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에티엔 플랑댕: 두 판 사이의 차이

잔글 (봇: 자동으로 텍스트 교체 (-사용자:Pika/대체용 틀 +인물 정보))
잔글 (→‎top)
1번째 줄: 1번째 줄:
{{역대 프랑스 총리(제3공화국)}}
{{프랑스 총리
{{프랑스 총리
| 대수 = 77
| 대수 = 77
6번째 줄: 7번째 줄:
| 후임자= [[카미유 쇼탕]]
| 후임자= [[카미유 쇼탕]]
|}}
|}}
{{인물 정보
{{인물 정보
|인물이름 = 피에르-에티엔 플랑댕
|인물이름 = 피에르-에티엔 플랑댕

2022년 1월 17일 (월) 21:22 판

프랑스 공화국 문장.png

Président du Conseil des Ministres
27대 28대 29대 30대 (27대)
쥘 뒤포르 드 브로이 공작 에르네스트 드 시세 루이 뷔베 쥘 뒤포르
31대 (28대) 32대 (27대) 33대
쥘 시몽 드 브로이 공작 가에탕 드 로슈부에 쥘 뒤포르 윌리엄 워딩턴
34대 35대 36대 (34대) 37대
샤를 드 프레시네 쥘 페리 레옹 강베타 샤를 드 프레시네 샤를 뒤클레
38대 (35대) 39대 (34대) 40대
아르망 팔리에르 쥘 페리 앙리 브뤼송 샤를 드 프레시네 르네 고블레
41대 42대 43대 (34대) 44대
모리스 루비에 샤를 플로케 피에르 티라르 샤를 드 프레시네 에밀 루베
45대 46대 47대 (46대) (45대)
알렉상드르 리보 샤를 뒤피 장 카지미르 페리에 샤를 뒤피 알렉상드르 리보
48대 49대 (39대) (46대) 50대
레옹 부르주아 쥘 멜린 앙리 브뤼송 샤를 뒤피 피에르 발데크 루소
51대 52대 53대 54대 55대
에밀 콩브 모리스 루비에 페르디낭 사리엥 조르주 클레망소 아리스티드 브리앙
56대 57대 58대 (55대) 59대
에르뇌 모니 조제프 카요 레몽 푸앵카레 아리스티드 브리앙 루이 바르투
60대 (45대) 61대 (55대) (46대)
가스통 두메르그 알렉상드르 리보 르네 비비아니 아리스티드 브리앙 알렉상드르 리보
62대 (54대) 63대 64대 (55대)
폴 팽르베 조르주 클레망소 알렉상드르 밀랑 조르주 레그 아리스티드 브리앙
(58대) 65대 66대 (62대) (55대)
레몽 푸앵카레 프레데리크 마르샬 에두아르 에리오 폴 팽르베 아리스티드 브리앙
(66대) (58대) (55대) 67대 68대
에두아르 에리오 레몽 푸앵카레 아리스티드 브리앙 앙드레 타르디외 카미유 쇼탕
(67대) 69대 70대 (67대) (66대)
앙드레 타르디외 테오도르 스테그 피에르 라발 앙드레 타르디외 에두아르 에리오
71대 72대 73대 (68대) (72대)
조제프 폴 봉쿠르 에두아르 달라디에 알베르 사로 카미유 쇼탕 에두아르 달라디에
(60대) 74대 75대 (70대) (73대)
가스통 두메르그 피에르 에티엔 플랑댕 페르낭 뷔송 피에르 라발 알베르 사로
76대 (68대) (76대) (72대) 77대
레옹 블룸 카미유 쇼탕 레옹 블룸 에두아르 달라디에 폴 레이노
78대
필리프 페탱
제2제국 시기 총리
Era de Second Empire
제4공화국 시기 총리
Era de Quatrième République
피에르-에티엔 플랑댕
Pierre-Étienne Flandin
Pierre-Étienne Flandin 1935.jpg
인물 정보
출생 1889년 4월 12일
프랑스 파리
사망 1958년 6월 13일 (69세)
프랑스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주,
알프마리팀 현, 생장카프페라 시
국적 프랑스
정당 민주공화동맹
배우자 마르그리트 바르비에

개요

피에르-에티엔 플랑댕은 프랑스 제3공화국의 74대 총리를 지낸 정치인으로 제3공화국 말 온건 중도우파를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다.

생애

초기

피에르-에티엔 플랑댕은 1889년 4월 12일 파리에서, 튀니지의 주 의원이자 상원의원이었던 아버지 에티엔 플랑댕(Étienne Flandin)과 어머니 마리 리비에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 유복한 환경 덕에 그는 명문 사학에서 중등교육을 마치고, 명문 그랑제콜 중 하나인 파리정치대학에서 법학과정을 이수한 뒤, 파리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따고, 전업 변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당시 정계의 우익 중진이었던 알렉상드르 밀랑의 눈에 띄어, 그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했고, 1914년 하원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치인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그는 센 지역의 상원의원인 레옹 바르비에의 딸과 결혼했다.

그렇게 정력적으로 정치 생활을 하던 플랑댕은 비행기 조종에 빠져, 1912년 비행기 조종사 자격을 따냈고, 1914년에 육군 항공대의 제33비행단에서 조종사로 복무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플랑댕은 정치인 이력 덕분에 육군부 산하 항공국장으로 임명되었고, 곧 협상국에서 알아주는 항공행정 전문가로 발돋움했다. 그에 따라 최초로 제공권과 상업용 항로, 국제적 항공법에 대해 규정한 1919년의 파리 협약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고, 그 공로로 플랑댕은 육군부에 새로 신설된 항공차관으로 입각하게 된다. 그리고 플랑댕은 항공차관으로서 국가기상청을 설립하고, 항공 기술 및 산업을 육성했으며, 그를 위한 정부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이런 플랑댕의 항공에 대한 헌신은 그를 프랑스 항공 협회(Aéro-Club de France)의 감사패와 협회 회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플랑댕은 내각 각료로서의 본분을 다 하기 위해서 회장직에서 물러났으나, 협회는 그를 명예 회장으로 삼았다.

이렇게 항공산업 육성에 진력을 다하는 한편으로 플랑댕은 1919년과 1924년에 욘 지역의 하원의원으로 연거푸 당선되면서 그는 점점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는데, 대표적으로 플랑댕은 법률 위원회에서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는 선진적인 제안을 의회에 상정한 적이 있었고, 재무 위원회에서 철두철미한 예산 책정 및 감사로 이름을 날렸다. 그 결과, 그는 1928년에 하원부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29년에는 앙드레 타르디외 총리로부터 내각 입각을 권유받아, 산업통상부 장관으로 입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31년부터 32년까지 존속했던 피에르 라발 내각의 재무장관을 지냈으며, 그 뒤를 이어 1932년의 단명한 타르디외 내각에서도 재무장관으로 재직했다.

그리고 그렇게 유망한 정치인으로서 명성을 떨치던 그는 1933년 민주동맹(Alliance Démocratique)의 당수로 선출되었고, 우익 단독 내각을 주장하던 타르디외와 폴 레이노에 맞서, 리버럴 정당(대표적으로 급진공화당)과의 연정을 추구했다. 그러나 미국발 대공황이 프랑스를 휩쓸기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플랑댕은 레몽 푸앵카레 내각 시절 내놓은 보수적인 경제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섣부르게 프랑화를 절하한 결과 프랑스 경제는 특유의 식민지 블록 경제가 뒷받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그래도 플랑댕이 재무장관으로서 금 보유고 관리는 잘한 덕에, 추후 인민 전선 내각의 경제 회복에 밑거름이 되었다.

6개월의 총리 시절

이후 스타비스키 사건으로 인해 1934년 프랑스 헌정 위기가 터졌고, 이 사단을 수습하기 위해 프랑스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정계를 은퇴했던 가스통 두메르그가 총리로 복귀하면서, 플랑댕은 내각의 공공사업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전 총리이자 두메르그 내각의 외무장관이었던 루이 바르투가 불가리아 공산주의자였던 블라도 체르노젬스키의 총에 맞아 죽고, 두메르그가 야심차게 제안했던 1875년 헌법의 개헌 제안이 의회에서 비토를 당했으며, 총리인 두메르그 그 자신도 건강이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자, 8개월 만에 총리직을 사임하였다.

결국 후임 총리의 지명권은 당시 부총리였던 앙드레 타르디외에게 돌아왔으며, 타르디외는 플랑댕을 두메르그의 후임 총리로 지명하게 된다.

라인란트 재무장

국민혁명 합류

전후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