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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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剛. 호는 오산(吾山, 鰲山), 본명은 이정래(李正來).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8년 4월 18일 평안남도 용강군 삼남면 의방리에서 부친 이병훈(李秉勳)과 모친 박성심(朴誠心)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그가 구술했을 것이라 여겨지는 <오산약전>에 따르면, 그는 7살 때부터 17살까지 향리의 김창승(金昌昇) 문하에서 한문을 배우고 중국에 유학하고자 안동현까지 갔다가 돌아와 감리회에 입교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오촌 당숙을 통해 안창호의 이름을 처음 접했고, 임기반(林基盤)의 집을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예기치 않게 안창호를 만났다고 한다. 이후 안창호와 자주 교류하던 그는 1903년 초 하와이 이민 모집 광고를 접한후 고향에 부모님을 남겨두고 1903년 4월 초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하는 차이나호를 타고 이민 길에 올라 4월 14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이민국에 등록된 그의 이름은 본명인 이정래(李正來)로 되어 있다.

그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1년간 노동을 하면서 영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고, 노동계약이 끝나자 1904년 4월 경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그는 안창호를 비롯한 한인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리버사이드로 옮겼고, 그곳에 노동소개소를 개소하고 한인 노동자들에게 철로 공사장과 농장, 특히 오렌지 농장 등지에서 직업을 알선해주면서 한인 공동체를 이뤄나갔다. 그러던 중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려 한다는 소식이 미주 한인사회에 전해지자, 한인친목회 회원들은 조국의 구국운동에 기여할 수 있는 정치단체로 발전시키기로 했다. 이리하여 1905년 4월 5일 항일운동과 동족상애를 목적으로 하는 '공립협회'를 결성했다.

1905년 말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공립협회는 더욱 조직 구축에 박차를 가하여 공립협회 중앙본부 산하에 각 지방 지회를 두었으며, 빠른 시일 에 캘리포니아주를 중심으로 한 미주 서해안 일대에 9개 지회와 8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이때 이강은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일을 하면서 공립협회 리버사이드 지방회장으로 복무했다. 그는 다양한 국권회복의 방략을 모색한 끝애 한인이 거주하는 전 지역에 국권 회복을 담당할 중심적 기관을 설치하고 이를 조직적으로 통일한 후 독립전쟁을 수행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안창호를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1907년 1월 초순, 이강, 안창호, 임준기, 신달윤, 박영순, 이재수 등은 '대한신민회'를 발기해 위기에 처한 조국을 일신해서 새로운 국민국가 건설에 노력하기로 결의했다. 1907년 2월 안창호가 국내로 귀국한 뒤, 공립협회는 만주 및 연해주 지역을 활동의 거점으로 만들기 위해 제1차 원동위원으로 김성무를 파견했고, 제2차 원동위원으로 이강을 파견했다. 이강은 국내로 귀환하던 도중에 일본 도쿄에 들려 신문발간을 위한 활자를 사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자, 초등학교 교과서류를 사서 들여왔다. 1907년 8월 27일 국내로 들어온 이강은 공립협회 회장인 안창호와 원동사업에 대해 긴밀히 논의했다. 그리고 국내에 체류하는 동안 서우학회에 참여해 활동하다가 1908년 3월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이강은 그곳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들이 민족의식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훗날 그는 <나의 망명생활 50년기>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당시 재러 한인사회는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그 전부터 해삼위에 영주한 교포들, 또하나는 일제가 우리 땅을 침범하자 망명한 교포들이었다. (중략) 민족의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더욱이 날이 갈수록 혹심해가는 교포들의 난폭한 행위를 시정하기 위하여 나는 그들 앞에 목숨을 걸고 민족운동의 봉화를 들 것을 결심했었다. 나는 몇 사람의 동료를 포섭하기에 이르렀다. 오직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들을 선도할 방침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조국에 대한 올바른 의식과 민족사상을 고취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먼저 블라디보스토크 최초의 한인 신문인 <해조신문>의 편집인으로 참여하면서 재러 한인사회에 이름을 알렸고, 기성의 거류민회와 청년회 등과 긴밀히 교류하면서 공립협회의 비전을 펼치려 노력했다. 이강은 배일 성향이 강한 인물들로 구성된 재러한인 거류민회의 유력자들과 청년회 회원들과 협력해 기족의 유력 민족주의 애국단체를 공립협회 지회로 재편했다. 그리고 공립협회가 국민회로 확대 개편된 1909년 이후에는 대대적인 민회대회를 개최하고 국민회 조직으로의 참여를 유도하여 재러 한인사회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해 성공적으로 재러 한인사회에 안착해 나갔다.

이무렵, 이강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청년회 사찰원에 임명된 안중근을 만났다. 그는 이때의 만남을 후에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가 그를 안 것은 그가 의병을 일으키기 전에 해삼위에서 청년단 사찰간부로 있을 때였다. 그에게는 평소부터 (의걸)다운 기질이 엿보였다. 그후 그는 해삼위를 떠나서 의병을 거느리고 의병과 투쟁하였다. 그런데 그는 겨냥한 총알이 빗나가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의 명사수였다. 그야말로 백발백중이었다.

1908년 11월 18일, 이강을 비롯한 공립협회 원동위원들은 <대동공보>를 창간했다. 그는 이 신문에서 주필을 맡아 활발한 항일 언론투쟁을 벌였다. 또한 그는 교회를 세워 일요일과 수요일에 설교를 담당했으며, 1년 과정의 사범학교를 신설하여 재러한인시회에 민족교육을 담당할 국어교사들을 양성했다. 그러던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V.N.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강은 대동공보사 관련 인물들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것을 조심스레 논의했다. 그들이 논의한 결과 백발백중의 명사수이며 애국심이 출중한 자로 알려진 안중근이 의거를 담당할 적임자로 추천되었다. 이강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가 "이등박문이 하얼빈에 온다는데 그 자를 어떻게 처치하면 좋겠소?"라고 묻자 교포들은 안 의사가 사격의 명수니 그를 불러 하얼빈으로 파견하면 문제 없이 이등을 죽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나는 황급히 서둘러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아본 안 의사는 즉시로 달려왔다. 나는 주저없이 그에게 자초지정을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안의사는 쾌락했다. 죽고 싶던 차에 자기에게 그와 같은 사명을 주니 이 기회에 보람있게 싸우겠다고 거듭 맹세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그의 말에 정말 눈물이 핑 돌았다. 그의 눈에는 광채가 번뜩이었다.

이후 이강은 안중근과 함께 의거에 관한 구체적인 의논에 들어갔다. 의거에 사용될 무기로는 유진률과 양성춘이 호신용으로 갖고 있던 권총이 제공되었고, 이토 히로부미의 사진은 김성무가 갖고 있는 일본 잡지에서 3매를 뽑아 익혀두었다. 그리고 의거에 사용될 여비는 윤능효가 모아둔 200루블이 제공되었다. 그 중 16루블로 외투 2벌을 경매시장에서 구입하기로 하고, 부족한 금액은 하얼빈에 거주하는 김성백에게 편지를 보내 융통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안중근 의거의 실행을 위해 주역에 안중근, 보조역에 우덕순과 천완일, 그리고 통역과 연락담당으로 조도선과 유동하 등이 선정되었다.

1909년 10월 21일 오전 8시 55분, 안중근과 우덕순은 포시에트 역을 떠났다. 이때 역에는 이강과 양성춘이 전송나왔다. 이강은 후에 두 사람이 열차에 올라탈 때 준비한 '두루스케'로 부르는 외투 2벌을 안중근과 우덕순에게 전달했다고 회고했다. 이 외투는 두 사람이 너무 초라한 차림을 하면 혹여 환영회 식장에서 의심받을 것을 우려해 준비한 것이었다. 우덕순은 이강이 유진률과 함께 두 사람을 환송한 뒤 "지금 삼천리 강산을 너희가 등에 지고 간다."하고는 돌아서서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했다.

1909년 10월 23일 밤, 안중근과 우덕순은 김성백의 집에서 이강 앞으로 다음과 같은 요지의 편지를 작성했다.

본월 6일(양력 10월 22일) 오후 당지에 내착하여 원동보를 본즉 이등은 내월 12일에 관성자를 출발하여 러시아 철도국 총독특별열차로 하얼빈에 도착한다 하였으므로 우리들은 조도선과 함께 가족을 출영하는 것처럼 꾸며 관성자역으로 향할 것이다. 동역과 상거하기 전 몇 개 역쯤되는 어느 역에서 이등을 기다렸다가 거사할 계획인데 일의 성공은 하늘에 있는지라 요행히 동포의 선복을 기다려 도움을 받을 것을 바라나이다. 당지 김성백씨에게서 돈 5십원을 빌어서 여비에 사용했으니 갚아줄 것을 희망함. 대한독립만세!

이 편지는 송부되지 않았고 안중근이 체포될 때 증거자료로 압수되었다. 안중근은 후에 일본 형사로부터 이 편지에 대해 추궁받자 김성백에게 부족한 운동자금을 빌릴 요량으로 작성했다고 진술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직후, 이강은 안중근이 러시아령인 하얼빈에서 거사를 일으켰으니 러시아법에 따라 처벌받을 것으로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러시아 측은 1907년 러일 협정에 의거 안중근이 명백한 대한제국이므로 일본법의 적용을 받게 된다며 모든 사건을 일본총영사가 처리하도록 이관했다. 이강은 이 때문에 재판을 받는 안중근을 직접 도울 수 없었다. 그 대신, 그는 대동공보사를 통해 '안중근 유족구제공제회'를 출범시켜 유족 돕기 운동에 나섰다. 그러자 일제는 러시아 당국에 대동공보사를 폐간시킬 것을 종용했다. 이강은 베이징으로 가서 안중근 구명운동을 벌이다가 일제의 혐의를 피하고자 일단 대동공보사 주필을 사퇴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된 후, 러시아 당국은 대동공보사를 폐간시키고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한인 단체들을 감찰했다. 여기에 연해주 한인 독립세력 내부에서 복벽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간의 갈등의 골은 갈수록 깊어졌다. 공화주의자들은 순종이 일제에게 투항했다고 여겨 그를 지도자로 받들지 않았지만, 복벽주의자들은 그런 그들을 불경한 자들로 간주했다. 그러다가 공화계열 독립운동가 양성춘이 복벽계열 독립운동가 정순만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양측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이강은 이런 상황에서도 대한인국민회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며 안중근의 유족 후원에 온 힘을 기울였고, 러시아 내에 16개의 지회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에 일제는 대한인국민회를 과격 항일조직으로 진단하고 러시아 당국에 탄압, 해체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로 인해 국민회가 탄압을 받게 되자, 이강은 자구책으로 치타, 이르쿠츠크가 포함된 동시바리아 지역으로 본부를 이동하여 새로운 운동권역을 개척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1911년 10월 치타에 시베리아 지방총회가 설립되었다.

시베리아 지방총회는 1914년 6월 제2차 대의회를 개최해 21개 지방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대한인국민회가 미국 감리회의 지원과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의심을 받게 되자, 이강은 치타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부주교인 에프렘의 전도를 받고 정교회로 개종하고 한인정교 선교사단 산하의 시낭송 신부 및 교리문답인의 직책을 수행하며 전도사로 활동했다. 이후 그는 러시아정교 교단의 승인을 받고 신문간행을 추진해 1912년 1월에 <대한인정교보>를 간행했다. 러시아 당국은 순수한 종교적 목적으로 간행해야 하며, 검열국의 검열을 받은 후에야 발매하는 조건하에 이 신문의 간행을 승인했다.

그러나 대한인정교보가 각 방면에서 일제의 학정과 탄압을 강도높게 비판하자, 일제는 정교보의 폐간을 러시아 당국에 계속 요구했다. 러시아 당국 역시 이강에 대해 매우 경계했다. 이르쿠츠크주 헌병사령부 보좌관 세르게이 드메트리예비치는 자바이칼 주 총독에게 "가장 위험한 반일 선동요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치타주 조선인 정교 선교사단 산하에서 교리문답을 담당하는 이강"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보내기도 했다. 러시아 당국은 국민회 지회의 주요 목표를 선교와 국권회복으로 보고 국민회 정관에 러시아법에 위배되는 조항이 있는지 조사하고 위험성이 있으면 폐쇄 조치를 취하고자 감시했다.

이강은 이런 상황에서도 재러한인사회에 안중근의 애국정신을 전파하여 한인의 정신적 지주로 삼게하고 이를 통해 민족 정체성을 강력히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안중근 기념표를 제작하여 배포하는 사업을 전개해 안중근의 유족들을 구제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고자 했다. 특히 미국 대한인국민회에 의뢰해 기념표 1천개를 제작하였는데, 이 기념표는 원형으로 좌편에 태극기, 우편에 국민회기를 교차하도록 하였고 중앙에는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배치했다. 그리고 배지 상변에 국문으로 '안의사 중근', 하변에는 프랑스어로 'Hero Anchung Kun'이라 새겼다. 러시아측 보고에 따르면, 당시 재러 국민회원들은 안중근 사진이 새겨진 이 금속제의 기념배지를 자랑스럽게 달고 다녔으며 한인들 사이에서 애국의 표징이었다고 한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후 러시아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일본과 동맹국이 되면서 정치적 밀월관계를 형성했다. 이후 러, 일 양국은 재러 한인들의 독립운동 탄압에 공조 관계를 공고히 하면서 계엄령을 발효해 일체의 결사 및 집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는 러시아 정교의 종교모임으로 변화를 꾀했지만, 블라고웨스첸스크 지회 등은 강제 해산당했다. 그래도 비밀리에 결사를 유지해 나갔던 시베리아 지방총회는 1914년 11월 23일에 치타 한인학교에서 총회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러시아 당국에는 복음서의 연구와 교리대담, 대한인정교보 문제를 심의하기로 하고, 러시아 정교 성직자인 인노켄티의 이름으로 교도 단체 설립 문제를 토의하고자 한다고 신고했다.

그러나 러시아 경찰의 정보를 받은 헌병대가 습격하면서 이강을 비롯한 28명의 참석자가 체포되었다. 이때 이강의 집은 집중 수색당해 대한인국민회 회원목록과 미주 중앙총회 주소들이 압수당했다. 그리고 이강을 비롯한 15명의 회원들이 의연금을 강요했다는 죄목으로 치타 경비대에 구류당했다. 이강을 비롯한 국민회원들은 검찰예심조사에서 자신들은 대한인국민회 회원이 아니라 정교회 신자들이며, 한인들이 종종 모여 학교운영문제와 잡지 정교보에 관한 문제를 협의해 왔다고 진술했다. 그러자 치타관구 검찰은 기소중지 조치를 내리고 100루블의 보석금을 받고 석방 조치를 했다. 그러나 <대한인정교보>는 발행 금지되었고, 이후 완전히 폐간되었다.

1916년, 이강은 치타 한인정교회 선교사단 산하에서 교리문답을 담당하는 등 종교에 전념하며 러시아 당국의 혐의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재러한인들의 애국 투쟁정신이 사라져간다고 우려했고, 이를 되살리기 위해 만주를 경유하여 러시아를 방문할 예정인 하야시 곤스케 공사 처단 계획을 세웠다. 그는 '한국 민족의 원수, 하야시 공사의 죄상'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만들어 이를 배포하고 다시금 독립운동의 기운이 드높아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거사 직전 정보를 입수한 러시아 헌병사령부와 일본의 합작으로, 이강은 1916년 6월 22일 하야시 공사 암살 음모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의 여파가 시베리아까지 미치자, 이강은 이를 이용해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을 부흥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대한인국민회의 단체 허가를 혁명당국에 신청했고, <대한인정교보>를 대체할 신문 발간을 도모했다. 그리고 1917년 6월 4일에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 등 각지 대표 96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전러한족대자회에 치타 시베리아총회 대표원으로 참석하려 했다. 그러나 주최측은 그가 대회에서 항일적 주장을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1918년 일본이 시베리아를 침공하자, 이강은 치타에서 니콜리스크로 이주했다. 그는 이곳에서 전로한족회에 적극 가담해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한 무기와 군자금을 조달하고자 적극 나섰다. 당시 시베리아에 파견되었다가 철수하던 체코군과 결탁하여 아이훈 지방에 무기를 감춰두고 있다가 이를 만주의 독립군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1919년 3월 17일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3.1 운동의 영향을 받아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대한인국민회가 성립되었을 때, 이강은 서파의 대표로 참석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이 결성되었을 때도 참여했다.

1919년 9월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의 강우규 의사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은 신한촌을 포위하고 해성병원에서 기독청년회 총무였던 이강을 체포해 서울로 압송했다. 이강은 종로경찰서에서 1개월 17일동안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뒤 국내에서 약 8개월간 체류했다가 탈출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1920년 8월, 기독교청년회 총무 이강은 무장독립군 단체인 신민회에 가담해 부단장으로 임명되어 항일무장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소비에트 정부는 러시아 영내에서 일체의 독립운동을 불허하고 오직 소비에트 체제와 공산주의 사상의 전파만 허용했다. 더구나 일본이 시베리아에서 철병하는 조건으로 한국 독립운동세력의 무장 해제와 반일 인사들을 러시아 영내에서 추방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자, 소련 정부는 이를 거부하지 못했다. 결국 이강은 러시아에서의 활동을 포기하고 1923년 상하이로 탈출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강은 상하이에서 안창호와 행보를 같이 하며 한국노병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군의 양성과 독립자금을 모으는 일에 몰두했다. 그리고 1925년 1월 28일에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통상단원으로 입단했으며, 원동 흥사단의 임무를 띠고 이상촌 기지를 돌아보고자 남중국 방면을 여행했다. 1928년, 그는 샤먼 중국인 교회에서 '조선현상과 교육형편'이라는 강연을 했다. 그러나 강연 도중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3년간 체류금지 처분을 받고 국내에 강제 송환되어 평양에 압송되었으며, 평양경찰서 고등게에서 취조받은 뒤 평양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과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0년 9월 2일 만기 출옥한 이강은 고향인 용강군에 칩거했다. 그러나 그는 기회를 엿보다가 탈출하여 중국 푸젠성으로 재차 망명했다. 1932년 윤봉길훙커우 공원 의거 후 안창호가 체포되고 국내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자, 국내에 남아있던 이강의 가족이 안창호의 옥바라지를 해주기도 했다. 한편 이강은 진강에서 임시정부와 합류한 뒤 제12대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했다. 임시정부가 다시 창사, 광저우 등지로 이동했을 때, 이강은 강서성 일대에서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1941년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이 충칭에서 결성된 후 중국 각지에서 특무활동을 전개할 때, 이강은 산시성에 주둔한 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의 징모 임무를 맡고 영안, 남평, 건양 등지에서 광복군 모병활동을 수행했다. 1945년 8.15 광복 후 임정의 명령에 따라 대만 교포를 위한 선무단 단장이 되어서 대만으로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으며, 흥사단 간부, 한중협회 간부를 거쳐 남산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64년 10월 13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임정묘역에 안장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