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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 변경백국([[독일어]] : ''Markgrafschaft Baden'')은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 중 하나로 [[라인 강]] 상류의 동쪽 연안, 지금의 [[독일]] 남서부 지방에 위치했던 국가이다. 1112년에 성립되어 1803년까지는 변경백국이었고, 이후 [[바덴 선제후국|선제후로 승격]]되었으며, 나중에는 [[바덴 대공국]]이 된다. 바덴의 통치자는 슈바벤의 채링겐(Zähringen)가 였다.
바덴 변경백국([[독일어]] : ''Markgrafschaft Baden'')은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 중 하나로 [[라인 강]] 상류의 동쪽 연안, 지금의 [[독일]] 남서부 지방에 위치했던 국가이다. 1112년에 성립되어 1803년까지는 변경백국이었고, 이후 [[바덴 선제후국|선제후로 승격]]되었으며, 나중에는 [[바덴 대공국]]이 된다. 바덴의 통치자는 슈바벤의 채링겐(Zähringen)가 였다.
==역사==
==역사==
11세기 동안, 슈바벤 공국의 지배력은 서서히 약해져 갔고, 그 지역은 여러 백작가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그들 중 가장 강력했던 가문은 호엔슈타우펜 가문, 벨프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 그리고 채링겐 가문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는 베르톨트 슈바벤을 슈바벤의 공작으로 임명할 것을 약속했으나 1056년 하인리히 3세가 죽고 그의 아내 푸아투의 아네스는 루돌프 폰 라인펠덴을 그 직위에 임명하고 그를 베로나의 후작이자 캐른텐의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그의 영토를 혼자서 지킬 수 없었고, 1077년 [[위키백과:서임권 분쟁|서임권 분쟁]] 시기때 하인리히 4세는 그를 퇴위시켰고, 베르톨트 슈바벤은 그 두 영토를 모두 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채링겐 가의 영지를 얻고자 노력했으나 다음 해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베로나의 후작 지위는 그의 첫째 아들 헤르만 1세에 의해 유지되었다.  
11세기 동안, 슈바벤 공국의 지배력은 서서히 약해져 갔고, 그 지역은 여러 백작가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그들 중 가장 강력했던 가문은 호엔슈타우펜 가문, 벨프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 그리고 채링겐 가문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는 베르톨트 채링겐을 슈바벤의 공작으로 임명할 것을 약속했으나 1056년 하인리히 3세가 죽고 그의 아내 푸아투의 아네스는 루돌프 폰 라인펠덴을 그 직위에 임명하고 그를 베로나의 후작이자 캐른텐의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그의 영토를 혼자서 지킬 수 없었고, 1077년 [[위키백과:서임권 분쟁|서임권 분쟁]] 시기때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는 그를 퇴위시켰고, 베르톨트 채링겐은 그 두 영토를 모두 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채링겐 가의 영지를 얻고자 노력했으나 다음 해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베로나의 후작 지위는 그의 첫째 아들 헤르만 1세에 의해 유지되었다.
 
헤르만 1세의 아들인 헤르만 2세는 호엔슈타우벤가와 대립하였고, 하인히리 4세는 그에게 봉지를 주었다. 그는 그가 태어나고 자라났던 독일을 그의 봉지로 하고 싶어 했으며, 그가 선택한 봉지는 바덴(오늘날의 [[위키백과:바덴바덴|바덴바덴]])으로, 헤르만 1세가 에베르슈타인-칼브의 백작부인인 유디트 폰 바크낭술리히가우와 결혼하여 통치할 권리를 얻은 땅이었다. 그는 바덴에서 호엔바덴 성을 간설하기 시작했다. 1100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해 1112년에 완공된 그 성은 헤르만 2세가 바덴 변경백의 지위를 얻어낸 것에 대한 상징이기도 했다.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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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4일 (토) 19:49 판

틀:옛 나라 정보 바덴 변경백국(독일어 : Markgrafschaft Baden)은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 중 하나로 라인 강 상류의 동쪽 연안, 지금의 독일 남서부 지방에 위치했던 국가이다. 1112년에 성립되어 1803년까지는 변경백국이었고, 이후 선제후로 승격되었으며, 나중에는 바덴 대공국이 된다. 바덴의 통치자는 슈바벤의 채링겐(Zähringen)가 였다.

역사

11세기 동안, 슈바벤 공국의 지배력은 서서히 약해져 갔고, 그 지역은 여러 백작가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그들 중 가장 강력했던 가문은 호엔슈타우펜 가문, 벨프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 그리고 채링겐 가문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는 베르톨트 채링겐을 슈바벤의 공작으로 임명할 것을 약속했으나 1056년 하인리히 3세가 죽고 그의 아내 푸아투의 아네스는 루돌프 폰 라인펠덴을 그 직위에 임명하고 그를 베로나의 후작이자 캐른텐의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그의 영토를 혼자서 지킬 수 없었고, 1077년 서임권 분쟁 시기때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는 그를 퇴위시켰고, 베르톨트 채링겐은 그 두 영토를 모두 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채링겐 가의 영지를 얻고자 노력했으나 다음 해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베로나의 후작 지위는 그의 첫째 아들 헤르만 1세에 의해 유지되었다.

헤르만 1세의 아들인 헤르만 2세는 호엔슈타우벤가와 대립하였고, 하인히리 4세는 그에게 봉지를 주었다. 그는 그가 태어나고 자라났던 독일을 그의 봉지로 하고 싶어 했으며, 그가 선택한 봉지는 바덴(오늘날의 바덴바덴)으로, 헤르만 1세가 에베르슈타인-칼브의 백작부인인 유디트 폰 바크낭술리히가우와 결혼하여 통치할 권리를 얻은 땅이었다. 그는 바덴에서 호엔바덴 성을 간설하기 시작했다. 1100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해 1112년에 완공된 그 성은 헤르만 2세가 바덴 변경백의 지위를 얻어낸 것에 대한 상징이기도 했다.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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