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類似歷史學
'''유사역사학'''(類似歷史學)은 [[역사학]] 같지만 실제로 역사학이 아닌 주장을 가리킨다. [[영어]] 슈도히스토리(pseudohistory)를 [[번역]]한 용어. '''의사역사학'''(擬似歷史學)이라고도 하며, 저렴한 표현을 쓰자면 '''사이비 역사학'''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유사학문]]이 그렇듯이 달콤하게 들리지만 위험하다.
{{학술 관련 정보}}
== 개요 ==
유사역사학은 역사인 듯하나 공인된 역사 기술의 관습을 따르지 않고 그 결론을 훼손하는 주장을 낮추어 이르는 말로, 회의론에서 쓰인다. 새롭고 확실하지 않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는 역사적 증거로 국가·정치·군사·종교 등에 대한 쟁점이 되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경우에 종종 유사 역사학으로서 배척한다.


[[대한민국]]의 유사역사학으로는 [[재야사학]]으로 가장한 유사역사학이 있다. 유사역사학자의 대다수는 역사 전공자가 아니며, 주류 한국사학계와 다른 해석을 많이 내놓고 있다. 유사역사학자들은 [[환단고기]], 필사본 [[화랑세기]]와 같은 논란이 있는 저서들을 [[진서]](眞書)로 가정하고 논리를 전개하기 때문에, 기존 역사학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유사역사학 신봉자들의 공통점은 사학계의 교수 혹은 대학원생과의 현장 답사를 흔쾌히 수락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사학을 배우는 수업 및 교수실부터 현장 답사까지의 검증 과정을 직접 문답식으로 체험하면 교과서로 요약되기까지의 연구자들의 노고와 자신의 무지함 및 초라함을 인정하게 되니 백해무익한 자존심만 세우는 것이다. 신봉자들한테 현장 답사가 결여되어 서고에 떠도는 서적만 아전인수식 겉핥기로 왜곡하니 이를 노린 사기꾼과 허세만 고집하는 성격 나쁜 비전문가만 모이기 쉽다.


또한 학계의 정설이 식민사관이나 동북공정과 겹칠 경우에는 식민사관이나 동북공정이라는 논리적 오류를 범한다. 현대사에선 북한과 겹치면 북한이 벌인 것이라거나 좌파사관이라는 주장을 한다.
== 유사역사학 주장 ==
 
고대사는 반일주의에 근거하고 현대사는 반공주의에 근거한다. 반일주의, 반중주의, 반공주의 에 근거한 경우가 다수긴 하지만 친일주의와 친북계열 민족주의에 근거한 소수변태들도 존재한다.
 
== 유사역사학 주장들 ==
{| class="wikitable"
{| class="wikitable"
! style="text-align: center;" | 유사역사학 주장
! style="text-align: center; width: 16%" | 유사역사학 주장
! style="text-align: center;" | 관련 국가
! style="text-align: center; width: 9%" | 관련 국가
! style="text-align: center;" | 사실이 아닌 이유.
! style="text-align: center;" | 사실이 아닌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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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3" style="text-align: center;" | 삼국대륙설
| rowspan="3" style="text-align: center;" | 삼국대륙설
| style="text-align: center;" | 고구려
| style="text-align: center;" | 고구려
| rowspan="3" style="text-align: center;" | 고구려조차도 요동 근방이 한계였고 고구려가 영토확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나마 중국이 분열기이기에 가능했다.백제와 신라는 고구려때문에 중국지역에 영토를 갖기 어려운 환경이다.
| rowspan="3" style="text-align: center;" | 고구려조차도 요동 근방이 한계였고 고구려가 영토확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나마 중국이 분열기이기에 가능했다.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 때문에 중국 대륙에 영토를 갖기 어려운 환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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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 center;" | 백제
| style="text-align: center;" |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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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 center;" | 대륙고려설
| style="text-align: center;" | 대륙고려설
| style="text-align: center;" | 고려
| style="text-align: center;" | 고려
| style="text-align: center;" | 고려가 중국지역에 영토를 가진 적은 한 번도 없다.
| style="text-align: center;" | 고려가 중국 대륙에 영토를 가진 적은 한 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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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 center;" | 이성계 화교설
| style="text-align: center;" | 이성계 화교설
| style="text-align: center;" | 조선
| style="text-align: center;" | 조선
| style="text-align: center; font-weight: bold;" |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이성계가 화교라는 증거는 전무하다.환민족참기름 같은 개쓰레기 사이트에서 퍼뜨리는 대표적인 개소리에 불과하다.
| style="text-align: center; font-weight: bold;" |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이성계가 화교라는 증거는 전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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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 center;" | 조선 500년 내내<br />왜구 시달림설
| style="text-align: center;" | 조선
| style="text-align: center;" | 이 주장대로라면 왜구가 19세기말까지 존재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ref>일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서력 [[1588년]]에 해적금지령을 내리고 에도막부가 추가로 다시 금지령을 내린 이후로 왜구는 거의 사멸되었다.</ref>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적어도 17세기부터는 조선이 왜구한테 침입당하지도 시달리지도 않았다. 만약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이 왜구한테 시달렸다면 관련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적혔을 것이다. 사실 문종 재위년부터는 왜변 몇 번을 제외하면 조선이 딱히 왜구한테 시달리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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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 center;" | 대륙조선설
| style="text-align: center;" | 조선
| style="text-align: center;" | 조선은 중국 대륙에 영토를 가진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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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 center;" | 미나모토노 요시츠네<br />=칭기즈 칸 설
| style="text-align: center;" | 일본<br />몽골 제국
| style="text-align: center;" | 애초에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와 칭기즈 칸의 사망년도부터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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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500년 왜구 시달림설
| rowspan="2" style="text-align: center;" | 금청 한국사론
| 조선
| style="text-align: center;" | 금나라
| 이 주장대로라면 왜구가 19세기말까지 존재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ref>일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서력 1588년에 해적금지령을 내리고 에도막부가 추가로 다시 금지령을 내린 이후로 왜구는 거의 사멸되었다.</ref>[[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적어도 17세기부터는 조선이 왜구한테 침입당하지도 시달리지도 않았다.사실 문종 재위년부터는 왜변 몇번을 제외하면 조선이 딱히 왜구한테 시달리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할 듯 하다.
| rowspan="2" style="text-align: center;" | 시조가 신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주장하는 헛소리인데, 시조가 신라인인지도 불확실하며 설령 그렇다고 해도 금청이 한국사가 될 수는 없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고려 태조의 아버지는 당숙종의 후손이니 고려는 중국사라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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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조선설
| style="text-align: center;" | 청나라
| 조선
| style="text-align: center;" | 조선은 중국지역에 영토를 가진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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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 center;" |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칭기즈칸 설.
| style="text-align: center;" | 한글 창제자<br />후쿠자와 유키치론
| style="text-align: center;" | 몽골제국
| style="text-align: center;" | 조선
| style="text-align: center;" | 애초에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와 징기즈칸의 사망년도부터 다르다.
| style="text-align: center;" | {{인용문|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조선왕조실록 세종 25년 [[12월 30일]] 두 번째 기사|}}<br />반박 끝.
|}
|}


== 관련항목 ==
== 같이 보기 ==
*[[김대령]]
*[[김대령]]
*[[이덕일]]
*[[이덕일]]
*[[김진명]]
*[[한국사]]
*[[한국사]]
*[[환빠]]
*[[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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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각주}}


[[분류:유사역사학]]
[[분류:유사역사학| ]]

2023년 7월 2일 (일) 12:14 기준 최신판

유사역사학(類似歷史學)은 역사학 같지만 실제로 역사학이 아닌 주장을 가리킨다. 영어 슈도히스토리(pseudohistory)를 번역한 용어. 의사역사학(擬似歷史學)이라고도 하며, 저렴한 표현을 쓰자면 사이비 역사학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유사학문이 그렇듯이 달콤하게 들리지만 위험하다.

유사역사학 신봉자들의 공통점은 사학계의 교수 혹은 대학원생과의 현장 답사를 흔쾌히 수락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사학을 배우는 수업 및 교수실부터 현장 답사까지의 검증 과정을 직접 문답식으로 체험하면 교과서로 요약되기까지의 연구자들의 노고와 자신의 무지함 및 초라함을 인정하게 되니 백해무익한 자존심만 세우는 것이다. 신봉자들한테 현장 답사가 결여되어 서고에 떠도는 서적만 아전인수식 겉핥기로 왜곡하니 이를 노린 사기꾼과 허세만 고집하는 성격 나쁜 비전문가만 모이기 쉽다.

유사역사학 주장[편집 | 원본 편집]

유사역사학 주장 관련 국가 사실이 아닌 이유
삼국대륙설 고구려 고구려조차도 요동 근방이 한계였고 고구려가 영토확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나마 중국이 분열기이기에 가능했다.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 때문에 중국 대륙에 영토를 갖기 어려운 환경이다.
백제
신라
대륙고려설 고려 고려가 중국 대륙에 영토를 가진 적은 한 번도 없다.
이성계 화교설 조선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이성계가 화교라는 증거는 전무하다.
조선 500년 내내
왜구 시달림설
조선 이 주장대로라면 왜구가 19세기말까지 존재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1]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적어도 17세기부터는 조선이 왜구한테 침입당하지도 시달리지도 않았다. 만약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이 왜구한테 시달렸다면 관련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적혔을 것이다. 사실 문종 재위년부터는 왜변 몇 번을 제외하면 조선이 딱히 왜구한테 시달리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대륙조선설 조선 조선은 중국 대륙에 영토를 가진 적이 없다.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칭기즈 칸 설
일본
몽골 제국
애초에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와 칭기즈 칸의 사망년도부터 다르다.
금청 한국사론 금나라 시조가 신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주장하는 헛소리인데, 시조가 신라인인지도 불확실하며 설령 그렇다고 해도 금청이 한국사가 될 수는 없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고려 태조의 아버지는 당숙종의 후손이니 고려는 중국사라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도 가능하다.
청나라
한글 창제자
후쿠자와 유키치론
조선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 25년 12월 30일 두 번째 기사

반박 끝.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일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서력 1588년에 해적금지령을 내리고 에도막부가 추가로 다시 금지령을 내린 이후로 왜구는 거의 사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