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이덕일(1961년 10월 7일~ )은 대한민국의 작가, 언론인, 대학 교수, 강단사학자인 척하는 유사역사학자이다. 그리고 떡밥제조인과 독살매니아이다. 고대사의 김대령으로 부른다. 대한민국 사학계에서 정설이지만, 역사적으로 논쟁이 있어왔던 이슈들에 대하여 연구하고 관련 사료를 제시한 30여 권의 유사역사비평서를 집필하였다.

이력[편집 | 원본 편집]

현대의 괴벨스.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 출신으로, 숭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여, 숭실대 대학원에서 사회주의계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연구 논문인 '동북항일연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월간(月刊)중앙 WIN 기자, 월간(月刊)중앙 WIN 기획위원 등으로 활동하였고, 조선일보,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등의 객원필진으로 칼럼을 기고하였다. 현재는 사단법인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를 시작으로 뚜렷한 관점과 흡입력 있는 문체로 한국사의 다양한 쟁점들을 대중적으로 풀어냄으로써 유사역사를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환빠들에게 평가되었다.

그리고 역사왜곡에도 악명이 높다. 5.18등 굴직한 현대사에 김대령이 있다면, 고대사조선사엔 이덕일이 있다. 그 만큼 악질적인데 가장 악명 높은 건 김현구 교수에 대한 왜곡이다. 임나일본부설 반박을 위해 한 평생 바친 사람은 임나일본부설 주장학자로 왜곡했다.[1]

이덕일의 떡밥인 정조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을 폈던 누가 조선왕을 죽였는가를 저술하였다. 저서로는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사도세자의 고백, 조선 왕 독살사건, 여인열전, 사도세자가 꿈꾸던 나라 등이 있다.

행적[편집 | 원본 편집]

김현구 교수, 임나일본부설 학자 왜곡 사건[편집 | 원본 편집]

이덕일은 자기 책에서 이런 주장을 했다.

김현구는 이 책 곳곳에 백제의 지배를 강조해서 마치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하는 것 같은 모양새를 취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세 번째 논법이 등장한다. (중략) 임나일본부를 지배한 것은 백제인데, 그 백제를 지배한 것은 야마토 정권이라는 것이다.[2]
『일본서기』가 왜곡과 과장이 많은 역사서라는 것은 국제적 상식인데, 스에마쓰가 그랬고, 쓰다 소키치가 그랬던 것 처럼 일본서기를 사실로 전제하고 논리를 펼치는 것이다. [3]

그러나 실제로는 이렇게 쓰여있다.

일본서기의 507년에서 562년 사이의 기록 가운데 야마토 정권과 한반도 각국의 인적·물적 교류를 조사해보면 신라·고구려와는 각각 왕복 2회의 교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교류 내역을 보면 야마토 정권은 신라나 고구려에서 전혀 사자를 파견하지 않은 반면 신라와 고구려는 각각 2회씩 야마토 정권에 사자를 파견했다. 임나와는 왕복 8회의 교류가 있었는데 그중 야마토 정권은 3회에 걸쳐 임나에 사자를 파견한 반면 임나는 5회에 걸쳐 야마토 정권에 사자를 파견한 것으로 씌어 있다. [4]

김현구 교수는 그냥 인용 한 것 뿐이다. 당연하지만 그게 왜곡이 있던 아니던 일단 교차검증을 위해 확인을 해봐야한다. 5.18 광주 민중항쟁이나 보도연맹원 집단학살 사건의 진상을 밝힐 때도 신군부 측 문서를 검토해서 어디가 거짓이고 어디부터가 진실인지 검증작업을 했다. 특정 진실을 밝힐 때는1차 사료를, 비롯 거짓이라 해도 검토를 한다. 이건 기본이다.

이덕일은 교묘한 편집을 통해 이런 문장을 쓰기도 했다.

김현구는 야마토 정권의 시각으로 고구려·백제 및 임나를 본다. 야마토 정권은 신라·고구려에서 사신을 전혀 파견하지 않은 반면 신라·고구려는 사자를 파견했다는 것은 무슨 논리인가. 야마토 정권이 신라·고구려부터 조공을 받는 상국(上國)이란 뜻이다[5]

그러나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내용인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스에마쯔가 근거로 삼고 있는 『일본서기』에 의거하는 한, 야마또 정권과 한반도 각국의 관계는 과거 스에마쯔설로 대표되던 통설처럼 임나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6]
야마또정권과 신라나 고구려의 교류는 각각 왕복 2회에 그쳤고, 임나와의 교류도 왕복 8회에 그친 반면 백제와는 왕복 39회에 이르고 있어 큰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백제와의 교류는 그 내용도 대부분 우호적인 관계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스에마쯔가 근거로 삼는 『일본서기』에 의하는 한 적어도 야마또 정권이 임나를 근거지로 백제와 신라를 간접 지배했다는 설은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7]

실제로는 대놓고 부정했다.

실제 김현구 교수는 '임나일본부설 내용 인용 -> 해당 내용 반박' 순으로 글을 썼는데, 여기서 해당 내용 반박을 위해 인용하는 것을, 김현구 교수가 주장한 것으로 왜곡한 것이다.

또한 김현구 교수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학자를 바른적이 있다. 다음 내용이다.

제1기 한일역사공동위원회 때 위와 같은 내용으로 발표를 하자 일본 측 대표 S씨가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했다. '야마또정권의 임나와의 인적·물적 교류가 백제에 비해 아주 미미한 것은 임나가 야마또정권의 직할지(미야께, 屯倉)이거나 임나에는 직접 책임자를 주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야마또정권이 임나에 직접 의사를 전달한 예가 거의 없을 뿐 아니라 그 의사도 대부분 백제를 통해서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씌어 있다고 말하자 아무 말도 없었다.[8]

그런데 이덕일은 이걸 또 이렇게 왜곡하고 모욕까지 한다.

일본학자는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를 통해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스에마쓰의 주장을 되풀이 한 것이다. 김현구는 임나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은 사실인데, 이 임나는 백제가 지배했고, 야마토 정권은 백제를 지배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외형도 내면도 일본인인 일본 국적의 S씨와 외형은 한국인이지만 내면은 일본인인 한국 국적의 김현구 사이의 논쟁같지도 않은 논쟁이다.[9]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을 통해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고, 오히려 일본학자의 입을 닥치게 한 내용인데 이걸 또 이딴식으로 왜곡해서 "일본인"이라는 모욕까지 준다.

실제 김현구 교수의 태도와 주장을 이렇다.

위 내용을 보면 야마또 정권은 임나에 대한 의사를 전부 백제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그 내용의 사실성 여부는 차치하고 『일본서기』에 임나 문제에 대해 야마또정권은 단순히 백제를 지원하는 위치에 지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10]

또한 군사원조 부분에서 이덕일은 김현구 교수가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서 비난하기도 한다.

원래 김현구 교수가 한 말은 이렇다.

야마토 정권은 전후 5회에 걸쳐 한반도에 원군 내지는 인부들을 파견하고 있는데 그 특징은 전부 백제를 위해 파견했다는 것이다.… 537년 신라의 임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파견한 군대도 최종적으로는 백제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이때 오토모노 나나무리 오무라지(大伴金村大連)의 명으로 백제에 파견되었던 일라(日羅)는 46년 간이나 백제에서 관료로 근무하다가 586년에야 귀국했다.[11]
『일본서기』에는 507년에서 562년 사이에 백제가 야마토 정권에 파견한 24회의 사자 중에서 백제의 요구가 명확히 적시되어 있는 경우는 14회라고 되어 있다. 그중에서 임나에 관한 내용은 5회이고 나머지 9회는 전부 원군이나 군수 물자를 요청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당시 야마토 정권과의 관계에서 백제가 일관되게 추구하였던 것은 군사 원조였다고 볼 수 있다.[12]
한편 백제의 군원 요청에 대해 야마또정권은 9회에 걸쳐 원군이나 말, 배, 활과 화살, 식량 등의 군원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9회에 걸친 야마또정권의 군원에 대해 백제는, '조(調, 조세)'라고만 씌어 있어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마찬가지로 9회에 걸쳐 오경박사를 중심으로 학자나 전문지식인, 승려·불경·깃발 등의 불교 관련 문물을 보내고 있다. 백제가 보낸 전문지식인과 선진문물 제공이 야마또정권의 요청과 무관하지 않다면 야마또정권은 9회에 걸쳐 군원을 제공하고 그때마다 백제로부터 전문지식인과 선진문물을 제공받았던 셈이다.[13]
야마또정권의 군원 제공이 백제로부터 전문지식인과 선진문물을 얻기 위한 것이었음은 왜가 15회에 걸쳐 백제에 파견한 사자가 분명하게 요구한 것이 전부 선진문물이나 오경박사 등이었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결국 이는 당시 야마또정권이 백제와의 관계에서 일관되게 추구한 것이 전문인이나 선진문물의 획득이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두나라의 관계를 보면 백제는 야마또 정권에 선진문물을 제공하고 야마또정권은 백제에 군원을 제공하는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14]
적어도 『일본서기』에 의한다면 케이따이천황(재위 507~31)이 등장하는 507년에서 임나가 멸망하는 562년 사이의 야마또정권과 한반도 각국과의 관계는 일본 학계가 주장하는 것 처럼 임나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백제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백제와의 관계는 특수한 용병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15]

그런데 이덕일의 해석은 이렇다.

김현구에 의해 백제는 졸지에 야마토 조정에 군사 원조를 구걸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다.[16]

이게 왜 잘못됐냐고? 그럼 6.25 전쟁에서 미국이 UN군에게 지원요청한건 무엇인가? 베트남전쟁에서 대한민국에게 지원요청한 건 무엇인가? 본격 미국 한국부설

김현구 교수 책의 결론도 이렇다.

라근자(木羅近資)가 369년 가야 7국을 평정하고 382년 임나(고령가야, 대가야)를 구원함으로써 백제의 임나경영이 시작되었다. 그후 백제의 임나경영은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木滿致)를 비롯하여 목군 유비기(木君有非岐), 목군 윤귀(木君尹貴) 등 주로 목씨 일족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임나경영의 토대를 만든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수도 한성이 함락되자 구원을 청하러 도일했다가 '소가(蘇我)'에 정착하게 된다. 그가 바로 100여년간 야마또정권의 실권을 장악했던 소가씨의 조상 소가만지(蘇我滿智)이다.[17]
그런데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자 일본과 신라 간에는 대립이 심화되고 일본에서는 한반도 각국을 일본에 조공을 바치던 나라로 취급하는 번국(藩國) 사상이 유행하게 된다. 따라서 소가만지의 자손들은 자기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조상인 소가만지가 원래부터 왜인이었음을 주장하게 된다. 그 결과 각 씨족들이 제출된 자료를 근거로 『일본서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소가만지의 부(父) 목라근자를 비롯한 목씨 일족들이 백제의 장군으로서 수행한 임나경영이 일본천황의 명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다.[18]

책에선 일본정권이 정권 정당성을 위해 일부러 왜곡했다고 대놓고 쓰여있다.

한백겸, 정약용의 학설을 식민사학으로 왜곡[편집 | 원본 편집]

이덕일은 한사군이 한반도안에 있었다는 설은 식민사학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패수가 압록강에 있었다는 주장도 식민사관이라 주장한다.

식민사학자들에게 '한사군'은 일종의 메시아다. 요즘은 한사군 대신에 한군현 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마치 자신들이 식민지배 찬양 논리를 극복한 것 처럼 말 장난을 한다. (……)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한사군은 한반도 북부에 있어야 한다[19]
실제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는 평양 지역이 아니라 하북성 노룡현 일대이다. 그래서 나머지 모든 논리는 헛소리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영원히 우리의 역사관을 지배하신다'는 교리와 '식민사학은 우리의 영원한 신앙'이라는 도그마에 따라 낙랑군 조선현을 평양이라는 둥 대동강 남쪽의 대동면 토성리라는 둥 우기는 것이다.[20]
이나바 이와키치는 대동강이라고 주장하고, 이병도는 청천강이라고 주장한 패수가 왜 압록강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단지 쓰다 소키치의 설을 추종한 노태돈의 설을 따른 것 뿐이다. 이유가 무엇인가? 쓰다 소치키가 이병도의 와사다대 스승이기 때문이다. 한국 식민학계는 이병도와 쓰다 소키치의 설이 다를 때는 쓰다 소키치의 설을 따른다.[21]

그러나 사실 이 설을 학문적으로 시작하고 실제로 영향을 미쳤던 건 한백겸과 정약용이다. 조선후기로 들어오면서 "사실 추구 성향을 띤 역사지리학"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것의 시작은 한백겸 선생이 쓴 『동국지리지』[22]이다. 이 책 뒤로 역사 지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연구서들이 나왔으며 그것은 "근대역사학과 지리학의 학문적 기초를 마련한 것"이기도 하였다.[23]

한백겸은 주자성리학의 도덕적 편사 규범에 구애받지 않고 우리나라 고대의 강역을 문헌 고증을 하는 방법으로 연구했다. 한백겸 선생은, 삼국 이전시대에는 한반도가 한강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 역사를 전개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고조선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는데 한 나라와 있는 경계인 패수는 청천강, 왕검성이 있는 열수는 한강으로 비정했다. 한백겸은 패수가 조선의 북계이며 대동강은 아닐 것이고, 또 마자수가 있는데 이 강은 서개마를 나와 서안평으로 들어간 것, 압록강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청천강은 압록강과 대동강 사이에 있으니 패수는 청천강으로 비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송호정 박사는 이런 입론을 "패수와 관련하여 중요한 자료들을 정확하게 짚어낸 것으로 현재 학계의 수준에서 봐도 설득력이 높다"고 평가했다. 한백겸 선생은 낙랑군의 위치는 이렇게 판단했다. 낙랑군은 평양으로, 현도군은 함흥지방, 임둔군은 강릉 일대, 진번의 경우만 불명하여 조선, 임둔, 진국 사이에 비정하고 있다. 송호정 박사가 평하길 "이러한 연구 내용은 이후 한사군 위치에 대한 대체적인 틀을 세웠다"고 하였다. [24]

또한 정약용 선생도 고대사 연구를 했는데 그걸 책으로 낸게 『아방강역고』이며 이런 연구는 "조선 후기에 상고시기의 역사 · 지리 연구는 정약용에 의해 한 단계 진전하게 된다." 는 평가를 받는다. 이 책의 목적 중 하나는 기존 역사책의 오류를 바로 잡으려는 것이었다. 정약용은 선생은 『삼국사기』와 『동국여지승람』의 잘못을 지적한 바 있다. 『아방강역고』-『조선고』 에서 정약용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한반도이며 한사군도 진번을 빼면 모두 압록강 남쪽에 있던 것으로 봤다.[25]. 또한 이『조선고』에서 말하길 "지금 사람들이 혹 의심하기를 최초에 조선이 요동에 있지 않았는가 하기도 하나, 원래 『사기』소진열전, 화식열전 및 기타에서 다 조선, 요동, 진번등을 처음부터 갈라서 써 놓은 즉 이것들을 혼돈할 수는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26] 실제로 학계에서도 『사기』소진열전에서는 기원전 4세기에 요동지역이 조선과 병렬되어있고, 요동지역이 연나라에 속하지않고 조선하고도 구분되어 나오며 이 때의 "조선요동"은 정약용이 본 것처럼과 '조선'과 '요동'을 병렬된 것으로 본다.[27]

정약용은 조선과 요동군은 처음부터 다른 것이며 조선의 중심은 평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조선왕 만의 국도였던 왕검이 요동군 험독현에 있었다고 한 후안인 응소의 견해를 반박하기도 했다.[28]

다산은 고조선을 처음부터 광대한 "영토"를 가진 대국이라 생각한 일부 사람들의 생각을 배제하고 고조선도 처음에는 일정한 좁은 지역(정약용 선생은 그것을 현재 우리나라 서북부라고 생각)에서 출발하여 점점 광대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29]

다산은 조선이라는 명칭은 원래 기자가 도읍한 바 있는 평양에서 기인했을 것이라고 말했고 『위략』에는 연나라의 진개가 조선의 서방 2천리를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북경에서부터 의주까지는 2천리 1백리가 되니 진개의 조선 침략 후 서한 초에 국경으로 정해진 패수는 압록강일 것이라고 했다. "한나라가 일어나 다시 요동의 고새를 수리했으니, 이미 요하를 건넜는데 어찌 다시 요수로 경계를 삼는단 말인가? 요하와 압록강 사이에 다시 큰 강이 없다면 패수가 곧 압록강이다"고 봤다. [30]


다산은 역사에서 패수로 인식된 강이 4개(대동강, 압록강, 요동의 헌우락, 평산 저탄수)가 있다고 하며 "하나하나 사엣한 고증을 통해 설명"했다. 또한 패수를 뜻매김하길 『수경』에서는 패수를 평양의 대동강으로 인식했는데 역도원이 『수경주』를 쓰면서 스승의 말을 근거 없이 바꿔서 후세 사람들에게 혼란을 줬다고 비판했으며 『사기』『조선열전』 내용에서 패수는 압록강을 잘못 인식한 것으라 주장했다. 그리고 『한서』『지리지』에서는 압록강을 마자수로, 대동강을 패수로 구분지어 혼동되지 않게 되었다고 봤다. [31]

정약용은 한사군이 진번을 제외하고 모두 압록강 남쪽에 있던 것으로 봤다. 낙랑이 평양이며, 현토는 함경도, 임둔은 평양 서남부 임진강 일대로 해석했다. 대방군도 요동이 아니라 임진강 하류 지방으로 비정했다. [32]

한사군에서 진번군은 만주의 동가강 이북지역까지 영역을 넓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이유는 진번 관련 단편적인 기사가 한군현 설치 이전시기 자료에도 나오고, 일부 기록이 압록강 이북에 위치한 것으로 봤기에 그렇다. [33]

낙랑군의 영역은 평안도와 황해도로 봤고 낙랑군의 이러한 위치 비정은 낙랑이 요동에도 있었다고 하는 당시 조선의 유자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였다. 다산은 낙랑은 압록강 이서 지역에는 없었다고 하며, 조선 유자들이 낙랑이 요동에 있다고한 주장을 비판했다. 현토군의 경우는 다산은 함병남도 남부 지역으로 봤다. 그러면서 현토를 단일한 것으로 보지 않고 사료에 나오는 것을 면밀히 검토하며 두번이나 이동하였다고 보았다. 송호정 박사는 다산이 "제2현도군과 제3현도군의 존재를 파악"해냈다고 평가하였다. 정약용 박사는 임둔은 강원도 지역으로 봤다. [34]

이런 정약용의 연구는 현대한국의 한국사학자들한테도 영향을 끼쳤다. 송호정 박사의 증언이다.

조선 역사는 일제 식민지로 귀결되었고 실학자들의 문헌 고증에 바탕을 둔 역사 연구 흐름 또한 단절되고 말았다. 다만 실학자들의 연구 성과는 일제시기와 해방 후 오늘날까지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35]

예로 패수에 대한 논리도 정약용이 완성한 것이다. 다시, 송호정 박사의 증언.

최근 우리학계의 이동성도 논의도 패수를 압록강으로 보고있다. 『사기』기록에 따르면 위만이 요동고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고공지에 거주했다고고 하므로, 진말과 한초에 연 · 제 의 유이민과 위만이 거주하던 진고공지는 요동고새와 패수 이서에 있어야한다. 그러나 그 지역을 청천강 - 대동강으로 보기에는 너무 좁다. 그리고 『사기』기사를 보면 한과의 경계인 패수는 한 초에 진대의 고조선과 경계가 멀고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서쪽으로 그 경계선을 후퇴하여 고조선과 경계로 삼았던 강이다. 그런 만큼 청천강의 그 경계라면 후퇴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패수 압록강설은 정약용에 의해 논리적으로 완성된 것이다[36]

패수 압록강설은 쓰다 소치키기 아닌 정약용이 완성했던 것이다.

또한 이런 증언도 하였다.

무엇보다 정약용 등 실학자들의 고조선사에 대한 인식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실증에 입각한 문헌고증과 비판정신이이다. 오늘날 고조선사를 연구하려는 학자들은 실학자들이 실증한 문헌자료 외의 것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방대한 문헌 고증은 고조선사를 연구하려는 연구자들에게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하겠다[37]

그런데 이덕일은 정약용이 만든 학설조차 쓰다 소치키 라고 선동한다.

혜경궁 홍씨 폄훼를 위한 왜곡[편집 | 원본 편집]

이덕일은 자기책에서 이런 주장을 했다.

혜경궁은 '한중록'에 세자가 스물두 살이 되도록 영조가 능행할 때 한번도 수가(어가를 따라가는 것)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 또한 부자 간의 갈등을 표현하기 위해 혜경궁이 의도적으로 꾸민 거짓말에 불과하다. 세자는 그전에 이미 여러 차례 영조를 수가해 능행에 다녀왔다. 혜경궁이 처음이라고 주장했던 해보다 4년 앞선 영조 28년(1752) 7월 태묘에 거등할 때로 수가했으며 또한 같은 해 12월 태실에 나아갈 때와 다음 해 첫날 태묘에 나아갈 때도 따라갔다. [38]

그러나 근데 태묘는 무덤이 아니다. 태묘太廟의 묘는 무덤을 가리키는 묘墓 가 아니라 위패를 모신 사당을 가리킨다. 태묘는 곧 종묘宗廟를 말한다. 서울 종로 변, 창덕궁 바로 아래에 있는 왕실의 사당 이다. 이덕일은 태묘를 태조의 무덤으로 왜곡해서 사도세자가 자신의 거처 바로 앞에 있는 종묘에 간 것을 수십 킬로미터는 떨어진 건원릉에 간 것이라 선동했다.[39]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참고 문헌[편집 | 원본 편집]

  • 한국어 위키백과 이덕일 문서
  • 이덕일,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만권당, 2015
  •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 원한의거리, 이덕일 氏는 어떻게 김현구 교수를 임나일본부론자로 매도하였는가?, 네이버, 2014[40]

각주

  1. http://blog.naver.com/superman2208/220215847928
  2. 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만권당, 2014, 340~341쪽
  3. 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만권당, 2014, 341쪽
  4.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창비, 2010, 131쪽
  5. 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만권당, 2014, 342쪽
  6.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창비, 2010, 133쪽
  7.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창비, 2010, 133쪽
  8.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창비, 2010, 133쪽
  9. 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만권당, 2014, 344쪽
  10.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창비, 2010, 136쪽
  11.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창비, 2010, 138쪽
  12.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창비, 2010, 142~143쪽
  13.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창비, 2010, 143쪽
  14.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창비, 2010, 143~144쪽
  15.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창비, 2010, 136쪽
  16. 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만권당, 2014, 345쪽
  17.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창비, 2010, 197쪽
  18.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창비, 2010, 197~198쪽
  19. 덕일,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2015, 128쪽
  20. 이덕일,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2015, 129쪽
  21. 이덕일,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2015, 151~152쪽
  22. ("『동국지리는』한백겸(1552~1615)이 광해군 연간(1614~1615)에 저술한 책으로, 각 국가의 종족, 국가별 강역 변동 등을 문헌을 통해 고증하는 방법으로 기술하고 있다."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23쪽 주석 8
  23.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23쪽
  24.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23~24쪽
  25.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0~32쪽
  26.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5쪽.
  27.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6쪽
  28.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6
  29.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6쪽
  30.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7
  31.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7~38
  32.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9쪽
  33.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9~40쪽
  34.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9~40쪽
  35.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47쪽
  36.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8쪽
  37.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47~48
  38. 이덕일, 사도세자의 고백, 181쪽
  39. 정병설, 길 잃은 역사 대중화, 역사비평 2011년 봄호 참고
  40. http://blog.naver.com/superman2208/220215847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