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템킨호 반란: 두 판 사이의 차이

잔글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1번째 줄:
1905년, 제정 러시아 흑해함대 소속 전함 포템킨에서 사병처우 및 급식에 대한 불만으로 발생한 수병들의 선상반란 사건.
[[1905년]], 제정 [[러시아]] [[흑해함대]] 소속 [[전함]] 포템킨에서 사병처우 및 급식에 대한 불만으로 발생한 수병들의 선상반란 사건.


<del>미 해군 항공모함에서 군대리아를 배식하면 일어나는 사건</del>
<del>미 해군 항공모함에서 군대리아를 배식하면 일어나는 사건</del>
11번째 줄: 11번째 줄:


== 과정 ==
== 과정 ==
1905년 6월 27일<ref>당시 제정러시아에서 쓰던 율리우스력으로 6월 14일이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 러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혼동되기 쉬운 것이 바로 역법 차이에 따른 시간 문제이다.</ref> 전함 포템킨은 훈련을 위해 어뢰정 N267과 함께 오데사를 출항한 상태였다. 점심시간이 되자 취사반을 통해 급식이 실시되었는데, 수병들은 기겁하며 급식을 거부하고 집단으로 소요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 이것도 먹으라고 준거냐? ===
1905년 6월 26일<ref>당시 제정러시아에서 쓰던 율리우스력으로 6월 13일이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 러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혼동되기 쉬운 것이 바로 역법 차이에 따른 시간 문제이다.</ref> 전함 포템킨은 훈련을 위해 어뢰정 N267과 함께 오데사를 출항한 상태였다. 어뢰정 N267의 정장인 대위 클로트 폰 유르겐스부르크(Klodt von Jurgensburg) 남작은 포템킨의 함장 예프게니 골리코프(Evgeny N. Golikov) 중령의 지시를 받아 오데사에 입항, 고기를 포함한 여러 식자재를 구매해서 포템킨에 전달했다. 밤에 식자재를 전달받은 취사반은 고기를 갑판에 걸어 놓아 다음날에 조리할 준비를 한다.


소요의 이유는 단 하나, '''고기에 구더기가 득실'''거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다음날 갑판의 수병들은 악취로 고생하기 시작했고, 해가 뜨기 시작하면서 갑판에 내걸린 고기들의 상태를 육안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고기에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끔직한 광경을 보게 된다. 이를 직접 목격한 수병들, 그리고 말로 전해듣고 갑판으로 몰려든 수병들까지 더해지면서 수백여 명의 수병들이 불만을 표하며 웅성거렸다.


단순히 고기에 구더기가 득실거린 것이 불만 폭발의 이유는 아니었다. 원래 '''보관문제로 해군은 항해중에 썩은 고기를 먹는 일이 비교적 흔했다.''' 문제는 포템킨이 오데사를 출항한 것은 '''그 전 날인 6월 26일'''이었고, 이 날 배식된 고기는 6월 26일에 오데사에서 산 거다! 즉, 처음부터 썩은 고기를 샀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정황상 장교들이 뒷돈으로 꿀걱했을 공산이 높았던 것이다.<del>이래서 먹는거 갖고 장난치면 안된다.</del>
{{인용문|일본군도 이런 썩은 고기로 만든 음식을 우리에게 주지는 않을거요!<ref>당시 전쟁중이던 적국 일본도 러시아 포로들에게 이런 형편없는 식사는 주진 않을 거란 뜻이다. 그리고 실제로 러일전쟁기 일본의 러시아군 포로 대우는 국제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수준을 넘어서 식사, 치료 등 여러 면에서 상당히 배려를 해준 편이었다.<del>그런데 왜 [[태평양 전쟁]]땐...</del></ref>|신원 불명의 포템킨 호 수병<ref>리처드 휴, 전함 포템킨(2005), 21p</ref>}}


이 소요에 불을 지핀 것은 군의관으로 '''식초로 소독해 쳐먹어 쉐키들아'''를 시전한다.(...) 당연히 사병들의 반발은 커져만 갔고, 이에 함장 예브게니 골리코프가 나서서 고기를 육상으로 보내 검수하겠다고 약속하여 무마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함장의 이러한 노력을 부장 이폴리트 길리아로프스키는 함장의 온건책에 반기를 들고, 함장이 사건을 무마하고 떠난 뒤 독단으로 사병들에게 급식을 강요하며 소금과 물로 헹궈서 먹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군의관을 말을 반복하고 급식을 거부하면 처벌하겠다고 위협했다.
단순히 고기에 구더기가 득실거린 것이 불만 폭발의 이유는 아니었다. 원래 '''보관문제로 해군은 항해중에 썩은 고기를 먹는 일이 비교적 흔했다.''' 문제는 상술했듯 포템킨이 오데사를 출항한 것은 '''그 전 날인 6월 26일'''이었고, 이 날 배식된 고기는 6월 26일에 오데사에서 산 거다! 즉, 처음부터 썩은 고기를 샀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정황상 장교들이 뒷돈으로 꿀걱했을 공산이 높았던 것이다.<del>이래서 먹는거 갖고 장난치면 안된다.</del> 설사 횡령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구매한 장교가 제대로 식자재 검수를 하지 않고 대충 샀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결국 이러한 대응이 수병들의 분노를 폭발시켜, 수병들이 함내 무기고를 장악한 후 궐기하여 주요 장교들이 피살당하거나 항복하면서 배가 수병들에 의해 접수되었다. <del>사건 잘 무마시켰는데 고문관 부장땜시 괜히 같이 희생된</del> 함장 골리코프 대령을 포함해 사병들의 분노를 유발시킨 부장과 군의관이 모두 죽었고, 그들을 따르던 장교진도 다수가 살해되었다. 이후 동행하던 어뢰정 N267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나 수병들이 접수했다.
이 소요에 불을 지핀 것은 군의관 스미르노프(Smirnov)였다.
 
{{인용문|이건 좋은 고기야, 아무 문제 없어.<del>뭐라고요?</del> 식초로 씻어내기만 하면 되.|스미르노프 군의관, 병사들을 제지하며}}
 
간단히 말해 '''식초로 소독해 쳐먹어 쉐키들아'''를 시전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아무렇지도 않게 취사반에게 이 고기로 점심을 준비할 것을 지시한다. 당연히 사병들의 반발은 커져만 갔고, <del>자기가 기름 부어놓고</del> 뭔가 상태가 심상찮다고 판단한 스미르노프는 수병들의 소요가 심각해져 간다고 함장에게 보고했다. 이에 골리코프 함장이 나서서 수병들을 집한시킨 후 가벼운 수준으로 사용되는 상투적인 위협(니들 자꾸 시끄럽게 하면 교수형시킨다?) 한 마디를 던진 후 고기를 육상으로 보내 검수하겠다고 약속하는 채찍과 당근 화법으로 사태를 일단락시켰다.
 
그러나 함장의 이러한 노력을 부장 이폴리트 길리아로프스키가 뒤엎는다. 평소 함장의 온건책에 불만이 많던 길리아로프스키는 함장이 이렇게 약하게 나온다면 수병들을 통제할 수 없다고 반발하며 함장이 연설을 마치고 해산시킨 수병들을 바로 재소집했다. 길리아로프스키는 사병식당에서 사병들이 빵과 물로만 식사하고 고기로 끓인 보르시(borsh)<ref>러시아 요리의 일종인 고기스프</ref>를 거부하는 것을 보고 왔던지라 더더욱 격분해서 사병들에게 급식을 강요하며 소금과 물로 헹궈서 먹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군의관을 말을 반복하고 급식을 거부하면 처벌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럼에도 아무도 보르시 식사를 하려하지 않자<del>솔직히 먹고싶겠나...</del> 오후 1시, 사병들을 갑판에 불러모아 주동자를 색출하라고 난리를 피우며 임의로 12명을 뽑아내어 방수포를 뒤엎는다. 이는 '''총살형에 앞서 수병들의 얼굴과 몸을 뒤엎는 행위'''로 총살형을 집행하는 병사들이 동료 병사를 총살하는데 있어 감정적 망설임을 줄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부장의 지시에 사병들은 급격히 동요하기 시작하고 불만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다만, 시일이 지난 후 상식적인 선에서 연구가 진행되면서 길리아로프스키가 진짜 총살형을 집행하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대다수이다. 총살형의 권한은 함장에게만 제한적으로 부여되어 있었고, 부장에게는 사병 징계의 수단으로서 '''태형 및 구류'''만이 가능했다. 즉, 길리아로프스키는 총살형 위협을 하며 사병들의 불만을 힘으로 억누르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끓는 물에 기름을 붓는 격이고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del>불난 집에 부채질은 군의관이 이미 했다.</del> <del>이건 불난 집에 부채질한 상황에서 기름까지 붓는 격이다.</del>
 
결국 이러한 대응이 수병들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수병 중 소수 사회주의가 및 선동가들에 의해 무기를 들고 일어서자는 외침이 시작되었다. 부장이 위협용으로 갑판에 배치시킨 위병들조차 부장의 통제를 따르길 거부했고, 격분한 선원들은 즉시 무기고를 접수하고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발생한 총격전에서 수병 1명과 길리아로프스키, 그리고 길리아로프스키를 따르던 견습사관 1명이 죽었고 피를 본 수병들은 흥분하며 장교들을 색출해내기 시작했다. 길리아로프스키와 별개로 각자 업무를 보고 있던 장교들은 총성에 당황하여 상황 파악을 위해 뛰쳐나오다가 사살당했다. 일부는 바다에 몸을 던져 어뢰정 N267로 도망치거나 도망치던 중 사살되었다.
 
사회주의자 코발렌코 대위는 봉기에 참가하고자 했으나 어설프게 나섰다가 장교라는 신분상 사살될 것을 우려 몸을 숨기고 있었고, 평민 출신 톤 대위는 사병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섰으나 설득에 실패하고 교전 끝에 사살되었다.
 
한편 골리코프 함장은 총성 등을 통해 부장이 사고쳤다는 것을 깨닫고 측근장교 1명을 탄약고로 보내 불을 붙여 자침을 시도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포템킨은 '''전함'''이었고 흑해함대에 포템킨에 맞설 전함은 한두 척에 불과해서 이 배가 고스란히 반란군의 것이 된다면 진압할 수단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장교는 탄약고로 향하던 도중 수병들에게 잡히자 반란 참여를 선언하며 함장을 배신했다.
 
이후 골리코프 함장은 발견당해 사살되었고, 숨어있던 <del>불난 집에 부채질한</del> 군의관 스미르노프는 끌려나와 구더기가 생긴 고기를 강제로 입에 물린 채 사살되었다.
 
한편, 포템킨에서 탈출한 장교들을 통해 상황을 파악한 어뢰정 N267정은 도주를 시도했으나 포템킨의 수병들이 어뢰정을 향해 발포, 탈출이 어렵다고 판단한 N267정의 수병들이 장교들을 위협하고 장교들 역시 탈출이 어렵다는 데 동의함으로서 도주를 포기한다. 이후 N267정은 항복, 포템킨에서 탈출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장교들은 흥분을 가라앉힌 수병들덕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감금된다.<del>그 와중에 썪은 고기 사 온 장본인 유르겐스부르크도 살았다.</del>
 
=== 포템킨의 적기 ===
(작성중)


이후 수병들은 적기를 게양하고 병사위원회를 조직한 후 오데사 항으로 가서 군 주둔지에 몇 차례 포격을 가하여 정부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흑해함대는 포템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흑해함대 나머지 함정들에게 출동명령을 내렸으나 오히려 포함 1척이 반란에 가담하고 나머지 함정들도 수병들의 불온한 움직임이 포착되는 등 개판오분전으로 흘러갔다.
이후 수병들은 적기를 게양하고 병사위원회를 조직한 후 오데사 항으로 가서 군 주둔지에 몇 차례 포격을 가하여 정부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흑해함대는 포템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흑해함대 나머지 함정들에게 출동명령을 내렸으나 오히려 포함 1척이 반란에 가담하고 나머지 함정들도 수병들의 불온한 움직임이 포착되는 등 개판오분전으로 흘러갔다.

2015년 7월 27일 (월) 23:33 판

1905년, 제정 러시아 흑해함대 소속 전함 포템킨에서 사병처우 및 급식에 대한 불만으로 발생한 수병들의 선상반란 사건.

미 해군 항공모함에서 군대리아를 배식하면 일어나는 사건

당시 상황 및 배경

사건이 발발한 1905년 6월은 러일전쟁이 끝나가고 있던 시기였다. 쓰시마 해전으로 러시아 발틱함대가 괴멸당했지만, 포템킨 호는 흑해함대 소속 전함으로, 다르다넬스-보스포로스 해협의 통과 문제 등으로 인해 흑해함대가 일본 원정에 참여하지 못하면서 평상적인 임무와 훈련 업무를 소화중이었다.

러시아 내부는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전국적으로 시위와 파업이 일어나는 중으로 러시아 정부가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불만은 가중되고 시위는 확산일로였다. 여기에 전쟁에서 사실상 패전했다는 분위기까지 겹치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은 극도로 쌓여갔다.

해군의 경우, 당대 주요국가 중 수병에 대한 처우가 가장 안 좋기로 악명높았고, 귀족 출신들이 주로 고급장교직을 독차지하면서 귀족과 평민이라는 계급갈등 요소까지 잠복해 있었다. 특히, 전쟁으로 예산이 부족해지면서 전투에 투입되지 않은 후방부대에 대한 예산은 넉넉하지 못했다.

과정

이것도 먹으라고 준거냐?

1905년 6월 26일[1] 전함 포템킨은 훈련을 위해 어뢰정 N267과 함께 오데사를 출항한 상태였다. 어뢰정 N267의 정장인 대위 클로트 폰 유르겐스부르크(Klodt von Jurgensburg) 남작은 포템킨의 함장 예프게니 골리코프(Evgeny N. Golikov) 중령의 지시를 받아 오데사에 입항, 고기를 포함한 여러 식자재를 구매해서 포템킨에 전달했다. 밤에 식자재를 전달받은 취사반은 고기를 갑판에 걸어 놓아 다음날에 조리할 준비를 한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다음날 갑판의 수병들은 악취로 고생하기 시작했고, 해가 뜨기 시작하면서 갑판에 내걸린 고기들의 상태를 육안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고기에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끔직한 광경을 보게 된다. 이를 직접 목격한 수병들, 그리고 말로 전해듣고 갑판으로 몰려든 수병들까지 더해지면서 수백여 명의 수병들이 불만을 표하며 웅성거렸다.

일본군도 이런 썩은 고기로 만든 음식을 우리에게 주지는 않을거요![3]
— 신원 불명의 포템킨 호 수병[2]

단순히 고기에 구더기가 득실거린 것이 불만 폭발의 이유는 아니었다. 원래 보관문제로 해군은 항해중에 썩은 고기를 먹는 일이 비교적 흔했다. 문제는 상술했듯 포템킨이 오데사를 출항한 것은 그 전 날인 6월 26일이었고, 이 날 배식된 고기는 6월 26일에 오데사에서 산 거다! 즉, 처음부터 썩은 고기를 샀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정황상 장교들이 뒷돈으로 꿀걱했을 공산이 높았던 것이다.이래서 먹는거 갖고 장난치면 안된다. 설사 횡령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구매한 장교가 제대로 식자재 검수를 하지 않고 대충 샀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이 소요에 불을 지핀 것은 군의관 스미르노프(Smirnov)였다.

이건 좋은 고기야, 아무 문제 없어.뭐라고요? 식초로 씻어내기만 하면 되.
— 스미르노프 군의관, 병사들을 제지하며

간단히 말해 식초로 소독해 쳐먹어 쉐키들아를 시전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아무렇지도 않게 취사반에게 이 고기로 점심을 준비할 것을 지시한다. 당연히 사병들의 반발은 커져만 갔고, 자기가 기름 부어놓고 뭔가 상태가 심상찮다고 판단한 스미르노프는 수병들의 소요가 심각해져 간다고 함장에게 보고했다. 이에 골리코프 함장이 나서서 수병들을 집한시킨 후 가벼운 수준으로 사용되는 상투적인 위협(니들 자꾸 시끄럽게 하면 교수형시킨다?) 한 마디를 던진 후 고기를 육상으로 보내 검수하겠다고 약속하는 채찍과 당근 화법으로 사태를 일단락시켰다.

그러나 함장의 이러한 노력을 부장 이폴리트 길리아로프스키가 뒤엎는다. 평소 함장의 온건책에 불만이 많던 길리아로프스키는 함장이 이렇게 약하게 나온다면 수병들을 통제할 수 없다고 반발하며 함장이 연설을 마치고 해산시킨 수병들을 바로 재소집했다. 길리아로프스키는 사병식당에서 사병들이 빵과 물로만 식사하고 고기로 끓인 보르시(borsh)[4]를 거부하는 것을 보고 왔던지라 더더욱 격분해서 사병들에게 급식을 강요하며 소금과 물로 헹궈서 먹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군의관을 말을 반복하고 급식을 거부하면 처벌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럼에도 아무도 보르시 식사를 하려하지 않자솔직히 먹고싶겠나... 오후 1시, 사병들을 갑판에 불러모아 주동자를 색출하라고 난리를 피우며 임의로 12명을 뽑아내어 방수포를 뒤엎는다. 이는 총살형에 앞서 수병들의 얼굴과 몸을 뒤엎는 행위로 총살형을 집행하는 병사들이 동료 병사를 총살하는데 있어 감정적 망설임을 줄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부장의 지시에 사병들은 급격히 동요하기 시작하고 불만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다만, 시일이 지난 후 상식적인 선에서 연구가 진행되면서 길리아로프스키가 진짜 총살형을 집행하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대다수이다. 총살형의 권한은 함장에게만 제한적으로 부여되어 있었고, 부장에게는 사병 징계의 수단으로서 태형 및 구류만이 가능했다. 즉, 길리아로프스키는 총살형 위협을 하며 사병들의 불만을 힘으로 억누르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끓는 물에 기름을 붓는 격이고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불난 집에 부채질은 군의관이 이미 했다. 이건 불난 집에 부채질한 상황에서 기름까지 붓는 격이다.

결국 이러한 대응이 수병들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수병 중 소수 사회주의가 및 선동가들에 의해 무기를 들고 일어서자는 외침이 시작되었다. 부장이 위협용으로 갑판에 배치시킨 위병들조차 부장의 통제를 따르길 거부했고, 격분한 선원들은 즉시 무기고를 접수하고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발생한 총격전에서 수병 1명과 길리아로프스키, 그리고 길리아로프스키를 따르던 견습사관 1명이 죽었고 피를 본 수병들은 흥분하며 장교들을 색출해내기 시작했다. 길리아로프스키와 별개로 각자 업무를 보고 있던 장교들은 총성에 당황하여 상황 파악을 위해 뛰쳐나오다가 사살당했다. 일부는 바다에 몸을 던져 어뢰정 N267로 도망치거나 도망치던 중 사살되었다.

사회주의자 코발렌코 대위는 봉기에 참가하고자 했으나 어설프게 나섰다가 장교라는 신분상 사살될 것을 우려 몸을 숨기고 있었고, 평민 출신 톤 대위는 사병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섰으나 설득에 실패하고 교전 끝에 사살되었다.

한편 골리코프 함장은 총성 등을 통해 부장이 사고쳤다는 것을 깨닫고 측근장교 1명을 탄약고로 보내 불을 붙여 자침을 시도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포템킨은 전함이었고 흑해함대에 포템킨에 맞설 전함은 한두 척에 불과해서 이 배가 고스란히 반란군의 것이 된다면 진압할 수단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장교는 탄약고로 향하던 도중 수병들에게 잡히자 반란 참여를 선언하며 함장을 배신했다.

이후 골리코프 함장은 발견당해 사살되었고, 숨어있던 불난 집에 부채질한 군의관 스미르노프는 끌려나와 구더기가 생긴 고기를 강제로 입에 물린 채 사살되었다.

한편, 포템킨에서 탈출한 장교들을 통해 상황을 파악한 어뢰정 N267정은 도주를 시도했으나 포템킨의 수병들이 어뢰정을 향해 발포, 탈출이 어렵다고 판단한 N267정의 수병들이 장교들을 위협하고 장교들 역시 탈출이 어렵다는 데 동의함으로서 도주를 포기한다. 이후 N267정은 항복, 포템킨에서 탈출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장교들은 흥분을 가라앉힌 수병들덕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감금된다.그 와중에 썪은 고기 사 온 장본인 유르겐스부르크도 살았다.

포템킨의 적기

(작성중)

이후 수병들은 적기를 게양하고 병사위원회를 조직한 후 오데사 항으로 가서 군 주둔지에 몇 차례 포격을 가하여 정부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흑해함대는 포템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흑해함대 나머지 함정들에게 출동명령을 내렸으나 오히려 포함 1척이 반란에 가담하고 나머지 함정들도 수병들의 불온한 움직임이 포착되는 등 개판오분전으로 흘러갔다.

문제는 포템킨 내부에 있었다. 피꺼솟한 사병들이 집단으로 들고 일어나 배를 접수한 거까진 좋은데 그 이후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나 목표가 없었고, 물자도 부족한 상황에 놓였다. 결국 자연스레 내부갈등이 발생했고, 그 와중에 보급물자 획득을 위한 교섭차 상륙했던 일부 리더급 병사들이 사살되거나 체포되었고 동행하던 어뢰정 N267이 먼저 이탈해 정부군에 투항하면서 포템킨의 고립은 심해졌다.

이에 병사들은 회의를 통해 항복하면 짜르가 우릴 살려줄 리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흑해연안의 국가 중 가장 가까웠던 루마니아의 이스마일 항으로 가 7월 7일 배를 자침시킨 뒤 루마니아에 망명하는 것으로 반란은 끝났다.

후일담

  • 루마니아는 이웃강대국 러시아를 두려워하여 망명한 사병 중 다수를 러시아로 송환하였다. 러시아는 리더급들을 모조리 사형에 처하고 나머지 대부분을 시베리아나 형무소로 보냈다. 루마니아에 잔류를 허가받은 사병들도 안습한게, 1906년에 루마니아에서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농민봉기가 일어나자 괜히 이 사병들까지 연루되어서 감옥에 끌려갔다.(...) 대신 루마니아 감옥에 갇힌 사병들 중 생존자들은 후일 러시아 혁명 이후 모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 러일전쟁으로 해군력을 몽땅 말아먹은 러시아는 자침시킨 포템킨을 건져내서 현역에 복귀시키는 근성을 발휘한다.(...)
  • 후일 소련은 러시아 혁명의 기원이라며 이 사건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물론 실상은 개차반 사병대우에 원인을 둔 대규모 선상반란 중 하나일 뿐이지만.
  • 소련에서 이를 소재로 한 선전영화를 만들었는데 1925년작 전함 포템킨이 그것이다. 시대가 시대다보니 당연히 흑백, 무성영화지만 상당한 수작. 계단에서 떨어지는 유모차 장면은 영화계의 레전드다. 한국에서는 공산권 선전영화라며 방영되지 못했고, 민주화가 된 90년대에나 정식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각주

  1. 당시 제정러시아에서 쓰던 율리우스력으로 6월 13일이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 러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혼동되기 쉬운 것이 바로 역법 차이에 따른 시간 문제이다.
  2. 리처드 휴, 전함 포템킨(2005), 21p
  3. 당시 전쟁중이던 적국 일본도 러시아 포로들에게 이런 형편없는 식사는 주진 않을 거란 뜻이다. 그리고 실제로 러일전쟁기 일본의 러시아군 포로 대우는 국제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수준을 넘어서 식사, 치료 등 여러 면에서 상당히 배려를 해준 편이었다.그런데 왜 태평양 전쟁땐...
  4. 러시아 요리의 일종인 고기스프

틀: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