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옹 블룸

앙드레 레옹 블룸
André Léon Blum
레옹 블룸.jpg
인물 정보
출생 1872년 4월 9일
프랑스 파리
사망 1950년 3월 30일 (78세)
프랑스 일 드 프랑스
이블린 현, 주이-앙-조자스 시
국적 프랑스
정당 SFIO
배우자 리스 블로치
테레즈 블룸
잔느 블룸
가족 자녀: 1남

레옹 블룸(프랑스어: Léon Blum)은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정당한 선거를 통해 국가수반까지 올라갔던 프랑스 제3공화국민주사회주의 정치인,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초년기[편집 | 원본 편집]

블룸은 1872년 4월 9일, 파리에서 부유한 방직 상인이었던 이브라힘 블룸과 아델 마리 블룸 사이에서 태어나,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École Normale Supérieure)와 파리 제1대학교(당시는 소르본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 변호사와 문학 비평가로 활동했다. 이런 성장배경에서 보다시피, 블룸은 처음부터 사회주의나 정치에 흥미를 가진 인물은 아니였고 오히려 왕당파 민족주의 정치인이자 작가로 유명했던 모리스 바레스의 팬으로 활동하는 등의 프랑스 우익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으나, 1894년에 반유대주의 기류를 타고 벌어진 드레퓌스 사건 이후, 블룸은 만민이 평등한 공화국을 기치로 삼은 프랑스 사회의 모순에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때 블룸은 그의 정치적 스승인 민주사회주의자 장 조레스(Jean Jaurès)를 만나게 되었는데, 장 조레스의 사회주의적 인문주의에 감화된 블룸은 조레스를 따라, SFIO에 입당하게 된다. 거기서 블룸은 자신의 재능을 살려 좌익 일간지였던 뤼마니테(L'Humanité)에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고, 르네 비비아니 내각에서 공공산업장관을 역임했던 마르셀 상바(Marcel Sembat)의 비서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의 개전에 극렬히 반발하던 스승 장 조레스가 극우 민족주의자인 라울 발랭에게 암살당하는 불운을 맞았음에도 블룸의 민주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은 더더욱 강해지게 된다.

블룸은 1919년에 파리 지역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이내 당의 제1서기 직책을 맡게 되는데, 여기서 블룸은 1920년 12월 25일부터 30일까지 프랑스 투르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자신의 노선을 배격하는 당내 과격파들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거나 혁명 전위대 이론, 대중 동원과 관련된 무력 혁명론과 같은 핵심 테제들에 관해 논쟁을 벌이게 된다. 여기서 블룸은 그 유명한 "누군가는 오래된 집을 지켜야 한다."(il faut que quelqu’un reste garder la vieille maison.) 발언으로 대표되는, 테러와 특정 국가(소비에트 러시아)에 굴종하는 노선에 맞서 온건 민주사회주의 노선을 주창했고, 논쟁에서 우세를 점하기는 했으나 러시아 혁명코민테른이 내세우는 세계 혁명 이론에 의해 자극받은 과격파들의 대규모 탈당을 막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 과격파들은 SFIO에서 탈퇴한 이후, 새로 정당을 하나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크렘린의 장녀라는 멸칭으로 불렸던 프랑스 공산당의 탄생이다.[1]

1920년대[편집 | 원본 편집]

투르 당대회 이후, 블룸은 잔존 SFIO의 수장으로서 정력적인 정치 활동을 벌였는데, 급진당에두아르 에리오 내각에 신임과 보완을 제공했던 것이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1928년의 총선거에서 센 지역구에 출마한 블룸은 프랑스 공산당자크 뒤클로[2] 에게 패배하여 낙선하였고, 후일 1929년 나르본 지역구의 재보선에서 해당 시의회의 SFIO 소속 의원인 외젠 몽텔의 지원을 받고 나서야 당선되었다.

1930년대[편집 | 원본 편집]

1931년 9월, 그동안 레몽 푸앵카레 3기 내각에서부터 이어지던 보수적 경제 블록 정책과 프랑 평가 절하 덕에 그동안 번영을 구가했던 프랑스의 경제가 대공황의 탁류에 휘말리게 되면서 프랑스 사회는 급속도로 불안정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1920년대만 하더라도 확고부동하게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민주동맹이나 공화연맹의 지지율은 급격하게 떨어졌으며, 이는 1932년 3월의 프랑스 총선에서 중도-좌파 정당들의 약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블룸은 6월 초부터 물밑 협상을 통해, 당해 10월에 있을 지방 선거에서 프랑스 공산당과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SFIO와 공산당 소속 주지사나 지방 의원들이 늘어난 데 반해 기성 정당들은 그 세가 축소되었다. 특히 1935년에 독일에서 파시즘 광풍이 몰아치면서 소련과 가까웠던 좌익 정당들의 약진은 더더욱 두드러졌다.

이런 중도-좌파 정당들의 약진은 극단주의적 우익들이 소련의 주구가 프랑스를 잡아먹으려고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중 더 극단적인 부류는 약진의 주역이었던 블룸이 유대인 혈통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근거로 다시 반유대주의 기류를 고조시켰다. 그리고 저 꼴통 짓거리를 2010년대에 자행하는 미친 쓰레기들이 있지.

그리고 이 반유대주의자들의 증오는 선을 넘고 마는데, 1936년 2월 13일에 파시스트이자 부르봉 복고주의 정치가인 샤를 모라스가 이끄는 부르봉 복고주의자 집단인 카멜로트 뒤 루아(Camelots du Roi)가 블룸 부부에게 테러를 가한 것이다. 블룸은 오텔 디외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후두부 정맥 파열로 몇 주 동안 입원해야 했다. 그리고 모라스는 5월 15일에 다시 블룸을 협박하는데, 이 때문에 모라스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지만, 그마저도 교황 비오 11세를 비롯한 종교인들과 우익 정치인들의 압박으로 흐지부지된다.[3]

한편,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아돌프 히틀러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극우 파시즘이 유럽을 휩쓸고, 레프 트로츠키가 축출되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전권을 잡은 코민테른의 방침이 현지의 리버럴-공화주의 정당과 합작해 정권을 우선적으로 잡을 것[4]으로 변경되었고, 스페인에서 산티아고 카사레스 키로가[5]를 수반으로 삼는 범좌파 연립 정권인 인민 전선 내각이 들어서자 그에 따라 프랑스 공산당에서도 서기장인 모리스 토레즈가 인민 전선 논의에 유화적인 태도로 전향했다.[6] 이에 따라 전부터 블룸이 꾀해 왔던 인민 전선 합의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그리고 협상의 결과, 급진당SFIO가 연립 정부를 형성하고 프랑스 공산당이 신임과 보완을 제공하는 형태의 연립 정부안이 도출된다.

그리고 1936년 5월에 개최된 1936년 프랑스 총선거에서 인민 전선은 과반수 의석을 넘기는 승리를 거뒀고, 곧장 블룸은 총리로 지명되었다.

인민 전선 내각[편집 | 원본 편집]

그렇게 총선에서 인민 전선이 승리하고, FDR의 노력으로 미국발 대공황이 가라앉아 경제가 안정되자, 인민 전선에 투표권을 행사했던 노동자들은 자신감에 차올랐다. 그렇기에 그들은 기존 급진당-우익 무당파 내각이 집권하고 있던 시절까지 무시되었던 열약한 노동환경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시도했고, 그에 따라 1936년 6월, 블룸 총리와 내무장관 로제 살랑그르, 노동장관 장 바티스트 르베스는 당시 총리 관저로 쓰이던 마티뇽 궁전(Hôtel de Matignon)에서 프랑스 노동총연맹의 의장이었던 레옹 주오와 며칠 간의 협상 끝에, 6월 5일 아침에 5대 노동 기본권을 명시한 마티뇽 협정(Accords de Matignon)을 체결한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개선되었고 장기적으로 대중의 구매력이 증대되었으나, 단기적으로는 축소된 근무시간과 봉급 인상과 함께 동반된 인플레이션의 악영향이 나타났다.[7]

게다가 알제리 식민지의 점진적 자유화를 위해 전직 알제리 총독이자 무임소장관이었던 모리스 비올레트와 공동으로 발표한 블룸-비올레트 계획피에 누아르의 정치자금과 압력을 받은 달라디에의 급진당 및 우익 정당들의 격렬한 반대와 사보타주, 비토로 인해 실행되기도 전에 하원에 계류하다 결국 1938년에 좌초해버리고 말았다.[8]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카미유 쇼탕 내각 시절 라인란트 재무장으로 드러난 나치 독일의 급격한 군비 확대가 점점 암운을 들이게 되자 블룸 내각은 어쩔 수 없이 마티뇽 협정 이후, 공약으로 내세웠던 수많은 사회, 경제적 개편 정책을 포기해가면서 재무장에 열중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블룸은 국방예산을 140억 프랑이라는 천문학적인 단위로 증액해가면서 각종 건함계획과 공군 건설을 지원했는데, 이때 프랑스의 재무장을 감독하기 위해 육군참모총장으로 선임된 장군이 바로 모리스 가믈랭 장군이었고, 건함계획을 감독하기 위해 해군참모총장으로 선임된 제독은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이었다.[9]

그나마 정국 혼란을 주장하는 극단주의 우익 세력에 대한 제재 및 통제 정책은 공산당은 물론, 급진당도 동의한 부분이라 블룸 총리의 구상대로 흘러갔고, 온건화를 선언하고 제도정치권에 편입된 프랑수아 드 라 로크사회당을 제외한 나머지 극단주의 세력들은 해산될 수 있었다. 하지만 문민내각의 통제를 벗어나 정계에까지 영향력을 끼치는 군부 내의 극단주의자에 대한 통제는 급진당의 방해와 더불어, 여러 어려운 사정 때문에 거의 이뤄지지 못했고 이는 나중에 필리프 페탱 원수의 집권 및 쿠데타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시기[편집 | 원본 편집]

전쟁 직후[편집 | 원본 편집]

말년[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여담으로 이때 호치민이 투르 전당대회에 참석하여 제3인터네셔널에 가입을 촉구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2. 스페인 내전에서 코민테른 파견위원으로서 교조적인 스탈린주의를 설파하고, 그에 반하는 공화파 요인들을 숙청해 공화국의 실패를 이끌어내고, 후일 프랑스 공산당 당수로서 프랑스 제4공화국의 정국 불안을 초래한 바로 그 사람이다.
  3. 하지만 우익 정치인들이 모라스의 석방을 요구했다는 부분은 출처가 불명확하다. 그러나 악질 테러리스트인 모라스가 교황과 우익 성향의 높으신 분들의 압박으로 법적 책임에서 회피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4. 이는 제7차 코민테른 총회에서 불가리아의 공산주의자이자, 후일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의 수상을 역임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민주적 자본가들과의 연대를 주장한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
  5. 원래대로였다면 원내 제1당인 PSOE(스페인 사회노동당)의 당수였던 인달레시오 프리에토가 총리가 되었어야 했으나, 라르고 카바예로를 비롯한 당내 스탈린주의자들의 반발에 부딪히는 바람에, 마누엘 아사냐 대통령과 친하던 유약한 중도주의자 카사레스 키로가가 총리가 되었다.
  6. 재미있게도 코민테른의 결정 이전에는 프랑스 공산당은 SFIO와 급진당 간의 연정을 거부했었다. 그 때문에 SFIO와 급진당과의 연정을 주장하던 자크 도리오는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는데, 도리오가 제명된 지 겨우 1달 만에 인민 전선 합의가 이루어지고 말았다. 이 때문에 명징한 레닌주의자였던 도리오는 점차 우경화되기 시작한다.
  7. 하지만 이 인플레이션은 국민블록(Bloc national)으로 대표되는 급진당-우익 무당파 연정 정권의 무분별한 프랑화 절하 정책의 반작용이 블룸 내각 때 나타났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8. 재미있게도 모리스 비올레트 장관의 소속 정당은 급진당이었다. 이때 오랑의 시장이었던 가브리엘 랑베르 신부는 블룸과 비올레트, 그리고 블룸-비올레트 계획에 찬동한 사람들을 모두 배후에 중상하는 유대인에 비국민이라고 까내리는 책자를 프랑스 본토에 유통시켰다고 한다.
  9. 당시 모리스 가믈랭 장군은 1차 세계대전의 엄청난 공적과 더불어, 극우반동적이었던 조제프 조프르필리프 페탱과는 달리 공화국과 문민통제에 순응하는 모습을 일관적으로 보여왔기에 블룸과 인민 전선 내각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고, 다를랑 제독의 경우에는 급진당의 알베르 사로 전 총리의 대자라는 인연 덕분에 급진당의 추천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