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인

韓鳳仁.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6년 11월 21일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면 가곡동에서 아버지 한춘서(韓春瑞)와 어머니 김해출(金海出)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형인 한봉근과 함께 삼촌인 한춘옥의 미곡무역상 일을 하다 23세 때 숙부 한춘옥으로부터 100원을 지원받고 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1919년 봄 고산자에 있던 신흥무관학교에서 고향 친구인 김원봉, 김상윤과 형 한봉근과 함께 재학해 교육을 마쳤고, 11월 10일 길림의 파호문밖 반씨 농가에서 의열단이 창단될 때 함께 했다. 이후 그는 무기를 국내로 반입시키는 데 가담했으며, 밀양에서 폭탄 의거를 벌이는 일에 관여했지만 실패했다.

곽재기, 황상규, 윤세주, 이낙준, 이성우, 김기득, 서상락 등 인사들이 밀양 폭탄 의거가 계획 단계에서 발각된 뒤 대거 체포되었을 때, 상하이에 남아있던 그는 군자금 모집책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국내로 잠입하여 대구부 칠곡군 임천면 신동에 있는 이명근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요구하다가 거절을 당하기도 했지만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진행할 때 김원석과 함께 최수봉을 도왔다.

이후로도 중국과 국내를 오가며 군자금 모집에 열중하던 한봉인은 1925년 이종암・김재수・이병태・이병철・김병환・신철휴・이기양・이주현・배중세 등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폭탄의거를 계획했지만 사전에 일제에 탐지되어 여러 동지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때 체포를 모면한 그는 이종암, 고인덕 등과 함께 대구로 내려가 1925년 11월 5일 달성군 달서면에 있는 배중세 집에서 이종암이 계획했던 의거를 실행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던 중에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 후 그는 공판에 넘겨졌고, 1926년 12월 18일 징역 8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형 한봉근과 함께 임시정부를 드나들며 김구를 도왔으며, 삼촌인 한춘옥에 영고탑 팔가둔에서 농장 일을 할 때 돕기도 했다. 8.15 해방 후 밀양으로 돌아와서 초대 민선 밀양읍장 선거에서 당선되어 밀양읍장으로 봉직했고, 1968년 1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한봉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