훨씬 북쪽에 형성되게 되었다. 이에 테미스토클레스는 해상 전력의 상당수가 아테네의 함선들로 구성되어 아테네가 총 지휘권을 가져가야 하는게 당연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연합함대의 지휘권을 스파르타의 에우리비아데스에게 맡기게 되었다.

한편 페르시아 원정군은 순조롭게 진격을 계속하였는데 진격하는 과정에서 인근 항복한 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그 세력이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분열된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병력의 절대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북부의 폴리스들을 포기하고 지상군을 이용하여 산악 통로인 테르모필레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연합함대가 그 우측 해안을 방어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에에 따라 그리스 연합함대는 본토와 에우보이아 섬 북동쪽 해협에 있는 아르테미시움에 집결하여 그리스의 지상군을 엄호하기 시작하였다.

경과[편집 | 원본 편집]

테르모필레 전투[편집 | 원본 편집]

기원전 480년 8월 스파르타의 왕 레오디나스가 지휘한 그리스군 6천명이 테르모필레에서 선전하였지만 병력의 절대적 열세로 인해 전멸하고 말았다.

페르시아군은 방어선을 돌파한 뒤 같은 해 9월 아테네까지 점령하고 더욱 기세를 올리게 되었다.

아르테미시움 해전[편집 | 원본 편집]

그리스 연합함대가 아르테미시움에 집결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페르시아 함대는 200척의 함선을 에우보이아 섬 남쪽으로 보내 그리스 함대의 후방을 차단한 뒤 공격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함대가 사전에 이 정보를 탐지하여 먼저 페르시아 함대를 공격하게 되었다. 양측 함대는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승패가 결정되기 전에 밤이 되어 각기 퇴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 밤에 심한폭풍우가 몰아쳐 에우보이아 섬 남쪽으로 향하던 페르시아의 함선 200척의 거의 좌초되거나 대파당하게 되어서 전력에서 완전히 이탈하게 되어버렸다. 테르모필레 전투가 지속되는 2일과 3일차에도 해전이 계속 있었으나 결정적인 승패를 내지 못하다가 테르모필레에서 방어군이 전멸하자 그리스 함대는 아르테시미움을 떠나 아테네에 인접한 살라미스 섬으로 이동하였다.

살라미스 해전[편집 | 원본 편집]

해전 직전[편집 | 원본 편집]

  • 그리스군의 상황

아테네가 점령당했다는 소식이 살라미스에 대기하던 그리스 함대에 전해지자 펠로폰네소스 반도 지역의 지휘관들은 코른트 지협으로 후퇴하여 방어선을 재구축하자고 주장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는데 그는 아테네와 살라미스의 피난민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데다 숫적으로 우세한 적의 함대를 막기 위해서는 좁은 해협이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또한 후퇴할 경우 각 폴리스들이 파견한 함선들이 자기 폴리스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함대가 이탈하여 전력이 분산될 우려가 있어서였다. 격론이 벌어지는 회의에서 코린트의 지휘관이 "조국을 잃은 자는 침묵을 지키라"고 조롱하자 테미스토클레스는 "200척의 아테네 함선이 곧 도시이며, 이 함선들에 가족을 승선시켜 이탈리아로 이주할 수도 있다"고 응수하였다. 결구 그리스 연합함대의 지휘관이었던 에우리비아데스는 아테네 없이는 도저히 페르시아에 대항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아테네의 제안을 받아들여 살라미스에 머물러 함대결전을 벌이자는 방안을 채택하였다.

  • 페르시아군의 상황

페르시아 함대 역시 지상군의 진격에 맞추어 살라미스에서 동쪽으로 8마일 가량 떨어진 팔레론 만에 집결하였다. 크세르세스는 함대를 방문하여 해상 지휘관들에게 해전에 관해 문의하였는데 거의 모든 지휘관들이 즉시 공격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판단하여서 바로 해전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개전[편집 | 원본 편집]

그리스 함대는 공포와 불안이라는 또 다른 적을 상대해야만 했는데 특히 페르시아가 다음 목표로 삼은 펠로폰네소스 지역의 폴리스 출신의 동요가 심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그리스 함대에서는 다시 펠로폰네소스로 이동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 함대는 전투가 지연될수록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첩자를 페르시아 진영에 침투시켜 그리스군이 내부 분열로 위기에 처해있다는 거짓 정보를 유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보를 믿은 크세르세스는 한밤중에 바로 은밀히 전투를 준비하였다. 그의 함대 가운데 이집트 출신의 함대들을 먼저 보내 살라미스의 서쪽을 봉쇄하게 하고 주력부대인 500척 이상의 함선으로 동쪽 해로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해전 전날 밤 후퇴에 관해 논의중이던 그리스의 지휘부에도 이집트 함대가 이동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퇴로를 차단당한 그리스 함대는 페르시아의 주력함대와의 함대결전을 벌이는 것이 최선의 전략으로 판단하고 해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진행[편집 | 원본 편집]

개전 직전 상황은 페르시아측은 에우보이아 섬 근처에서 당한 풍랑과 아르테미시움 해전의 손실 등으로 400척 가량이 손실되었으나 800척이 남아있는 대선단이었으며, 그리스 연합함대도 이전의 전투로 약간의 손실을 입은 상태여서 총 300여척이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이집트 함대의 이동으로 페르시아측의 전력이 일부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리스측에 비하면 두 배 가량 우세한 상황

9월 23일 낡이 밝아오자 살라미스 수로의 동편에서 대기하던 페르시아의 군함들이 해로에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양측의 함선들은 서로 횡열진을 형성하고 서로 거리를 좁혀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전투에 참가한 함선의 수는 페르시아측이 많았지만전술상의 이점은 그리스측에 있었다. 그리스 함대는 페르시아측에 비해 전투진형이 질서정연하였고 사실상 포위당한 배수진인데다 여기서 패배하면 바로 끝장나는 상황이었던 것. 반대로 페르시아측은 살라미스의 수로가 워낙 좁아터져서 계획했던 횡열진으로 함선을 투입할 수 없었고 거기에 수로 중간에 있던 프시탈레이아 섬 때문에 진형이 양분되어버리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그리스 함대측 입장에서 뒷바람인 서풍이 불어와서 가뜩이나 좁은 수로에서 페르시아 함선들의 기동이 더 꼬여버리게 되었다. 실제 살라미스로 들어가는 해협의 폭은 좁은 곳은 1마일 수준이고 넓은 곳도 2마일을 넘지 않아서 함선의 숫자와 관계없이 직접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함선의 숫자는 양측을 합쳐 100여척밖에 되지 않았다. 즉 숫자는 페르시아측이 훨씬 많았지만 그러한 숫적 우세를 전혀 살리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

좁은 해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그리스 함선들은 페르시아측의 전선들을 향해 바로 충각을 감행하여싸. 또한 그리스측의 우익이 프시탈레이아 섬 때문에 꼬여버린 페르시아측의 좌익을 바로 공격하여 들어간 것. 이 때문에 페르시아측 전열의 좌익측에 있던 함선들이 우측으로 몰리면서 자신들끼리 충돌하는 대혼란을 겪게 되었다. 또한 함상 백병전에 있어서도 그리스군은 중무장이었던데 비해 페르시아군은 경무장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페르시아 함대가 불리하게 되었다.

해전은 7시간 넘게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함선의 절반 가량이 격침 혹은 나포되었으며, 수많은 지휘관을 잃게 되었다. 해가 질 무렵에 결국 남아있는 페르시아 함대는 팔레론 만으로 퇴각하였다. 한편 인근 섬에 상륙하였던 페르시아 상륙군은 아리스테데스가 지휘하던 그리스 지상군에 의하여 전멸당하기 까지 하였다. 이 해전에서 그리스군의 함대 손실은 불과 40척 수준에 불과하였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해전의 결과는 바로 반응이 나타났다. 이 해전을 육상에서 지켜보던 크세르세스는 그리스 원정을 중단하고 철수하게 되었다. 지상군의 보급을 지원했던 함대가 사라지면서 아테네를 점령하고 있기가 어려워진데다 그리스의 함대가 북쪽 헬레스폰트의 부교를 파괴하여 퇴로가 차단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 그는 철수하면서 그리스 북부를 평정하기 위하여 그의 삼촌인 마르도니오스의 휘하에 10만의 원정군을 남겨두었으나 이 원정군도 다음 해 여름에 플라타에아 전투에서 그리스군에 패배하게 되었다.

한편 해전 종료 후 그리스 함대는 바다에서 파손되어 표류중이던 선체를 모두 살라미스로 가져와 수리한 뒤 새로운 해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해상부대가 이미 철수하였음을 알고 곧 추격에 나섰으나 적함을 찾지는 못하였다. 이에 데미스토클레스는 헬레스폰트로 직행하여 부교를 파괴하자고 하였으나 에우리바아데스는 만약 부교를 파괴하면 갈 곳이 없어져서 빡친(...) 페르시아군이 오히려 그리스 본토 내에서 깽판을 부릴 것을 우려하여 부교는 그대로 두었다.

이 해전으로 페르시아는 다시 그리스를 침공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이 해전에서 가장 많은 전력을 차지했던 아테네가 그리스 지역의 새로운 패자로 부상하게 된다. 아테네는 이 해군력을 바탕으로 그 세력을 터키 연안까지 미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델로스 동맹이 형성되게 된다.

승패요인[편집 | 원본 편집]

  • 전략적으로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적 통찰력이 뛰어났다 할 수 있다. 재해권의 장악이 곧 페르시아군의 격퇴하는 길이라 여겼으며, 상대적으로 우세한 페르시아 함대를 격퇴하기 위해 살라미스의 좁은 해역을 전장으로 선택하였던 것.
  • 기술적 측면에서는 그리스의 함선들이 페르시아의 함선들보다 훨씬 튼튼하여 충각전술에 있어서 유리하였다. 고대 해전의 주효한 전술 중 하나가 충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상당히 큰 차이에 해당한다.
  • 함상 백병전에 있어서 그리스군은 중무장한 중보병이 탑승하였으나 페르시아군은 상대적으로 경무장이어서 전투력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 운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바람의 방향이 그리스군에 유리한 서풍이었다. 다만 무조건 운으로 보기 어려운 것이 그리스군은 애초에 이 바람이 불 것을 경험적으로 예측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 페르시아군의 패인으로는 퇴로 차단을 위해 섣불리 이집트 함대를 분산시키면서 함대 세력이 분산되어버렸다. 또한 첩자의 거짓 정보를 그대로 의심없이 믿어버린 점에 있어서 정보전에서 이미 지고 시작했다고도 할 수 있다.
  • 좁은 해역에서 무리하게 전투를 벌인 것도 페르시아측에는 패인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전투 전면이 좁아지면서 일종의 축차투입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