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라발

피에르 장 마리 라발
Pierre Jean Marie Laval
Pierre Laval a Meurisse 1931.jpg
인물 정보
출생 1883년 6월 28일
프랑스 오베르뉴 론 알프
퓌드돔 현, 샤텔동 시
사망 1945년 10월 15일 (61세)
프랑스 일 드 프랑스
빌드마른 현, 프렌 교도소
국적 프랑스
정당 SFIO (1914~23)
무소속 (1923~45)
배우자 잔 클레샹
가족 자녀: 1녀(조제 라발)

피에르 라발(프랑스어: Pierre Laval)프랑스 제3공화국비시 정권에서 총리로 재직한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정치인이자 법조인, 그리고 국가 반역자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초창기[편집 | 원본 편집]

피에르 라발은 1883년 샤텔동에서 호텔과 과수원의 주인이자 집배원이였던 질베르 라발(Gilbert Laval)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직설적이면서 장난스러운 언변으로 이름이 높았던 그는 15세에 파리의 유명한 생 루이 학원(Lycée Saint-Louis)에 입학하여, 바칼로레아를 취득했다. 그리고 보르도와 바욘의 대학들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지망하던 자연과학과 스페인어를 공부했고, 리옹, 오툉, 생테티엔의 여러 학원에서 교편을 잡아 학비를 마련하는 삶을 살았다.

이렇게 지내던 중, 1903년에 라발은 생테티엔에서 블랑키주의 정당인 중앙혁명위원회(Comité Révolutionnaire Central)의 팜플렛을 접하게 되고, 그에 감명을 받아 당원으로 가입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서서히 자연과학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그리고 동년 8월에 라발은 군대에 입대하게 되는데 하지정맥류 질환으로 인해 전역하게 된다.[1] 이 군대 경험은 라발이 짧게는 조르주 소렐위베르 라가델의 혁명적 생디칼리즘에 더욱 경도되는 계기가, 길게는 그의 일생토록 군대를 불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

하여튼 라발은 이후 법학을 공부하여, 1909년에 변호사 자격을 따내는 데 성공하고, 고향 샤텔동의 시장이자 유력한 사회주의자 정치인이었던 조제프 클레샹(Joseph Claussat)의 딸인 잔 클레샹(Jeanne Claussat)과 결혼하게 된다. 그 뒤 파리로 다시 이사한 라발은 CGT의 변호사로 일하게 되면서 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정계 초기[편집 | 원본 편집]

라발이 변호사로 일하기 시작할 무렵의 프랑스는 심각할 정도로 노동자의 권익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고, 노동자와 좌익 정치가들에 대한 탄압 역시 극심했다. 이는 파리 코뮌 이후, 이를 배후로부터의 중상이라 생각한 법조계 인사들과 일부 기성 정치가들이 지극히 온건한 공상적 사회주의 인사들마저 탄압할 정도로 우경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라발은 그런 법조계의 책동에 맞서, 파업 노동자와 노동운동가, 노동자, 좌익 정치가들을 변호했다. 이때 라발이 변호를 맡은 사건 중 제일 유명한 것이 폭탄 테러미수 혐의로 기소된 무정부주의자 귀스타브 마녜스(Gustave Manhès)를 변호하여 무죄로 이끌어낸 일이었다.

그렇게 명성을 얻은 라발은 세느 강 선거구의 하원의원 보궐 선거에 SFIO의 후보로 출마했는데, 여기서 라발은 급진당의 후보였던 자유주의자 군인인 알렉상드르 페르생(Alexandre Percin) 장군과 우익 성향의 지주에 무소속 뇌이쉬르센 시장인 에두아르 노르티에(Édouard Nortier)과 경쟁했고, 결국 노르티에에게 패배했다.

우익으로 전향하다[편집 | 원본 편집]

정계 거물로서[편집 | 원본 편집]

국가를 배신하다[편집 | 원본 편집]

전후 재판 및 처형[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출처 : Kupferman, Fred (24 September 2015). Pierre Laval. Tallandier. p. 13
  2. 출처 : Privat, Maurice, Pierre Laval , Paris: Editions Les Documents secrets, 1931, pp. 6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