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전투

Ladenijoa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7월 18일 (토) 18:53 판 (→‎미국)
{{{전쟁이름}}}
군사 충돌 정보
날짜 1945년 4월 1일 ~ 6월 22일
결과 미국의 압도적 승리
일본 본토 진공을 위한 전진기지 마련
교전단체
{{{단체1}}} {{{단체2}}}
우시지마 미츠루†
조 이사무†
사이먼 B.버크너 †
로이 가이거
병력:
정규병력 120,000명
전함 야마토 외 함정 10여 척
항공기 수백기
강제동원 민간인 수만
병력:
정규병력 183,000명
항모, 전함 등 함정 수백여 척
항공기 수천여기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이던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3개월여동안 오키나와 섬 및 그 인근지역에서 전개된 미일 양국의 최후의 대전투. 물론 실상은 일본의 마지막 발악을 미군이 압도적인 화력과 물량으로 개박살을 내는 것이긴 했지만 본토까지 내몰린 일본의 저항도 격렬해서 미군도 고전했다.

배경

1943년 이래 체스터 니미츠가 지휘권을 쥔 태평양 해역군과 해군, 그리고 더글러스 맥아더가 지휘하는 남서태평양 해역군은 각각 별개의 진공루트를 가진 채 일본열도로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중 맥아더의 남서태평양 해역군은 뉴기니 이후로 필리핀 탈환에 최우선을 두어 1944년 10월부터 본격적으로 필리핀으로 진격, 45년 4월 무렵이면 필리핀 대부분의 지역을 수복한 상태였다. 반면, 태평양 해역군의 경우 본래 목적은 을 포함한 북마리아나 제도를 탈환한 다음 대만을 공격하고 이를 발판으로 중국 연안지역의 일본군을 섬멸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문제는 1944년 중국 전선에서 일본 육군이 감행한 제1호 작전(대륙타퉁작전)으로 중국 전선의 형세가 급박하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미군 지휘부에서는 중국군의 전투력을 높게 평가하지 않게 되었고, 무리하게 대만과 중국 연안으로 진격해도 의미가 없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는 남서태평양 해역군의 전략목표가 상실된다는 의미였다.

이렇게 될 경우 태평양전의 주도권이 맥아더와 남서태평양 해역군, 그리고 육군에게 완전히 넘어간다는 위기감에 해군 수뇌부는 새로운 공격목표를 몰색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격목표는 너무 금방 선정되었다. 다가올 일본 본토 진공을 위한 전진기지이며 수복한 필리핀에서의 거리도 가까운 오키나와였다.

전투 준비

미국

남서태평양 해역군은 필리핀의 일본군 패잔병 소탕 및 뒤이은 오보에 작전(보르네오 섬 진공)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준비는 전적으로 태평양 해역군이 맡게 되었다.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대장이 지휘하는 제5함대(TF 50으로 편제)는 휘하에 고속항모부대(TF 58)을 두었는데 정규항모만 11척에 경항모 6척, 전함 7척과 순양함 18척의 전력을 지닌, 당시 잔존 일본 해군을 모두 다 합쳐도 이길 수 없는 초강력 함대였다. 여기에 윈스턴 처칠이 직접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을 졸라대어 태평양전에 참전시킨 영국 항모기동부대(TF 57)에도 항모 4척에 전함 2척, 순양함 5척과 구축함 14척을 동원한 상태였다.

지상군의 경우 육군 제24군단, 해병대 제3수륙양용군단[1] 2개 군단이 준비되었는데 24군단은 7, 7,77, 96 4개 보병사단을 휘하에 두고 있었으며 충분한 중화기와 전차들을 갖춘 상태였다.

아울러 일본 본토 공습을 담당하던 사이판의 제21폭격기사령부에도 동원명령이 내려져 오키나와 전투를 지원할 일본 본토의 후방세력을 타격, 제압하라는 지시가 내려져 수백여 기의 B-29 폭격기들이 큐슈 방면 공습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일본

오키나와 방위는 육군 제32군 예하 3개 사단과 4개 혼성여단이 전담하고 있었으며 부족한 병력을 메꾸기 위해 해군의 기간요원들도 일반 보병으로 전투에 투입되었다.

사실 일본도 필리핀 이후 미국의 목표가 오키나와가 되리라 예측하고 있었으나,제해권과 제공권을 잃은 상황에서 오키나와에 병력과 장비를 증파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필리핀 증원을 위해 이동하다 항로가 차단되어 오키나와에 머물던 100mm 이상 중포들을 활용할 수 있었지만 일본군에게 귀중한 이 중포들은 미군에게 사단 포병으로 굴러다니는 물건들이다.(...)

미국의 막강한 기갑부대에 맞서기 위해 2개 기갑연대가 배치되어 있었지만 95식 경전차97식 전차 치하땅으로 M4 셔먼에 맞서야 했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병력의 수도 부족하고 화력도 열세에 빠지자 일본군은 주민들의 자원입대를 받아들여 수만 명 단위의 민병대를 조직했다. 물론 말로만 자원입대고 실제로는 그냥 보이는 성인 남자들은 다 끌고가서 강제로 무기를 쥐어주고 병사로 편제시켰다. 하다하다 고등학생들까지 징집했고 여고생들은 강제적으로 동원해 전선 간호부대로 투입했다.

그 외에 해군은 큐슈 일대에 해군항공대를 집중 배치하여, 그놈의 카미카제 공격으로 오키나와 방위를 지원할 계획을 갖추었다.

전투

미군의 상륙과 섬 북부 장악

3월 26일, 미 육군은 오키나와 본섬으로부터 서쪽으로 14km정도 떨어진 케라마(慶良間) 제도에 상륙했다. 일본군이 이 작은 섬을 중심으로 자살보트 공격을 하지 않을까 우려되어 행해진 후방소탕 작전이었다. 소규모의 전투 끝에 일본군은 전멸했고 케라마 제도의 민간인들은 대부분이 집단자결하며 사이판의 참극을 재현하고 오키나와의 비극을 예고했다.

4월 1일, 마침내 오키나와 본섬으로 미군 주력부대가 상륙을 개시했다. 미군은 일본군의 예상을 깨고 섬의 중서부에 상륙했는데, 일본군은 미군이 섬 남부로 침공할 것이라 예측했고, 실제로 방어전 준비도 남부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중부 해안에 대한 방위가 매우 취약했다. 상륙 당일, 미군은 가데나 비행장을 점령하였고 4월 5일에는 섬을 남북으로 분단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일본군의 방위태세가 남부중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미군은 배후인 북부부터 빠르게 정리하기로 하고 공세에 돌입, 4월 18일 섬 북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보다 이틀 전인 4월 16일에는 섬 북서쪽의 작은 섬 이에를 공략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섬멸했다. 이에 섬 전투서부터 일본군은 민간인들을 인간방패로 내모는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했고, 일본은 민간인 포함 약 4천여 명의 사망자를 낸다.

오키나와 구원을 위한 최후의 특공

한편, 일본 해군은 오키나와 전투를 지원해야 한다는 명분과, 제국 해군이 이런 결전에서 아무것도 안 할수 없다는 허울뿐인 자존심으로 전함 야마토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함대를 편도로 오키나와로 보냈다. 편도로 오키나와에 도착한 후 해안가에 좌초하여 고정포대로서 육군을 지원하라는 황당한 발상.(...) 그 결과야 뭐 당연히...

야마토는 미군 항공기들의 집중공격을 받아 굉침, 동행하던 경순양함 야하기도 역시 침몰, 동행하던 구축함 중 4척도 같이 침몰. 반면 미군의 피해는 대공포에 의해 격추된 항공기 10기와 전사자 10명.(...)

이로서 일본 해군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리타이어하였고, 큐슈 남부의 비행장을 중심으로 한 카미카제 공격에 치우쳤으나 미군의 요격과 B-29의 비행장 폭격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다만 그 와중에 미 해군 항공모함 USS 벙커힐을 대파시키긴 했지만, 항공모함 1척 대파하는 정도로는 압도적인 미국의 물량을 당해낼 수 없었다.

섬의 남쪽으로

(작성중)

  1. 현재까지도 오키나와에 주둔중인 제3해병원정군(제3MEU)의 전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