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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 축구선수 현 해설가
한국의 전 축구선수 현 해설가


== 선수 시절 ==
=== [[분데스리가]] 진출 이전(~1979)===
고려대학교 1학년 시절 국가대표팀 역대 최연소 출장기록을 세우며 [[분데스리가]]로 진출하기 전까지 핵심선수로 활약했다. 거의 노예 수준으로 뛰었는데 국내선수 최초로 [[FIFA 센추리 클럽]]에 가입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A매치를 129경기나 소화했다. 그 기간이 1972년부터 1978년이니 즉 7년만에 저렇게 많은 경기를 소화했다는 소리다.<ref>당초 차범근의 A매치 기록은 121경기 55득점으로 알려져있었으나 대한축구협회에서 기록을 정리하다 누락이 있음을 확인하고 132경기 59득점으로 정정했다. 남은 3경기는 당연히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 소속으로 출전한 [[1986년 FIFA 월드컵|1986 월드컵]]이다.</ref> 당시 국내 최고의 스트라이커 [[이회택]] 때문에 라이트윙으로 뛰었으나 곧장 핵심선수로 자리잡았으며 1976년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기록한 해트트릭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대학교 졸업 후에는 장학금을 지원해준 신탁은행에서 뛰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신탁은행이 서울은행과 합병했고, 그 과정에서 민병대 감독을 따라 자동차보험으로 이적하려다 무산되어 결국 1976년 10월, 공군에 입대한다.<ref>뜬금없이 무슨 자동차보험이냐 싶겠지만 동부화재의 과거 사명이 한국자동차보험이었고 그 산하에 있던 실업축구단이다.</ref><ref>차범근은 신탁은행이 서울은행과 합병해서 해체된 것이니 자신이 무소속이라는 것이고, 서울신탁은행 측에서는 해체가 아니라 통합이니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 과정에서 차범근은 무적(無籍)선수가 되었고, 국가대표 경기에 출전시키기 위해 대한축구협회 소속으로 등록하는 해프닝도 있었다.</ref><ref>차범근이 공군 만기전역을 했다고 해서 일반병으로 복무한 줄 아는 사람이 있는데 당시에는 공군에도 축구팀이 있었고, 이 공군 축구단에서 뛰면서 국가대표 경기에도 출전했다.</ref>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공군은 복무기간이 긴 편이었고, 차범근은 참모총장 직권으로 타군과 동일한 기간으로 복무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입대했다. 그래서 1978년 12월 [[분데스리가]]의 [[SV 다름슈타트 98|다름슈타트]]와 계약을 맺고 데뷔전까지 뛰었다. 그러나 공군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귀국하여 5월에 제대한 뒤 6월이 되어서야 서독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ref>썰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의 지시였다고도 하나 차범근 본인도 그냥 풍문으로만 들었다고 하니 진위는 알 수 없는 이야기.</ref>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프랑크푸르트]](1979~1983) ===
우여곡절 끝에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프랑크푸르트]]로 이적하여 1979/80시즌부터 본격적인 [[분데스리가]] 선수생활을 시작한다. 온라인상으로 떠도는 정체불명의 영상처럼 해트트릭을 기록하고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골을 넣었다는 얘기는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그것과 별개로 당시 서독 축구계에 [[충격과 공포다 그지깽깽이들아|충격과 공포]]를 안겨준 건 사실이었다. 1977년에 일본의 [[오쿠데라 야스히코]]가 [[1. FC 쾰른|쾰른]]으로 이적해 [[UEFA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언컵]] 4강에서 골도 넣었었지만 [[분데스리가]]를 주름잡는 수준은 아니었고, 그때까지 흑인 선수는 단 1명조차 없을 정도로 [[분데스리가]]는 유럽인들의 세계였다.<ref>최초의 흑인 선수는 4년 뒤에 데뷔하며, 독일에서 태어나지 않은 흑인 선수는 1990년이 되어서야 등장한다. 이 선수가 바로 차범근과 함께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프랑크푸르트]] 역대 베스트11에 선정된 가나의 전설적인 공격수 [[토니 예보아]]다.</ref> 그런데 축구변방인 [[대한민국]]에서 건너온 선수가 정상급 플레이를 선보이니 당연히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당시 유럽 최고의 선수였던 [[케빈 키건]],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라이벌로 여겨졌으며, 실제로 [[키커]]는 1979/80시즌 전반기 평가에서 키건이 아니라 차범근을 외국인 전체 1위로 선정했다.<ref>차범근이 토크콘서트에서 자신이 키건과 루메니게보다 높은 등급을 받았다고 말한 게 바로 이것. 그러나 루메니게는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외국인이었던 차범근과 같은 랭킹에 있을 수가 없었다. 누가 잘못 말해줬거나 평점 순위와 착각한 듯 싶다. 후반기 평가는 키건이 1위, 차범근이 6위.</ref> 일반적으로 국내에서 차범근의 커리어 하이 시즌을 리그 17골을 기록한 1985/86시즌으로 생각하지만 당시의 평가를 봤을 때는 데뷔시즌인 1979/80시즌이 커리어 하이라고 할 수 있다.<ref>1980년 [[독일 올해의 선수]]에서도 5표를 받아 12위에 올랐으며, 외국인으로선 키건 다음으로 높은 순위였다. 반면 1986년에는 1표를 받는데 그쳤다.</ref> 당연히 [[키커]] 시즌 베스트11에도 선정됐으며,<ref>주간 베스트11 선정횟수로 정하는데 8회로 전체 5위였다.</ref>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프랑크푸르트]]는 9위에 그쳤지만 [[UEFA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ref>차범근이 2차전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고 알려져있으나 실제로는 아니다.</ref>
그러나 이런 임팩트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는데 [[키커]]는 1979/80시즌 후반기 평가에서 '전반기만큼 위력적이지 않았으며 수비수들이 차범근을 상대하는 법을 터득한 것 같다.'라고 평했으며, 2번째 시즌에는 허리부상을 당하며 1개월간 결장하고 그 후유증으로 고생했다.<ref>차범근은 8주간 결장했다고 말했으나 실제로는 4주다.</ref> 그래도 [[DFB-포칼]] 결승전에서 골을 넣으며 트로피를 챙겼으며 꾸준히 팀의 주축선수로 활약했다.<s>임팩트가 떨어진 게 탈아시아급인 게 함정</s><ref>농담이 아니고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에서 4시즌 뛰면서 단 한 번도 키커 평가에서 K등급 아래로 내려가본 적이 없다. 현재 한국축구의 아이돌이라고 할 수 있는 [[손흥민]]은 이번시즌에 처음으로 K를 받아봤다!</ref> 1982/83시즌에는 본인의 리그 최다득점이던 15골을 기록했으나 팀의 재정문제로 떠나야했고 결국 승격한지 얼마 되지 않은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으로 이적하게 된다.<ref>당시 이탈리아의 [[AC 밀란|밀란]]과 [[SSC 나폴리|나폴리]]가 이적제의를 했다고 해서 빅클럽에서 인정받은 최고의 선수 떡밥이 있다. 그러나 밀란은 [[1980 토토네로|승부조작]]의 영향으로 승강을 반복하던 중소클럽이었고 [[나폴리]]는 [[디에고 마라도나]]를 영입하기 전이었다.</ref><ref>[[세리에 A]]로 가지 않고 [[분데스리가]]에 남은 이유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프랑크푸르트]] 부회장이 선수들을 속여서 막대한 빚이 생겼고 그걸 갚기 위해서라고...</ref>
===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1983~1989) ===
== 감독 시절 ==
== 주석 ==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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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24일 (금) 01:41 판

Cha Bum-Kun in 2009

한국 축구계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한 축구선수

갈색 폭격기

Cha Bum

개요

한국의 전 축구선수 현 해설가

선수 시절

분데스리가 진출 이전(~1979)

고려대학교 1학년 시절 국가대표팀 역대 최연소 출장기록을 세우며 분데스리가로 진출하기 전까지 핵심선수로 활약했다. 거의 노예 수준으로 뛰었는데 국내선수 최초로 FIFA 센추리 클럽에 가입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A매치를 129경기나 소화했다. 그 기간이 1972년부터 1978년이니 즉 7년만에 저렇게 많은 경기를 소화했다는 소리다.[1] 당시 국내 최고의 스트라이커 이회택 때문에 라이트윙으로 뛰었으나 곧장 핵심선수로 자리잡았으며 1976년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기록한 해트트릭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대학교 졸업 후에는 장학금을 지원해준 신탁은행에서 뛰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신탁은행이 서울은행과 합병했고, 그 과정에서 민병대 감독을 따라 자동차보험으로 이적하려다 무산되어 결국 1976년 10월, 공군에 입대한다.[2][3][4]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공군은 복무기간이 긴 편이었고, 차범근은 참모총장 직권으로 타군과 동일한 기간으로 복무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입대했다. 그래서 1978년 12월 분데스리가다름슈타트와 계약을 맺고 데뷔전까지 뛰었다. 그러나 공군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귀국하여 5월에 제대한 뒤 6월이 되어서야 서독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5]

프랑크푸르트(1979~1983)

우여곡절 끝에 프랑크푸르트로 이적하여 1979/80시즌부터 본격적인 분데스리가 선수생활을 시작한다. 온라인상으로 떠도는 정체불명의 영상처럼 해트트릭을 기록하고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골을 넣었다는 얘기는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그것과 별개로 당시 서독 축구계에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 건 사실이었다. 1977년에 일본의 오쿠데라 야스히코쾰른으로 이적해 유러피언컵 4강에서 골도 넣었었지만 분데스리가를 주름잡는 수준은 아니었고, 그때까지 흑인 선수는 단 1명조차 없을 정도로 분데스리가는 유럽인들의 세계였다.[6] 그런데 축구변방인 대한민국에서 건너온 선수가 정상급 플레이를 선보이니 당연히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당시 유럽 최고의 선수였던 케빈 키건,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라이벌로 여겨졌으며, 실제로 키커는 1979/80시즌 전반기 평가에서 키건이 아니라 차범근을 외국인 전체 1위로 선정했다.[7] 일반적으로 국내에서 차범근의 커리어 하이 시즌을 리그 17골을 기록한 1985/86시즌으로 생각하지만 당시의 평가를 봤을 때는 데뷔시즌인 1979/80시즌이 커리어 하이라고 할 수 있다.[8] 당연히 키커 시즌 베스트11에도 선정됐으며,[9] 프랑크푸르트는 9위에 그쳤지만 UEFA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10]

그러나 이런 임팩트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는데 키커는 1979/80시즌 후반기 평가에서 '전반기만큼 위력적이지 않았으며 수비수들이 차범근을 상대하는 법을 터득한 것 같다.'라고 평했으며, 2번째 시즌에는 허리부상을 당하며 1개월간 결장하고 그 후유증으로 고생했다.[11] 그래도 DFB-포칼 결승전에서 골을 넣으며 트로피를 챙겼으며 꾸준히 팀의 주축선수로 활약했다.임팩트가 떨어진 게 탈아시아급인 게 함정[12] 1982/83시즌에는 본인의 리그 최다득점이던 15골을 기록했으나 팀의 재정문제로 떠나야했고 결국 승격한지 얼마 되지 않은 레버쿠젠으로 이적하게 된다.[13][14]

레버쿠젠(1983~1989)

감독 시절

주석

  1. 당초 차범근의 A매치 기록은 121경기 55득점으로 알려져있었으나 대한축구협회에서 기록을 정리하다 누락이 있음을 확인하고 132경기 59득점으로 정정했다. 남은 3경기는 당연히 레버쿠젠 소속으로 출전한 1986 월드컵이다.
  2. 뜬금없이 무슨 자동차보험이냐 싶겠지만 동부화재의 과거 사명이 한국자동차보험이었고 그 산하에 있던 실업축구단이다.
  3. 차범근은 신탁은행이 서울은행과 합병해서 해체된 것이니 자신이 무소속이라는 것이고, 서울신탁은행 측에서는 해체가 아니라 통합이니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 과정에서 차범근은 무적(無籍)선수가 되었고, 국가대표 경기에 출전시키기 위해 대한축구협회 소속으로 등록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4. 차범근이 공군 만기전역을 했다고 해서 일반병으로 복무한 줄 아는 사람이 있는데 당시에는 공군에도 축구팀이 있었고, 이 공군 축구단에서 뛰면서 국가대표 경기에도 출전했다.
  5. 썰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의 지시였다고도 하나 차범근 본인도 그냥 풍문으로만 들었다고 하니 진위는 알 수 없는 이야기.
  6. 최초의 흑인 선수는 4년 뒤에 데뷔하며, 독일에서 태어나지 않은 흑인 선수는 1990년이 되어서야 등장한다. 이 선수가 바로 차범근과 함께 프랑크푸르트 역대 베스트11에 선정된 가나의 전설적인 공격수 토니 예보아다.
  7. 차범근이 토크콘서트에서 자신이 키건과 루메니게보다 높은 등급을 받았다고 말한 게 바로 이것. 그러나 루메니게는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외국인이었던 차범근과 같은 랭킹에 있을 수가 없었다. 누가 잘못 말해줬거나 평점 순위와 착각한 듯 싶다. 후반기 평가는 키건이 1위, 차범근이 6위.
  8. 1980년 독일 올해의 선수에서도 5표를 받아 12위에 올랐으며, 외국인으로선 키건 다음으로 높은 순위였다. 반면 1986년에는 1표를 받는데 그쳤다.
  9. 주간 베스트11 선정횟수로 정하는데 8회로 전체 5위였다.
  10. 차범근이 2차전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고 알려져있으나 실제로는 아니다.
  11. 차범근은 8주간 결장했다고 말했으나 실제로는 4주다.
  12. 농담이 아니고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에서 4시즌 뛰면서 단 한 번도 키커 평가에서 K등급 아래로 내려가본 적이 없다. 현재 한국축구의 아이돌이라고 할 수 있는 손흥민은 이번시즌에 처음으로 K를 받아봤다!
  13. 당시 이탈리아의 밀란나폴리가 이적제의를 했다고 해서 빅클럽에서 인정받은 최고의 선수 떡밥이 있다. 그러나 밀란은 승부조작의 영향으로 승강을 반복하던 중소클럽이었고 나폴리디에고 마라도나를 영입하기 전이었다.
  14. 세리에 A로 가지 않고 분데스리가에 남은 이유는 프랑크푸르트 부회장이 선수들을 속여서 막대한 빚이 생겼고 그걸 갚기 위해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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