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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제갈량은 병력을 과시하면서 서쪽으로 진군한다. 다른 장수들은 모두 제갈량이 서위를 공격할 것이라 말했지만 오직, 곽회만은 제갈량이 서쪽에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위군의 병력을 서쪽에 방비시키게 하려는 제갈량의 낚시이며 실제로는 양수를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그날 밤, 곽회의 말대로 촉군이 양수를 공격했는데 위군이 방비를 하고 있어서 촉군은 성을 공략하는 것에 실패했다.  
며칠 후, 제갈량은 병력을 과시하면서 서쪽으로 진군한다. 다른 장수들은 모두 제갈량이 서위를 공격할 것이라 말했지만 오직, 곽회만은 제갈량이 서쪽에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위군의 병력을 서쪽에 방비시키게 하려는 제갈량의 낚시이며 실제로는 양수를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그날 밤, 곽회의 말대로 촉군이 양수를 공격했는데 위군이 방비를 하고 있어서 촉군은 성을 공략하는 것에 실패했다.  


240년에 농서로 진격해온 강유에 대항하였고, 강유군이 물러나자 이번에도 이민족들을 토벌하고 회유하여 귀순시키는 등의 공을 세워 전장군으로 승진하였다..
240년에 강유가 농서로 진격해오자 곽회가 바로 진군해 추격하여 강중에 이르니, 강유군이 곧 물러난다. 이후 이번에도 이민족들을 토벌하고 회유하여 귀순시키는 등의 공을 세워 전장군으로 승진하였다.


244년 낙곡대전에선 선봉으로 촉토벌에 앞장섰는데, 불리한 형세를 파악하고 즉시 퇴각하여 피해가 크지 않았다는 기록이 정사에 있다...하지만 당시 위의 패배는 동관 서쪽이 텅텅 비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피해가 적을 리가 없다고 보여지는데, 텅텅비었다는 것이 은유적 표현인지 사람이 없다는 건지 물자가 비었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참고로 같은 대목을 권중달 역 자치통감에서는 물자가 없다고 번역했다. 후일 왕기가 언급한 것에 따르면 "옛날 자오의 역에서, 병사가 수백 리를 행군하여 긴 비를 만나, 교각이 파괴되고, 뒤의 군량은 썩어, 전군이 핍절했다. 강유가 깊숙히 쳐들어오니, 치중을 기다리지 못하고 병사들이 굶어 군을 상규로 물렸다." 라고 하니 식량이 떨어진 상황에서 강유의 공격을 받게 되자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244년 낙곡대전에선 선봉으로 촉토벌에 앞장섰는데, 불리한 형세를 파악하고 즉시 퇴각하여 피해가 크지 않았다는 기록이 정사에 있다...하지만 당시 위의 패배는 동관 서쪽이 텅텅 비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피해가 적을 리가 없다고 보여지는데, 텅텅비었다는 것이 은유적 표현인지 사람이 없다는 건지 물자가 비었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참고로 같은 대목을 권중달 역 자치통감에서는 물자가 없다고 번역했다. 후일 왕기가 언급한 것에 따르면 "옛날 자오의 역에서, 병사가 수백 리를 행군하여 긴 비를 만나, 교각이 파괴되고, 뒤의 군량은 썩어, 전군이 핍절했다. 강유가 깊숙히 쳐들어오니, 치중을 기다리지 못하고 병사들이 굶어 군을 상규로 물렸다." 라고 하니 식량이 떨어진 상황에서 강유의 공격을 받게 되자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2016년 10월 20일 (목) 09:03 판

개요

郭淮

후한 말, 삼국시대의 위나라의 장수로 자는 백제(伯濟). 시호는 정후(貞侯). 가충의 후처인 곽괴는 곽회의 조카딸이다.

정사

본격적인 첫 등장은 하후연의 부관으로서 한중 공방전에서 하후연이 사망한 후에 장합을 사령관으로 추천하여, 군대의 불안을 수습하였으며, 이은 유비의 공세를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유비가 한수를 건너 쳐들어오려고 하자 다들 쫄아서 강에 바싹 붙어 진을 치려했다. 이에 곽회는 '적들은 우리가 진을 강에 붙어서 치면 약세라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돌진할 것입니다. 절반쯤 뒤로 가서 치는 것만 못합니다.' 라고 하여 그렇게 행했더니 유비가 의심스럽게 여겨 쳐들어오지 않았다. 조조는 이것을 크게 치하하고는 곽회를 사마로 임명했다.

이후에는 한동안 주로 이민족들을 진압하고 다스리는 역을 맡았었는데 이민족들의 사정을 잘 헤아려서 모두 그를 보고 신명이라고 불렀다는 정사 기록을 볼 때 나름대로 공을 세운것으로 보인다.

228년에는 제갈량이 기산으로 나올 때 열유성으로 보낸 고상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이후 230년 대촉전선에서는 옹주자사로, 오의와 위연을 동원한 제갈량의 공격에 털리고 진식에게 무도, 음평을 빼앗길때 제갈량에게 털리며 체면을 구기기도 하였다. 231년에는 촉나라가 노성을 공격하러 나왔을 때, 곽회, 비요 등이 요격하자 제갈량이 이를 격파하고 상규 일대의 보리를 수확했다. 이때 위나라가 군량이 크게 부족했는데 곽회는 이민족들을 적절히 잘 다스려 그들이 식량을 내게하고 운송을 하게하여 군량을 잘 조달하였다.

234년에 제갈량이 또 다시 쳐들어왔을 때 사마의를 비롯한 위나라 장수 중에 유일하게 제갈량의 유인책을 간파하여 방어에 성공했다. 사곡(斜谷)으로 공격해 온 제갈량은 난항에서 둔전을 시작한다. 당시 사마의는 위남에 주둔하고 있었다. 곽회는 제갈량의 유인책을 간파하여 제갈량이 반드시 장안 방면인 북원을 공격할테니 거기를 점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논의하는 자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고 말하자 곽회가 말했다.

"만일 제갈량이 위수를 넘어서 고원으로 올라와 병사들을 북산에 이어서 농으로 가는 길을 끊어버리고, 백성이나 오랑캐를 동요시킨다면, 이것은 국가에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이에 사마의는 곽회의 의견을 따랐고 곽회는 곧 북원에 주둔했다. 참호와 보루가 아직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촉나라 병사가 대대적으로 다다르니 곽회는 그들을 공격해 막았다.

며칠 후, 제갈량은 병력을 과시하면서 서쪽으로 진군한다. 다른 장수들은 모두 제갈량이 서위를 공격할 것이라 말했지만 오직, 곽회만은 제갈량이 서쪽에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위군의 병력을 서쪽에 방비시키게 하려는 제갈량의 낚시이며 실제로는 양수를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그날 밤, 곽회의 말대로 촉군이 양수를 공격했는데 위군이 방비를 하고 있어서 촉군은 성을 공략하는 것에 실패했다.

240년에 강유가 농서로 진격해오자 곽회가 바로 진군해 추격하여 강중에 이르니, 강유군이 곧 물러난다. 이후 이번에도 이민족들을 토벌하고 회유하여 귀순시키는 등의 공을 세워 전장군으로 승진하였다.

244년 낙곡대전에선 선봉으로 촉토벌에 앞장섰는데, 불리한 형세를 파악하고 즉시 퇴각하여 피해가 크지 않았다는 기록이 정사에 있다...하지만 당시 위의 패배는 동관 서쪽이 텅텅 비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피해가 적을 리가 없다고 보여지는데, 텅텅비었다는 것이 은유적 표현인지 사람이 없다는 건지 물자가 비었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참고로 같은 대목을 권중달 역 자치통감에서는 물자가 없다고 번역했다. 후일 왕기가 언급한 것에 따르면 "옛날 자오의 역에서, 병사가 수백 리를 행군하여 긴 비를 만나, 교각이 파괴되고, 뒤의 군량은 썩어, 전군이 핍절했다. 강유가 깊숙히 쳐들어오니, 치중을 기다리지 못하고 병사들이 굶어 군을 상규로 물렸다." 라고 하니 식량이 떨어진 상황에서 강유의 공격을 받게 되자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이후 옹주군의 이민족 반란들을 진압하는 걸 보면 적어도 곽회가 맡았던 옹주군 자체의 피해보다는 조상 등의 본군의 피해가 컸던 것으로 사료된다. 여기서 본진 놔두고 선봉이 퇴각해도 괜찮은지라는 의문이 제기되는데, 선봉이 조상의 군과 같은 진로로 오지 않았을 가능성도 생각하자. 한 예로 등애와 종회의 정촉시 선봉인 등애는 종회와 같은 경로로 한중을 온 것이 아니라 답중으로 가서 강유를 막았다. 치소가 천수인지라 천수에서 출발하게 되는 옹주군이 무도, 음평 방향으로 진군하여 요화 등이 조상을 뒷치기할 진로를 막고 장안에서 출발하는 조상이 한중으로 내려왔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더불어 대패를 당한 조상은 물론 하다못해 사마소까지 의랑으로 강등되었던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조상보다 먼저 후퇴했던 곽회는 책임을 지지 않았다.

247년 이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강유가 쳐들어올 것을 예측하고 대비하여 강유를 막아내었고, 이민족들의 난도 진압한다...이후 248년 곽회에게 격파된 호왕 치무대가 촉으로 귀순하였는데 이 때 이민족 반란이 한 두 건이 아니었으며, 옹주자사인 곽회가 혼자 하서 4군 지역을 돌며 토벌했는데 이 루트가 경악스럽게 길고 복잡하다. 비의전에 괜히 강유가 강인과 호인을 날개삼아 위를 공격할 수 있다며 비의에게 대규모 군의 운용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248년 ~ 249년에는 석두산의 서쪽에 있는 영거라는 흉악한 오랑캐가 큰 길을 끊어버려 왕의 사신을 왕래하지 못하게 하였다. 곽회는 마침 돌아가는 길에 영거를 토벌하여 대파했다. 강유는 석영으로부터 나와 강천을 따라서 서쪽으로 도망쳐 온 치무대를 맞이하고, 음평태수 요화를 석중산에 남겨 두어 성을 쌓게 하였고, 패배한 강족들을 거두어 인질로 삼았다. 곽회는 군대를 분산시켜 그들을 공격하였는데 다른 장수들은 강유가 강력한 서쪽 야만족과 연합했고 요화가 요충지를 점거하고 있으니 우리 편의 군대를 두 방향으로 나누는 것은 소용없다며 반대한다. 곽회는 이를 물리치고 요화를 공격해 강유가 이를 구원하면 호인과 촉나라의 연합은 자연스럽게 끊어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에 하후패 등을 파견하여 답중까지 강유를 추격하게 하고 자신은 직접 군사들을 인솔하여 요화군을 공격하여 강유가 달려와 요화를 구하니 곽회의 예상대로 되었다. 이렇게 촉의 이민족 연계 침공을 막아내는데 성공하며, 이 공으로 곽회는 도향후로 승진한다.

250년에는 진태의 계책을 받아들여 함께 우두산에 성을 쌓던 촉나라 아문장 구안을 항복시키고, 촉을 꾸준히 물리친 공으로 곽회는 거기장군까지 승진한다. 255년에 사망했고 대장군으로 추증되었다. 아들 곽통(郭嗣)이 뒤를 이었다.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위나라 장수로 소위 촉나라 장수들에게 여러번 당하는 모습처럼 그려지고, 마지막엔 자기가 쏜 화살을 강유가 되돌려 받아쳐 맞고 사망했다는 안습한 대우이지만 실제로는 위와 같이 나름대로 적절하게 맡은 임무를 수행하다가 병사하였다.

평가

한중 공방전부터 제갈량의 북벌, 강유의 북벌까지 서부전선 방어를 훌륭히 수행하고 좋은 계책을 많이 낸 장수. 특히 제갈량의 5차 북벌과 이후 강유가 강인들과 호응해 침공한 것을 막아낸 견실한 타입의 무장.

제갈량의 4차북벌 직전 위연과 오의에게 발렸다던가 왕평이 주도한 낙곡대전 당시 선봉을 섰다가 큰 피해가 없다고는 해도 패하고 후퇴한 일이나 246년 장완이 올린 조서에는 '곽회 걔 우리가 강족에게 갔을때 처발렸다'는 말이 나온다던가[1] 요화에게도 진 기록이 있기는 하고 [2] 진식에게 무도와 음평을 내주거나 하는 등 패배가 없는 무장은 아니었지만 촉한의 북벌을 잘 막아낸 장수로 평가된다. 특히 제갈량의 5차 북벌의 경우 사마의가 막아냈다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사마의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제갈량의 행보를 그가 막아낸 것이나 다름없으며 강유는 곽회가 옹주자사이던 시절 강인들과 호응해 북벌할 당시 비의가 달랑 1만명이내로 군사를 운용하게 하는 한계를 걸었다는 점은 있었으나 곽회를 상대로 고전하였다. 이렇게 촉의 명장들과는 혈투를 벌여가며 대촉전선을 지켜내었다 볼 수 있다.

곽회의 전과는 주로 시야가 넓은 전략안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제갈량의 5차 북벌 당시 제갈량의 우회 기습을 예측한 것도 그렇고 곽회가 강유를 격파하는 방식을 보면 강유의 본군이 아닌 이민족들이나 부하 장수들을 위주로 때리고 이를 통해서 퇴각시키는 것에 가까우며 야전 지휘관의 역량인 전술적인 면으로 보면 강유를 제대로 압도했다기 보단 전략적으로 전쟁을 승리한 것으로 봐야 한다. 강유와 제대로 교전이 붙은 예는 하후패와 함께 싸운 247년의 도서 전투 밖에 없는데 곽회전에서는 그 전투의 결과를 알리지 않으며 이후 강유군이 건재한 것을 보면 잘 쳐줘봐야 곽회에게 유리한 무승부일 가능성이 높다. 도리어 화양국지를 참고할 경우에는 강유가 아예 곽회와 하후패를 상대로 승리했다는 기록마저 나온다. 이때 강유가 1만 밖에 지휘하지 못하는 시기였음을 고려하면 곽회의 전략적 능력은 굉장히 뛰어나다고 할 수 있어도 전술적 능력은 높게 평가하지 못하는 부분.

위연에 대해 평하며 곽회를 격파한 이유로 높게 평하는 경우도 존재하는데 그만큼 위연의 전술적으로 용맹한 장수였고 전략적으로 야전을 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총지휘관 제갈량의 역할을 감안라면 곽회 자체가 전술적으로 그리 평이 높을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전략적 안목도 훌륭하고 예측력도 좋은 장수로 대촉전 및 관서 이민족 스페셜리스트였으며 후방을 추스르고 이민족들의 관리하는 등의 전투 보조적인 일에도 뛰어났던 장수다. 사마의도 중용할 뛰어난 전략적 식견으로 하여금 진태, 등애 등을 기용하여 그들의 조언을 들어가며 최적의 전술을 찾아내는 능력도 뛰어나 강유와 요화 등 촉장들의 북벌을 여러번 좌절시키기도 했다. 화려한 장수라기보다는 견실한 타입의 장수.

각주

  1. 저는 비위 등과 이렇게 상의하였으므로 적군이 아끼는 곳이고, 게다가 강족과 호족은 갈증이 나는 한을 그리워하며, 또 과거 한 부대가 강족을 침입했을 때, 위의 옹주자사 곽회(郭淮) 가 패배하여 달아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의 장, 단점을 헤아려 보면, 양주 점령을 우선으로 해야 되므로 응당 강유를 양주자사로 임명해야만 합니다. 만일 강유가 출정하여 가서 하우(河右)를 제압한다면, 신은 군대를 인솔하여 강유의 뒤에서 계속 따라야 합니다. 지금 부현은 물길과 육로를 통해 사방으로 길이 통해 있으니, 긴급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호응할 수 있을 겁니다. 만일 동북쪽으로 어떤 마비가 있다면, 앞으로 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 촉서 장완전.
  2. 魏書曰:九月,蜀陰平太守廖惇反,攻守善羌侯宕蕈營.雍州刺史郭淮遣廣魏太守王贇﹑南安太守游奕將兵討惇.淮上書:「贇﹑奕等分兵夾山東西,圍落賊表,破在旦夕.」帝曰:「兵勢惡離.」促詔淮敕奕諸別營非要處者,還令據便地.詔敕未到,奕軍為惇所破;贇為流矢所中死. 위서에 이르길 : 9월, 촉의 음평태수 요돈(요화의 옛 이름인 요순의 오기)이 반하여, 강후 탕심의 영채를 공격하고 잘 지켰다. 옹주자사 곽회가 광위태수 왕빈, 남안태수 유혁의 장병을 파견하여 요돈을 토벌했다. 곽회가 상서하여 말하길 '왕빈, 유혁등이 분병하여 산의 동서를 둘러쌌고, 포위하여 적의 외면을 함락시켰으니, 격파하는 건 아침 아니면 저녁의 일입니다.' 명제가 말하길 '병세는 흩어지는 것을 꺼리오' 조칙을 내려 곽회에게 유혁과 별영의 모든 요처가 아닌 곳에 있는 부대를 경계하도록 재촉하고, 돌아와 편리한 지형에 의거하도록 명령했다. 경계토록 하는조칙이 이르기도 전에, 유혁의 군대는 요돈에게 격파당했고, 왕빈은 유시에 맞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