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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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仁德.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7년 11월 3일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읍 내이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구 계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1918년 11월 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길림과 상하이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며, 김대지의 비서를 맡기도 했다. 그러던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김대지, 손일민과 함께 의열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상하이에서 황상규, 김원봉, 이성우, 강세우, 이종암(李鍾岩), 한봉근, 신철휴, 서성락, 권준, 김상윤 등과 함께 의열단을 결성하고 의열단장으로 김원봉을 추대했다.

이후 그는 김원봉, 이종암 등과 밀의하여 폭탄을 입수한 뒤 이를 가지고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와 최수봉에게 폭약과 폭탄제조기를 건넸다. 최수봉은 이를 가지고 폭탄 2개를 제작한 뒤 1920년 12월 27일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 이후 경찰은 그가 사건에 연관되었다는 사실을 탐지하고 전격 체포했고, 고인덕은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년 6개월 만에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출옥 후 다시 국외의 의열단 동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한 그는 폭탄과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가산을 모두 처분하여 3천원을 마련한 뒤, 특파원에게 그 돈을 맡겨 상하이로 파견했다. 이후 1925년 11월 권총과 폭탄 등이 마련되자, 그는 이종암, 배중세(裵重世), 한봉인 등과 함께 거사하려 했다. 그러나 경찰이 이를 탐지하고 이종암을 체포하면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고, 그 역시 곧 체포되어 12월 18일부터 대구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는 대구형무소에서 심한 고문을 받다 1926년 12월 21일 급성 심장병으로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고인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70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