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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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에 [[나치당]]에 의해 결성되었으며,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한 때의 [[독일]] 정부. [[분류:나치]]
{{나라 정보
[[분류:멸망한 나라]]
|나라이름    = 독일국
 
|원어이름    = Deutsches Reich
==나치당==
|존속연도    = 1933~1945
 
|국기        = Flag of Nazi Germany.svg
[[나치]] 독일의 여당이자 유일한 정당. 이하에는 나치당이 설립하고 나서 정권을 잡을 때까지의 내용만이 서술 되어 있다.
|국기설명    =  
 
|국장        = Reichsadler_Deutsches_Reich_(1935–1945).svg
===초기===
|국장설명    =
나치당은 [[1918년]]에 창립한 정당으로서, 안톤 드렉슬러가 세운 정당이다. 창립 당시에도 [[국가주의]]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원래는 총 멤버가 60명도 안되는 매우 작은 스케일의 정당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운 사이즈의 당이었다. 그나마 멤버들도 대부분 보수 성향의 동네 아저씨들이 전부였고 당이라고 해봤자 틈만 나면 모여서 [[맥주]]에 [[소시지]]를 들이키며 노는 그냥 동네 아저씨 모임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때의 [[바이마르 공화국]], 즉 독일이 하도 약한 상태인지라, 작다고 해도 어찌되었건 정당은 정당이고 극단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고, 이를 단속하기 위해 한 병사를 보내 감시하도록 하였다. 문제는 그 병사가 바로 '''[[아돌프 히틀러]]'''.
|지도        = Greater_German_Reich_(1942).svg
 
|지도설명    =  
그나마 히틀러가 얌전히 감시 업무만 하고 왔다면 참 좋았겠지만, 한번은 나치당의 회의가 열린날에 참석한 바우만 교수라는 사람이 히틀러와 언쟁이 붙고, 결국 언쟁은 히틀러의 승리로 끝났다. 말싸움에서 승리해 뭔가 지적으로 보인(...) 그를 보고 감탄한 나치당은 그를 555번 멤버로 받아주었다. (참고로 상술했듯 겨우 60명 이하인 당에 가입한 히틀러의 번호가 555인 이유는 모든 참가 인원들의 번호에는 '''500을 추가하여서 멤버가 많은 척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였다.''')
|표어        = 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
 
|국가        = 독일인의 노래
그리고 히틀러가 가입하고 나서는 모든 것이 변하였다. 히틀러는 평소에 갖고 있던 정부를 향한 불만을 나치당을 통해 정계로 진출해 쏟아부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으며, 이런 히틀러의 생각을 따라 나치당은 노동자들을 타겟으로한 정당이 되었고, 땅 소유자의 땅을 빼았아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주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야 살 수 있는 땅을 더 만들어나가겠다라는 약속들을 한다. 물론 히틀러는 이들을 지킬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수도        = [[베를린]]
 
|공용어      = [[독일어]]
===뮌헨 맥주홀 폭동===
|국어        =
Munich Putsch
|국교        =
 
|정부유형    = 일당독재
[[1923년]], [[11월 9일]], 히틀러의 본격적인 첫 번째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방법은 쿠데타. 본디 히틀러는 [[베니히토 무솔리니]]를 존경하고 있었고 이에 무솔리니처럼 쿠데타로 정부를 뒤집을 계획을 시행하게 되었다. 장소로 선정된 뮌헨은 베를린에 대한 악감정의 중심지와 다름 없었고, 이것이 엄청 심하여 지역군대장이었던 폰 로쏘우는 베를린 진격을 할 생각도 갖추고 있었다. 이 날, 뮌헨의 총리였던 구스타브 카르 총리, 폰 로쏘우와 경찰 총장이었던 사이서는 뮌헨의 맥주홀에서 우익의 지지자들을 모아서 연설을 할려던 참이었으나, 히틀러가 600명의 무장한 지지자들과 함께 들이닥친다. 여기서 히틀러는 무력으로 이 셋의 협력을 약속 받고 이들을 잠시 감금해 놨었으나, 카르가 주도하여 탈출, 히틀러의 쿠데타를 제지하는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나치 당원 14명이 죽고, 이 당원들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여성들은 나치 움직임의 영웅으로 새겨졌다 {{|이게 명예냐 불명예냐?}} 그리고 이 과정에서 히틀러의 어깨가 탈골된다.<ref>여기서 히틀러는 카르의 배신 행위를 잊지 않았고, 11년 뒤 [[장검의 밤]](The Night of Long Knives)에서 반대파들을 숙청할 때 같이 숙청 되었다.</ref> 직후 히틀러는 체포되어 반역죄로 규정상으로는 사형을 받아도 아무런 할 말이 없지만, '''재판을 자신의 선전 연설로 바꾸고, 이에 판사들이 넘어가서''' 형이 5년으로 줄어버렸다. {{|어이, 그게 너희들이 할 짓이냐?}} 히틀러가 변론의 시간에서 독일 정부의 잘못된 점들을 또박또박 지적하고, 그것을 해결할 방도들을 달달달 제시해대니 판사들이 넘어가 발언 시간을 막 퍼주어서 할 말 다 하게 만들어줬고 결국 히틀러가 할말을 다 하고 나니 마찬가지로 독일 정부에게 불만이 많던 청중자들이 호응하였으며 이 결과 사람들도 판사들도 그를 지지하게 되서 형을 감면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 5년 동안 히틀러는 자사전인 Mein Kampf (독일어로 대략 '[[나의 투쟁]]')의 큰 한 부분을 써내버렸다. 그리고 이 5년마저도 형감되어서 단 9개월 만에 나왔다. {{| 사형-->5년-->9개월로 변하는 민주주의의 마술입니다 여러분!!! 얼씨구 잘하는 짓이다}} {{|무죄 판결 안난게 다행이네}}.
|군주        =
 
|수반 직책  =
히틀러는 이 사건 이후 [[반어법|민주주의의 훌륭함]]을 깨달아서 수감 기간 동안 온 한 면회자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군사적인 반역을 통해 집권하는 것보다, 우리들의 코를 막고 (썩은 내 나는) 가톨릭과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자]] 인간들이 쌓여 있는 라히슈테그(Reichstag,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당시의 의회 같은 곳이다)에 들어가는 게 더 좋다. 그렇게 그들을 투표하여 이기는 것이 그들을 쏴 죽이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릴지라해도, 적어도 그 결과는 '''그 자들이 스스로 작성한 [[헌법]]에 의해 보호되는 것이다.'''" --말은 참 좋은데 이 인간이 했던 것들은 실제로는 글쎄올시다--
|수반        =
 
|부수반 직책 =
===집권===
|부수반      =
나치당이 [[1925년]] 이후 [[1933년]]에 집권하기까지 과정은 꽤나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있기에, 여러 종목으로 나누어 분류하고 서술한다.
|입법부      =
 
|인구        =
====[[히틀러]]====
|인구밀도    =
그치만 히틀러 없는 나치당은 이 9개월마저도 못 버텨서 해체 될 만한 수준의 위기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히틀러가 풀린 뒤인 [[1925년#2월|1925년 2월]]에는 다시 세워졌다. 히틀러의 당내의 존재감을 120% 확인 시켜주는 사건이었다. 실패한 뮌헨 폭동 사건 이후 히틀러의 당내 권위나 힘은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히틀러가 당내의 완전한 독재자 같은 것은 또 아니었던지라, 히틀러는 이후 1926~[[1930년]] 동안 자신의 권력과 방침에 반발하는 사회주의 자들과 대립했어야 됐고, [[1930년#10월|1930년 10월]]에는 히틀러의 헌법 위주 방침에 전저리가 난 당 내부의 사회주의자들이 크게 한 판 당내 혁명을 일으키려도 하였다.
|인구 연도  =
 
|면적        =
또한 히틀러와 나치당하면 히틀러의 연설은 절대 빠질 수 없는 요소다. 히틀러의 연설은 가히 천재적이고 독창적이였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의 연설은 당시 듣는 자들을 홀렸으며, 히틀러가 사용한 테크닉의 일부를 살펴보면:
|면적 연도  =
 
|GDP PPP    =
* 히틀러는 우선 연설에 '''몇 시간'''씩 수시로 늦었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의 매우 불규칙적인 생활에서 비롯된 거고, 또 한편으로는 그가 늦음으로서 관객에게서 흥분과 불안감을 이끌어내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GDP PPP 1인 =
 
|GDP        =  
* 히틀러는 매번 연설을 망설이는 듯 시작하였고, 초반은 매우 대화적인 스타일로 시작한다.
|GDP 1인    =  
 
|GDP 연도    =  
* 시간이 지날 수록 히틀러는 점점 억양을 높이고 매우 열정적이고 잊혀질 수 없는 크레셴도 목소리로 연설하며 그의 말에는 그의 영혼이 담겨 있는 듯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증인의 말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최면을 거는 듯한 눈을 통하여 관중 개개인과 소통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
|화폐        =  
 
|시간대      =  
* 하지만, 매번 이러한 흥분을 나타내어서 자기 감정이 조절 안되는 듯 보이지만, 매번 그의 연설은 아무리 열정적이나 즉흥적으로 보여도 '''전부 다 철저히 계산된 것이였다.''' 특히 연설 도중 여러 제스쳐들을 취하곤 했는데 이는 자신의 연설에 대한 청중들의 몰입도를 극도로 높이는 역할을 했고, 히틀러 또한 제스쳐의 효과를 잘 알아 자신에게 어떤 제스쳐가 어울리는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제스쳐를 활용하는게 좋은지 철저히 연구해두고 적재적소에 이를 활용했다. (실제로 히틀러가 제스쳐를 연구할 목적으로 자기자신을 찍어두었던 사진들이 일부 남아있다)
|ISO        =  
 
|국가도메인  =
* 연설이 끝난 직후에는 자기가 한 연설을 분석하였으며,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국제전화    =
 
|이전나라    = {{깃발그림|Flag of Germany (3-2 aspect ratio).svg}} [[바이마르 공화국]]<br />{{깃발그림|State_flag_of_Austria_(1934–1938).svg}} [[오스트리아 연방국]]<br />{{깃발그림|Flag of Czechoslovakia.svg}} [[체코슬로바키아 제2공화국|체코슬로바키아]]<br />{{깃발그림|Flag of Poland (1928-1980).svg}} [[폴란드 제2공화국]]<br />{{나라|소비에트 연방}}<br />{{깃발그림|Flag_of_France_(1794–1815,_1830–1974,_2020–present).svg}} [[프랑스 제3공화국]]<br />{{나라|네덜란드}}<br />{{나라|룩셈부르크}}
* [[1926년]]부터 당원들의 인서는 꼭 "Heil Hitler", 즉 히틀러 만세가 되었어야 됐다.
|이후나라    = [[독일의 연합군 군정기|연합군 치하 독일]] {{깃발그림|Merchant flag of Germany (1946–1949).svg}}<br />[[오스트리아의 연합군 군정기|연합군 치하 오스트리아]] {{깃발그림|Flag of Austria.svg}}<br />[[체코슬로바키아 제3공화국|체코슬로바키아]] {{깃발그림|Flag of Czechoslovakia.svg}}<br />[[폴란드 인민 공화국]] {{깃발그림|Flag of Poland (1928-1980).svg}}<br />[[소비에트 연방]] {{깃발그림|Flag of Soviet Union.svg}}<br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깃발그림|Flag_of_France_(1794–1815,_1830–1974,_2020–present).svg}}<br />[[네덜란드]] {{깃발그림|Flag of Netherlands.svg}}<br />[[룩셈부르크]] {{깃발그림|Flag of Luxembourg.svg}}
 
|비고        =
====당의 구조====
}}
주로 행정구마다 나누어진 각 지역은 지역의 당담자가 있었고, 그 지역마저 극히 세분화 시켜서 아파트 단지의 관리자까지 임명하였고, 이 정책이 사회적 다윈주의식 성격을 띄는 매우 경쟁적인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히틀러는 무자비하고 역동적인 리더가 높은 위치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오히려 격려했다. 이러한 지역적인 구조 외에도 여러 작은 그룹들을 형성하였는데, HJ (Hitler's youth, 히틀러의 아이들), 여성을 위한 그룹인 Deutsche Frauenorden (DFO), NSDStB (NS Student's league)와 NSLB(NS Teacher's league) 등을 형성하였다.
'''나치 독일'''({{독일어|NS-Staat}})은 [[1933년]][[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한 시점부터, [[1945년]] [[2차 세계대전]]에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시점까지의 [[독일국]](Deutsches Reich) 정부를 일컫는 말이다.
 
==역사==
====불법 무장 단체====
나치 독일의 역사는 그 영향에 비해서 굉장히 짧은 편이다. 아무튼 수권법이 통과되어 [[나치당]]과 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하게 된 이후 독일은 먼저 폴란드와 명목상의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이는 물론 시간 벌기에 불과했고 독일은 이후 1936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하는 반면에 재무장에 나섰고 군비를 확대했다. 에티오피아 침공으로 국제적으로 고립된 이탈리아와 친해진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무시하고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으며, 영국, 프랑스 등과 협상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할양받았다. 이후 독일은 영국, 프랑스와 했던 협상마저 무시하고 체코 지역을 침공해 합병했으며 폴란드에 폴란드 회랑을 요구했다. 이에 영국이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독일을 견제하자 독일은 소비에트 연방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침공했다.
나치당은 Sturmabteilung (SA)라고 불리는 불법 무장 단체를 [[1921년]]부터 소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러 가지 수고스러운 일들을 맡아서 했는데 그 예시들로는:
* 반대당의 집회에 들어가서 개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 구석 구석 돌아다니면서 당을 선전하는, 혹은 당에서 지시된 포스터를 붙이고 돌아다녔으며,
* 선전물을 거리에 떠돌아다니며 배포하였다.  {{|잠깐 나 [[호객|이거]] [[명동|어디]]에서 아주 많이 본거 같아.}}
이런 일들을 도맡아 가면서 했으니 이들은 당연히 [[1933년]]에 나치당이 집권한 뒤에는 큰 보상을 원했으나, 히틀러가 주는 보상은 이들의 환상과 달랐고, [[숙청|결국 별로 안 좋은 결과를 얻어내고 만다]].
 
====목표 관중 확장====
나치당은 기존 목표이던 근로자들 말고도 가장 불만이 많던 농부들을 공략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와중 나치들은 자신들의 정책 중 가장 논란에 휩싸였던 17번째 조항을 재해석하고, 세금 삭감을 약속하며, 농부들이 가장 싫어하던 공무원들의 월급을 삭감하고 싼 수입 품들을 줄이기로 약속'' 하였다.  {{|어라? 요즘 [[한국|어느 나라]] [[개판|정치판]]이랑 비교해보니 변한 게 하나도 없네?}}
 
====[[대공황]]====
나치당의 집권에는 시기적절한 대공황의 역할 또한 컸다. 1929-[[1932년]] 동안 들이닥친 대공황을 통해 독일의 경제는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이를 [[1928년]] 수치와 [[1932년]] 수치를 비교하여 나타내면 다음과 같게 나온다:
* 공장 생산력은 41% 떨어졌다
* 수출량은 54% 떨어졌다.
* 실업자들은 140만명에서 4배 수치인 560만으로 늘었다. 그리고 이는 당시 정부의 공식 발표였기 때문에 아마도 이 수치보다 훨씬 많은 실업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 농업물의 가격은 41% 떨어졌고, 산업 제품들의 가격은 25% 하락했다
* [[1931년]]에 큰 경제적인 위기가 들이닥쳐서 나라의 가장 큰 두 은행인 Dresdner 은행 와 darmstäder 은행이 파산해 버렸고, 국가가 자본을 투입하여 경제를 살리는 것마저도 힘들게 돼 버렸다.
* 정부의 수입이 27% 떨어졌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니 이런 경제적 난제를 해결하라는 여론의 요구는 높아졌고, [[1923년]]에 이미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겪었던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돈을 투입하기 꺼려했다. 그렇다고 정부가 돈을 빌릴 곳은 더더욱 없었다. 국민들의 대부분은 자산을 거의 다 잃은 상태였고, 이런 상황에 독일에 투자하려 하는 미친 투자자는 전혀 없었다. (어쩌면 당시 브뤼닝 총리는 어떻게든 전쟁에서 얻은 국채를 줄이기 위해서 동정심을 얻었어야 했기에 이런 상황을 벌여지는 것을 방조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있다)
 
====투표 결과====
이러한 개판 속에서 당시 정당들의 대부분이 망하거나 크게 바뀌어서 행정부가 수시로 바뀌는 등 (즉, 의회 멤버들을 원래 3~4년에 한 번 바꾸는 것을 거의 1~2년마다 바꿨다) 정부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고, 이러한 미친 시기야 말로 미친 소리를 하는 자들에게 훨씬 유리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정당으로 표들이 엄청 쏠렸다. 그리고 이 시대의 가장 극단적이고 미친당이 나치당이었다. 나치당이 연도별 얻은 의회 석과 그에 상당하는 득표율은 다음과 같았다:
* [[1928년]]: 12석 (2.6% 득표)
* [[1930년]]: '''107'''석 (18.3% 득표)
* [[1932년#7월|1932년 7월]]: 230석 (37.4% 득표)
* [[1932년#11월|1932년 11월]]: 196석 (33.1% 득표)
* [[1933년]]: 288석 (43.9% 득표, 다른 정당들은 20%도 미치지 않은 득표율이 되어서 사실상 의회를 장악했다고 보면 된다.)


폴란드의 동맹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바로 독일에 선전포고 했으나 이루어진 것은 없었고 독일은 소비에트 연방과 함께 폴란드를 분할점령했다. 이후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해 석유 자원을 차지하고 베네룩스 3국을 침공해 프랑스로 진격했다. 이후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이탈리아가 독일 편에서 참전했고 북아프리카 전선이 추가되었다. 이후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이 실패하자 독일은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과 동맹을 맺고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침공해 정복했다. 영국과의 전쟁이 장기화되자 독일은 불가침조약을 무시하고 소비에트 연방을 침공했으나 가혹한 추위, 길어진 보급로 등의 문제점에 부딪혔고 결국 대소련 전쟁마저도 장기화되었다. [[홀로코스트]]라는 유럽 최악의 대학살이 발생한 것도 이 시점이다. 이후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군이 밀리면서 이탈리아는 항복해버렸고 독일은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해 연합군 상륙을 일단 저지하고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세웠다. 그러나 소련 전선에서도 크게 패퇴하면서 독일은 위기에 봉착했고, 프랑스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해방되자 양면전선이 심화되면서 패배가 확정되었다. 히틀러를 비롯한 고위 나치 인사들은 자살했으며, 새로운 독일 정부가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독일은 미국, 소비에트 연방 등 4개국의 분할점령을 받게 되었다. 한편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은 독일을 두고 점차 대립하면서 [[냉전]]이 세상에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관련 인물==
==관련 인물==
* [[아돌프 히틀러]]
* [[아돌프 히틀러]]
94번째 줄: 68번째 줄:
* [[테오도어 모렐]]
* [[테오도어 모렐]]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파울 요제프 괴벨스]]
{{각주}}
[[분류:나치독일| ]]

2024년 3월 18일 (월) 13:47 기준 최신판

독일국
Deutsches Reich
1933~1945
Flag of Nazi Germany.svg
국기
Reichsadler Deutsches Reich (1935–1945).svg
국장
Greater German Reich (1942).svg
표어
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
국가
독일인의 노래
나라 정보
수도 베를린
공용어 독일어
정부유형 일당독재

나치 독일(독일어: NS-Staat)은 1933년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한 시점부터, 1945년 2차 세계대전에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시점까지의 독일국(Deutsches Reich) 정부를 일컫는 말이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나치 독일의 역사는 그 영향에 비해서 굉장히 짧은 편이다. 아무튼 수권법이 통과되어 나치당과 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하게 된 이후 독일은 먼저 폴란드와 명목상의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이는 물론 시간 벌기에 불과했고 독일은 이후 1936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하는 반면에 재무장에 나섰고 군비를 확대했다. 에티오피아 침공으로 국제적으로 고립된 이탈리아와 친해진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무시하고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으며, 영국, 프랑스 등과 협상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할양받았다. 이후 독일은 영국, 프랑스와 했던 협상마저 무시하고 체코 지역을 침공해 합병했으며 폴란드에 폴란드 회랑을 요구했다. 이에 영국이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독일을 견제하자 독일은 소비에트 연방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침공했다.

폴란드의 동맹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바로 독일에 선전포고 했으나 이루어진 것은 없었고 독일은 소비에트 연방과 함께 폴란드를 분할점령했다. 이후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해 석유 자원을 차지하고 베네룩스 3국을 침공해 프랑스로 진격했다. 이후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이탈리아가 독일 편에서 참전했고 북아프리카 전선이 추가되었다. 이후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이 실패하자 독일은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과 동맹을 맺고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침공해 정복했다. 영국과의 전쟁이 장기화되자 독일은 불가침조약을 무시하고 소비에트 연방을 침공했으나 가혹한 추위, 길어진 보급로 등의 문제점에 부딪혔고 결국 대소련 전쟁마저도 장기화되었다. 홀로코스트라는 유럽 최악의 대학살이 발생한 것도 이 시점이다. 이후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군이 밀리면서 이탈리아는 항복해버렸고 독일은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해 연합군 상륙을 일단 저지하고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세웠다. 그러나 소련 전선에서도 크게 패퇴하면서 독일은 위기에 봉착했고, 프랑스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해방되자 양면전선이 심화되면서 패배가 확정되었다. 히틀러를 비롯한 고위 나치 인사들은 자살했으며, 새로운 독일 정부가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독일은 미국, 소비에트 연방 등 4개국의 분할점령을 받게 되었다. 한편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은 독일을 두고 점차 대립하면서 냉전이 세상에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관련 인물[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