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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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宇奎.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55년 음력 6월 1일 평안남도 덕천군 무능면 제남리 68번지의 한미한 농가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본관은 진주 강씨, 자는 찬구(燦九), 호는 왈우(日愚)이며, 별명은 영일(寧一)·강녕(康寧)이다. 그가 태어난 제남리는 평양에서 150리 북방에 위치하며, 안팎 40리 고개의 알일령을 넘어서 읍내로 들어가는 산골 마을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 없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누나 댁에서 자랐으며, 10여 세 때 한학을 공부하고 한방의술을 배웠다는 것만 알려졌다. 이후 고향에서 한의업에 종사하다가 30대 초반인 1885년경[1]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 영덕리로 이주했다. 그가 왜 함경남도 산골 마을로 이주했는지는 별로 알려진 바 없으나, 이병헌의〈한국근대인물백인선>'강우규'(1970)에 따르면, 모종의 애국운동에 관여하여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피신하기 위해 이주했다고 한다.

강우규는 읍내에 자리를 잡고 남문거리에서 아들 강중건(姜重健)과 함께 잡화상을 운영했다. 이 상점에서는 주로 물감, 담뱃대, 면사, 포목 등을 팔았다고 하며, 장사꾼들에게 장사 밑천도 되어주고 돈을 싼 이자로 빌려주기도 했다고 한다. 손녀 강영재의 회고에 따르면[2], 이동휘가 국권회복운동과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고향인 함경도 지역을 방문했을 때 강우규의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동휘와의 만남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며, 기독교에 입교한 것도 이동휘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우규는 이후에도 이동휘와 지속적으로 교류했으며, 1919년 6월 국내에 잠입할 때도 이동휘로부터 경북 경주에 거주하는 최익선과 함경남도 홍원군 읍내에 거주하는 김언량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갖고 오기도 했다.

강우규는 이동휘의 국권회복 논리에 동조하여 홍원에 영명학교를 건립하여 신식교육을 실시하고, 아울러 교회도 설립했다. 그러던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크게 분개했다. 당시 홍원에 20여 년 사는 동안 상당한 재산을 갖췄고 아들 중건도 딸 3명을 두었다. 하지만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홍원을 떠나기로 마음 먹고, 큰 아들 중건 부부와 자녀 3명을 연해주 하바로브스크로 이주시켰다. 이듬해인 1911년 봄, 강우규는 홍원군 용원면을 떠나 북간도 두도구로 이주했다. 이때 80을 넘은 모친과 맏손녀와 대동했다. 그는 그곳에서 잠시 한약방을 운영하다가, 북만주, 길림성 동부, 연해주 등 각지를 방랑하다 1915년 하바로프스크에서 중건 가족과 합류했다.

강우규 가족은 1917년 북만주 지린성 요하현으로 이주하여 신흥동이란 마을을 개척, 건설했다. 신흥동은 연해주와 인접해 있는 북만주 동북의 벽지로, 그곳에서 5리만 가면 우수리 강이 흐르고, 강을 건너면 바로 연해주 이만(현재 달레네첸스크)였다. 강우규가 이 벽지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하바로프스크나 블라디보스토크 등 연해주의 한인 독립운동단체들과 왕래하기 용이하고, 만주의 한인 동포나 독립운동단체들과의 연락을 하기 위한 거점을 확보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근 지역에서 아직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하고 있는 한인 동포들을 끌여들어 신흥동에 정착하게 해, 2년 후에는 백여 호 가까운 한인 마을을 만들었다. 신흥동은 연해주와 북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항일독립군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가 되었다.

1917년 봄 요하현에서 사립 광동학교를 설립하고 몸소 교장이 되어 한인 자제의 교육에 전념했다. 장로회 신자였던 그는 신학 교육과 포교에 종사하면서도, 이를 이용해 학생들과 인근 주민들에게 배일사상을 전파하기도 했다. 교단에 설 때마다 일본의 침략주의를 규탄하였으며, 가끔 학교 강당에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기도 했다. 그러던 1919년 3.1 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3월 4일 신흥동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400~500명을 모아 태극기를 만들어서 중국 관헌이 있는 부중에 들어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그해 4월 조선의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고, 1919년 3월 26일 김치보 등에 의해 조직된 노인동맹단에 가입하여 요하현 지부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이동한 그는 노인동맹단 간부들을 만나 독립운동 추진 계획에 대해 들었다. 그러던 중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이 머지 않아 총독직에서 물러나 귀국하며, 후임총독이 부임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접했다. 강우규는 새 총독의 임명에 크게 분노했다. 그는 하세가와 총독이 3.1 운동에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는 걸 보고, 조만간 조선이 독립하리라 기대했다. 이제 새 총독이 임명되는 것은 일본이 식민통치를 이어갈 뜻을 표명했음을 의미하며, 세계의 대세인 민족자결주의를 배반하고 천의를 거역하며 인도를 무시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교란함으로써 2천만 동포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이에 신임 총독을 직접 처단해 조선독립을 쟁취하기로 결심하고, 노인동맹단 동지들과 의논하여 암살 계획을 짰다.

일단 거주지인 신흥동으로 돌아간 그는 1919년 6월 초 아편 매각을 위해 연해주 청룡에서 러시아인으로부터 영국제 수류탄 1개를 구입했다. 러시아 사람이 폭탄의 사용처를 묻자, "원한이 있는 자를 죽이는데 사용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러시아돈 50루블을 주고 구입한 뒤, 자택으로 돌아와 있다가 연해주 노콜리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6월 11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그는 폭탄을 헝겊 속에 싸서 꿰맨 뒤, 한 끝을 허리에 매고 두루마기 밑 옷 속에 찼다. 그리고 일본배 에치고마루를 타고 6월 14일 아침 원산에 상륙한 뒤 원일여관에 투숙했다. 6월 1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알고 지내던 최자남[3]을 만나 거취에 대해 논의하여 최자남의 집에서 숙박하기로 하고, 최자남의 주택 천장에 폭탄을 숨겨뒀다. 그리고는 신문을 통해 신임총독이 누구이며, 언제 내임하는지를 탐지했다.

1919년 7월 17일경 최자남이 광석동 1번지 신축가옥으로 이사하자, 강우규는 새집으로 함께 갔다. 그는 이사한 날 밤 최자남에게 자신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입국했으며, 이를 위해 폭탄 1개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사용방법을 소상히 설명한 뒤 감추어 달라고 부탁했다. 아울러 폭탄의 위력은 6연발 권총 24정분에 해당되며, 사람이 밀집한 장소에 투척하면 약 100명의 인명을 살육할 충분한 위력이 있다고 말했다. 이후 최자남을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냈다. 외상값 수백원을 받으러 가는 것처럼 위장했지만, 실제로는 노인단 간부 강부위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간 것이었다. 한편, 강우규는 홍원에서 덕흥상회를 경영하고 있던 도명수를 찾아가 거사 계획을 말하고 거사자금으로 500원을 받았다. 도명수는 강우규의 도움으로 사업에 크게 성공했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자금을 선뜻 내놓았다고 한다.

1919년 8월 4일 원산부 채재 중 알게 된 허형과 함께 기차를 타고 원산을 출발하였고, 8월 5일 경성에 당도한 뒤 허형의 소개로 동부 안국동 96번지 김종호의 집에 투숙하며 정세를 주시했다. 이때 후임 총독으로 해군대장 사이토 마코토가 온다는 사실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는 신문에 실린 사이토의 사진을 오려 가지고 다니면서 얼굴을 익히는 한편, 본격적으로 거사를 준비하였다. 8월 7,8일경, 강우규는 원산부로 가서 최자남의 집에 맡겨둔 폭탄을 수령해 경성으로 돌아와 김종호의 집에서 머물었다. 8월 12일부로 조선총독의 부임식이 곧 거행된다는 보도가 있자, 계획을 보다 완벽하게 실천하기 위해 8월 22, 23일경 원산부로 가서 한흥근을 만나 폭탄 1개를 교부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때 한흥근은 어떤 자가 폭탄 2개를 가지고 있으나 부재중이므로 후에 전보를 칠 테니 가지러 와 달라고 하였다. 강우규는 다음날 경성으로 출발했고, 8월 26일 최자남이 한흥근의 부탁으로 강우규의 숙소에 "아들이 왔으니 속히 와달라"[4]는 전보를 쳤으나 회답이 없었다.

강우규는 신임총독의 경성 당도 일자가 9월 2일이라는 것을 신문에서 확인하고, 안국동 숙소에서 남대문역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 의거를 행하기 불편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8월 26일 남대문역 부근 남대문통 5정목 60번지 여인숙에 기거하면서, 매일 남대문역 부근을 배외하며 역 주변의 지형을 연구했다. 8월 31일 전보가 왔다는 걸 뒤늦게 듣고 허형에게 원산으로 가서 한흥근에게 폭탄을 수령하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한흥근은 그 전날 블라디보스토크로 출발했기 때문에, 허형은 9월 1일 원산에 도착했으나 허탕치고 경성으로 돌아갔다. 9월 2일, 강우규는 상호 미리 바지 앞부분에 명주 수순의 끝을 기워 매워 수류탄 1개를 그 수선 안에 넣고, 그 끝을 허리 뒤로 돌려 굳게 졸라맸다. 그 위에 저고리와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손을 들이밀면 곧 폭탄을 드러낼 수 있도록 장치를 했다. 그런 후에 검정태 파나마모자를 쓰고, 가죽신을 신고, 손에는 양산과 타월을 쥔 채 숙소를 출발하여 남대문역으로 갔다.

이후 사이토 총독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오후 4시경부터 많은 인파가 환영을 위해 모여드는 것을 보고 총독이 왔다가 폰단하고, 그가 탄 승용 마차를 찾다가 마침 귀빈실 앞에 대기시켜 놓은 마차를 발견했다. 그는 폭탄을 투척할 장소와 위치를 선택하여 귀빈실 동부 쪽 울타리 부근에 있는 다방 출입구 앞 군중 속에 썩어 들어가 시기가 오기를 기다렸다. 오후 5시경, 남대문 역에 도착한 열차에서 신임 총독 일행이 하차하여 귀빈실을 통과하여 부인, 비서관과 함꼐 마차에 올랐다. 강우규는 미리 신문에서 본 바 있는 사진과 틀림없음을 확인하고, 즉시 폭탄을 꺼내어 바른 손에 잡고, 왼손으로 타월을 덮어 이것을 엄폐한 뒤 내던질 준비를 했다. 그리고 왼손으로 안전핀을 뽑고, 마차에 막 타고 있는 사이토 총독의 가슴을 겨냥하여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마차 앞 약 7보 가량 되는 지점에 떨어져 굉음과 함께 폭발해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 중 몇 개가 승용마차에 맞았다. 이때 파편 하나가 마차의 뒤쪽을 뚫고 사이토 총독의 허리에 차고 있던 혁대를 손상시켰으나, 신체에는 아무 피해가 없었다. 다만, 현장에 있던 신문기자와 경찰, 철도 및 차량 관계자 3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중 오사카〈아사히신문〉의 특파원 다치바나(橘香橘)와 경기도 순사 스에히로(末弘又二郞) 2명은 며칠 뒤 사망하였다.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9월 7일 가희동 장익규(張翊奎)의 집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사직동 임승화(林承和)의 집으로 옮겼다. 허형과 만나 재거사를 계획하였으나, 9월 17일 아침 누하동에서 조선인 경찰 김태석(金泰錫)의 불심검문으로 체포되었다.

조선일보 2000년 8월 9일에 올라온 강우규 취조 기록(아사히 신문 공개)에 따르면, 강우규는 취조받으면서도 시종일관 당당했다고 한다. 그는 취조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탁자를 두드리며 독립 연설을 시작했다가, 도중에 숨이 차 "물을 줄 수 없느냐"고 해서 받아 마신 뒤, 다시 탁자를 두드리며 약 1시간 동안 연설했다. 이후 지바 료 경찰부장이 공범자가 있느냐고 묻자, 강우규는 "이처럼 큰 일을 결행하는데 누구와 상담할 수 있겠냐"라며 반문했다고 한다. 지바 료 경찰부장은 훗날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경찰은 명예를 걸고 사건을 수사했다. 하지만 그가 밉다는 감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는 역시 우국지사였다"고 증언했다.

1919년 9월 29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된 뒤, 1920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폭발물 취체벌칙 위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5] 이에 불복해 공소했으나 1920년 4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6]이에 불복해 상고했으나, 1920년 5월 27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7]

1920년 11월 29일 오전 10시 30분,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향년 66세.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고 한다.

단두대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斷頭臺上 猶在春風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

有身無國 豈無感想

사후[편집 | 원본 편집]

강우규의 유해는 11월 29일 오후 2시 아들 강중건에게 인도되어 서대문 밖 공동매장지에 매장되었다. 그후 34년간 그곳에 묻혀 있다가 1954년 4월 4일 덕천군민 유지들의 주선으로 수유리 산 109에 이장되었고, 1967년 6월 26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강우규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각주

  1. 1887년이라는 설도 있다.
  2. '남대문역도 강우규의사의 투탄' 〈신동아〉 1969년 5월호.
  3. 동아일보 1920년 4월 16일자 기사에 따르면, 강우규는 1914년 여름 최자남의 아내의 병을 고쳐줬고, 이 일로 최자남의 처와 부녀지간처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4. 폭탄을 수령하라는 걸 암호로 전달한 것이었다.
  5.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6.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7. 독립운동관련 판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