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 (18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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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乎. 본명은 김정진(金廷鎭), 자는 정옥(廷玉), 호는 한사(漢槎).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4년 5월 25일 한성부 소안동에서 김후규(金厚圭)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는 1900년 전주에서 이숙종(李淑鐘)과 결혼하여 아들 김영한(金玲漢)과 김경한(金景漢), 딸 김한숙(金漢淑)을 두었다. 1906년과 1907년에 대한자강회 인천지회 회원으로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했고, 1912년 중국으로 망명한 뒤 1914년 대한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의 도움을 받고 미국으로 입국한 뒤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재정 자금을 의연하였다. 1918년 4월 14일 김원용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산하에 푸에블로지방회를 설립하고 친목과 한인 사회 치안 유지에 힘썼다.

1919년 3월 17일 안창호에 의해 9개주 한인 동포의 의연금 모집과 애국심 고취를 위한 ‘특파 위원’으로 임명되어 기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했으며, 5월에는 변준호(卞俊鎬) 등과 함께 청년혈성단을 조직했으며, 12월에는 조소앙의 유럽 외교 지원과 노동·사회 발전을 위해 대한인노동사회개진당을 조직하였다. 1920년 9월 10일에 김종림(金宗林) 등과 함께 캘리포니아 중부 리들리 지역에 리들리건제회사를 설립하고 총무로서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힘썼다.

이후 김형제상회를 설립해 사업에 힘을 기울인 끝에 성공을 거둬 막대한 부를 번 김호는 1930년 중가주 한인공동회를 설립해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후원했으며, 1931년에는 인구세와 의연금을 임시정부에 송금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호 특별 의연금, 중국 항일전쟁 후원금, 국민 부담금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1941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결성되자 초대 위원장에 취임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1942년 로스앤젤레스 시청의 현기식에서 항일 전쟁의 승리와 자주 독립의 열망을 전 세계에 알렸다.

8.15 광복 후, 김호는 1945년 11월 한국으로 귀국하여 미 군정청에 '조선의 자주독립 촉성'이라는 건의안을 제출하고, 1946년 김규식을 지원하며 다방면으로 정부 수립에 관여했으나, 1948년 이승만이 집권하면서 정치적으로 소외되며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1957년에 김형순 부부와 함께 후진 양성과 조국 건설에 일조하기 위해서 리들리 한인재단을 설립하였고, 1959년 김원용에게 집필을 의뢰하여 '재미 한인 오십년사'를 간행했다. 1968년 1월 5일 로스앤젤레스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김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2년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