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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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元容.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미주에서의 독립운동[편집 | 원본 편집]

1896년 12월 26일 한성부에서 출생했다. 1917년 미국으로 유학하기 위해 상하이로 건너가 차이나 호를 타고 출발하여, 5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이후 콜로라도주 푸에블로지방에 정착했고, 1917년 8월 29일 국치기념식에서 '8년의 원통한 말'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1918년 12월 대한인 국민회 푸에블로지방회 재무로 선임되었고, 1919년 1월 오하이오주 애크론의 한인들과 함께 대한인 국민회에 오하이오 지방회 설립 청원서를 제출, 승인을 받아내고 그해 6월 오하이오지방회 총무로 선임되었다.

이후 오하이오의 대학에서 재학하던 1920년 4월 학생총회결성발기자회에 오하이오주 학생대표로 참석해 미주 각 지방에 있는 한인 학생회 통합을 위해 노력했고, 1923년 4월주터 7년간 미국 중서부와 동부 지방에서 독립운동 후원을 위한 지방조직 결성에 참석했다. 1930년 7월 15일 하와이에서 개최된 동지회미포대회에 동지회 시카고 대표로서 참석하여 상무원에 선정되었다. 이후 동지회의 조직 개량, 각 단체를 망라하는 연합기관의 구성, 미주와 원동 각지를 연락하여 민족운동 강화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동지회 총재 이승만이 하와이 한인사회 내에서 대한인 둑민회를 완정히 배제하라고 하면서, 동지회와 대한인 국민회 간의 갈등이 심해졌다. 이에 김원용은 1930년 10월 20일 이승만에게 사면을 청원하는 편지를 보냈다.

만일 동지회로 백만 각 대중을 단결하여 우리의 광복사업을 하려고 한다면 우선 인심을 징중하여야 할 터인데, 다만 한 사람이라도 감복시키지 못할지언정 불호감을 가지게 함은 무슨 의사이오니까.

그리하여 상무원에서 물러난 김원용은 1931년 1월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의 기관지 '국민보'의 편집인으로 임명되었다. 이승만이 동지회 재정을 충당할 목적으로 교회 재산과 교민단 회관을 매각하려 하자, 그는 이에 반대하고 이승만 중심의 체제를 타도하려 했다. 이로 인해 하와이 한린 사회에서는 친 이승만 파와 반 이슬만 파간의 알력다툼이 벌어졌다.

1932년 초, 교민단은 만주사변을 규탄하기 위해 선전부를 조직했다. 김원용은 선전주 비서를 맡아 제네바 국제연맹 의장인 아리스티드 브리앙에게 보낼 호소문 작성에 가담했다. 이후 1933년 1월 3일 하와이 교민단 대의회의 결의로 교민단이 해체되고 하와이 대한인 국민회가 재건되었을 때, 그는 법무원을 맡았다. 1934년 4월 10일 하와이 애국단이 조직되었을 때 가담하여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을 지원했다.

1936년 1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인 국민보 주필로 발탁되어 한잉 교포들의 민종 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해 8월 27일 임시정주의 활동을 적극 후원하고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임무를 맡은 선전부에 정두옥, 항길수, 홍한걸과 함께 선임되었다. 1941년 4월 16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둘이 모여 해외한족대회준비회를 개최했을 때, 준비회 비서로 선임되어 대회 규정을 작성했다.

이어 1941년 4월 29일 해외한족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안원규 등과 함께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하여 대회의 선언문과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을 작성하여 독립전선 통일문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확대 문제, 대미외교기관 설치 문제, 군사운동에 관한 문제, 미국 국방공작 후원문제, 연합기관 설치문제, 독립금 수봉문데 등을 결의했다. 그해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를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조직되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가 설치되었다. 이때 김원용은 의사부의 비서 겸 행정위원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 및 선전사업을 추진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워싱턴의 주미외교위원부에 대미 외교 활성화을 위한 사무 확장과 외교방법의 개선을 요구하기 위해 김원용과 이원순을 워싱턴으로 파견했다. 김원용은 대항민국 임시정부의 동의를 얻어 주미외교위원부를 개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여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독자적인 외교사무소 설립을 반대했다. 그러아 1943년 10월 4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이승만을 외교 고문으로 승격시키고 주미위원주를 새로 조직하는 결의안을 임시정부에 보냈다.

이후 1943년 12월 23일,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고 외교 활동울 독자적으로 전개했다. 이에 반발한 김원용, 안원규 등은 1944년 6월 워싱턴사무소를 새로 신설했다. 이로 인해 미주의 한인 독립운동 관련 외교부가 2개가 되어버리자, 임시정주는 1944년 8월 통합된 외교위원부를 새롭게 개조하라고 명령했다. 1944년 10월, 로스앤젤레스에서 미국과 하와이의 17개 단체 중 동지회 계열의 4개 단체릉 제외한 13개 한인 단체가 대표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 대표원으로 참석한 김원용웅 개조된 구미외교위뤈주 외교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2월 22일, 김원용은 중한민중동맹단의 한길수, 정덕근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대비하기 위한 공식적인 회합을 했다. 이후 임시정부로부터 회의 찬석을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지자, 이승만은 자신을 단장으로 하고 김원용 등 9명을 임시정주 대표로 선정하여 통보했다. 그러나 김원용은 하와이 의사부로 돌아가야 한다며 거절했다.

1945년 4월 1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는 연합국의 국데연합창성대회에 참가할 해외한족대쵸 8인을 선정했는데, 이중엔 김원용도 있었다. 그러나 연합국에 가입된 국가들만 참가자격이 있었기 때문에, 주미외교위원부나 해외한족대표당 모두 국제연합창설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위원장으로 설출된 그는 1945년 5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1개년 계획>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발표했다. 그는 이 문건에서 재미한인들은 해방된 조국의 국가건설을 위한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다고 하면서, 1년 동안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중용한 시기임을 강조했다.

광복 후의 행적[편집 | 원본 편집]

8.15 광복 후,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는 해방된 조국건설을 위해 대표들을 국내에 파견하기로 했다. 1945년 10월 24일 하와이 의사부 국내파견대표 부단장으로 선임된 김원용은 전경무, 도진호, 김호, 김성락, 송종익, 한시대, 김병연 등 14명으로 대표단을 구성했다. 대표단은 1진과 2진으로 나뉘었는데, 그는 2진으로 분류되었다. 1945년 10월 27일 1진이 미군이 제공한 항공기편으로 출발해 11월 4일 서울에 도착했고, 2진은 1946년 2월 10일 선편으로 인천항에 도착했다.

귀국 후, 그는 기자회견을 열고 해방 직후부터 국애 정치가 분열하고 불필요한 고딥과 알력으로 통일민족 국가 구성이 지연되는 현실을 지적한 뒤,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치장면에 노력하고자 환국한 것이라면서, 신정부에 주요한 일원으로 참여할 뜻을 분명히 했다. 재미한족대표단은 귀국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주 중심의 정당 통일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신탁통치 문제로 임시정부 계열이 주도하던 비상국민회의에서 좌익이 대거 이탈하고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세력이 크게 성장하면서, 이들의 계획은 위태로워졌다.

이에 김원용 등 재미한족대표단은 1946년 1월 30일 통일정권촉성회 명의로 성명을 발표해, "좌우 정당이 조속히 합작하여 양대 세력이 혼연일치하여 국내 정치 세력이 통일되는 즉시 해산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아 미군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세력을 불인정하면서 살황이 계속 나빠지자, 결국 대표단은 임시정부와 결별하고 제3당 결성운동을 전개했다.

1946년 6월 13일, 김원용은 한시대, 김호와 함께 연합회 사무실에서 신한민족당, 신한민주당, 조선혁명당, 청우당 대표들과 함께 합동교섭위원회를 구성했다. 이어 9월 19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신한민주당, 청우당, 조선혁명당, 신한민족당, 국민당, 삼우구락부, 무소속 등 8당 합동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9월 15일 천도교 대강당에서 통합대회를 거행하기로 결정했다. 예정대로 열린 통합대회에서, 김원용은 정치위원을 맡아 사회를 봤다. 그 결과, 좌우합닥을 추구하는 제3당을 표방하는 신진당이 출범했고, 만장일치로 다음과 같은 강령이 채택되었다.

1. 자주독립국가의 완성과 민주주의 정치의 실현을 기함.


2. 국민의 평등생활을 기본으로 하는 경제제도의 확립을 기함.

3. 민족문화의 건전한 발양으로서 인류문화에 공헌함을 기함.

1946년 10월, 김원용은 동료 8명과 함께 하와이에서 신진당 미주지부 결성을 추진하기로 합의하고 하와이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해 12월 미군정청의 민정장관으로 발탁된 안재홍의 후임으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에 선출되었고, 1947년 2월 10일 국내로 돌아왔다. 그는 의원 내에서 법제, 사법분과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1년간 활동하면서, 중간 세력의 결집, 좌우합작 운동, 통일국가 수립운동을 전개했다.

1947년 10월 19일 홍명희가 주도한 민주독립당의 공동의장으로 선임되었고, 10월 20일에 170명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중간파 정당의 협의체인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좌우대립이 극심해지고 통합정부 수립이 불가능해졌음이 확실해지자, 그는 낙심하여 1948년 1월 24일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다.

미국으로 돌아간 김원용은 8년간 미주의 여러 동포와 인터뷰하여 민족운동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토대로 1958년 12월 <재미한인 50년사>를 발간했다. 이 저서는 미주한인의 이민 역사 및 미주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연구하은게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다만 대한인 국민회의 입장을 지나치게 옹호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이후 북미대한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했고, 리들리에서 한인재단 재무 및 총무를 맡기도 했다. 1976년 2월 9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신장염으로 사망했다. 향년 79세.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김원용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