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사로

알베르 피에르 사로
Albert-Pierre Sarraut
Albert Sarraut.png
인물 정보
출생 1872년 7월 28일
프랑스 누벨아키텐
지롱드 현, 보르도 시
사망 1962년 11월 26일 (89세)
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
정당 급진당

알베르 사로(프랑스어: Albert Sarraut)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과 두 차례 총리직을 역임한 프랑스의 정치인이자 관료, 변호사, 기자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초창기[편집 | 원본 편집]

알베르 사로는 1872년 보르도에서 지역 언론사 사주인 오메르 사로(Omer Sarraut)의 아들로 태어나, 툴루즈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졸업한 후로 얼마간 기자 생활을 하다가, 보르도 지역의 급진당 간부였던 아버지의 영향력과 더불어, 드레퓌스 사건불랑제 위기로 인해 발효된 1901년 결사법의 혜택에 힘입어 오드 지역의 하원의원으로 당선된다.

정계 초기[편집 | 원본 편집]

그렇게 하원의원이 된 사로는 1905년에 급진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위원으로 발탁되었으며, 에밀 콩브 내각이 발의한 1905년 정교분리법의 찬성측 일원으로서 활동한다. 그리고 이듬해 1906년 7월 13일, 드레퓌스 사건의 당사자인 알프레트 드레퓌스 대위와, 조르주 피카르 중령의 복권에 대한 투표가 하원에 부의되었을 때, 사로는 당시 드레퓌스를 무고했던 오귀스트 메르시에의 일파였던 폴 푸글리에시 콩티(Paul Pugliesi-Conti) 의원에게 일방적으로 결투를 선언당했고, 콩티의 칼이 사로의 폐부를 찌른 바람에 사로는 6주 동안 입원해 있어야 했다.

1907년 랑그도크 포도주 위기에서[편집 | 원본 편집]

1907년 랑크도크 포도주 위기가 일어날 당시, 사로는 조르주 클레망소 내각에서 내무부 차관으로 입각해 있었는데, 프랑스 남부 출신이었던 덕분에 사로는 당시 시위를 일으킨 랑그도크를 비롯한 남부 양조업자들의 비참한 상황과 그 정당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로는 시위의 주동자였던 마셀린 알베르와, 사실상 알베르가 이끄는 아르젤리에 위원회(Comité d'Argeliers)와의 협상을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총리였던 클레망소는 사로의 협상 제안을 "내가 남부 놈들을 잘 아는데, 결국 놀자판으로 끝나기 마련이라고!"(Je connais le Midi, tout ça finira par un banquet!)라는 비웃음 섞인 농담과 함께 거부했고, 6월 10일까지 사태가 가라앉길 기다렸으나 결국 사태는 곧 전국을 휩쓸 정도로 격화되고 말았다.

그리고 6월 11일, 뒤늦게서야 클레망소는 사로를 매개로 삼아, 저명한 사회주의자이자 아르젤리에 위원회와 끈이 닿아 있던 나르본 시장 에르네스트 페룰하고의 협상을 시도했으나, 이미 전날인 10일에 클레망소 내각에 대한 항의표시로 시장직을 사임한 페룰은 "우리 뒤에 있는 300만 명은 협상하지 않을 거요."(Quand on a trois millions d'hommes derrière soi, on ne négocie pas.)란 말과 함께 거부했다.

결국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격화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클레망소는 6월 17일 남부 지역에 군대를 내려보내 무자비하게 진압한 뒤, 내무차관인 사로에게 국가헌병대를 동원하여 시위 참가자들을 모조리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나, 사로는 이를 거부하고는 내무차관직을 사임하기에 이른다.

인도차이나 총독으로서[편집 | 원본 편집]

그렇게 내무부 차관 자리에서 사임하고, 사로는 공화사회당아리스티드 브리앙 내각에 전쟁부 차관으로 입각한 뒤, 1910년까지 재직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911년 11월에 사로는 인도차이나 총독으로 발령받게 되는데, 이는 당시 조제프 카요 내각에서 인도차이나 지역의 무장봉기 가능성에 대한 염려로 행한 인사로, 당시 정부가 폴란드계 안토니 클로부코우스키 총독 이후로 제대로 된 총독 임명을 하지 않아 총독 대리들이 난무하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오래간만에 떨어진 정식 총독 임명이었다.

그리고 사로는 왜 자신이 인도차이나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는지 이해하고 있었고,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유신제를 예방함으로서 식민지인을 존중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실질적인 초대 총독이었던 폴 두메르의 강압적 식민통치 노선을 온건화하는 작업에 들어갔는데, 먼저 기초 교육을 널리 확대하여, 많은 식민지인들에게 교육의 혜택을 받게 하고, 베트남어의 새로운 표기법(쯔꾸옥응으)을 제정하고 널리 보급하면서 문맹률을 줄이는 데 힘썼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프랑스인 파견 관료들이 독점하고 있던 총독부의 관직의 문호 역시 개방하여, 베트남 현지 관료도 총독부 고위 관료로 출세할 수 있도록 제도에 손을 보았다.

또 박물학자인 조르주 그로슬리에(George Groslier)를 후원하여, 캄보디아 지역의 문화와 예술을 보전하는 데 크게 공헌하고, 지금의 캄보디아 국립 박물관의 설계와 건설에 총독부 예산까지 배정하는 등의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사로의 개혁 결과 인도차이나 지역의 문맹률은 획기적으로 감소하고, 총독부에 고용된 현지 엘리트들은 프랑스 식민당국에 충성을 아끼지 않아, 당분간 식민지 정국은 안정될 수 있었다. 카요 내각이 의도한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런 사로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에 따른 사고에 근거한 것으로, 사로는 식민지인들의 사고방식이나 관습, 제도 등이 프랑스화되기 이전까지는 개화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개화되기 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이런 사로의 사고방식은 1912년, 안남의 고등 판무관[1]이었던 조르주 마에(Georges Mahé)의 사원 및 황릉 도굴 사건의 처리에서 드러났는데, 사로는 마에의 폭주를 제지하면서도 자신의 훈령을 어긴 마에에게 제대로 된 처분이나 견책을 내리지 않았다.

이러한 사로의 위선적인 행보는 일반 식민지인들은 물론, 식민당국과 협조해야 할 안남과 통킹 보호령의 유신제 조정까지 실망시키기에 이르렀고, 이는 판보이쩌우베트남 국민당 결성과, 유신제가 참여한 1916년 베트남 봉기를 초래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

하여튼 그렇게 1913년 11월에 1차 총독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사로는, 1914년 6월에 조각된 공화사회당르네 비비아니 내각의 문교부 장관으로 입각했으나 대전쟁이 터지고, 아리스티드 브리앙을 수상으로 삼은 거국내각(Union Sacrée)이 수립되면서 사임하게 된다. 그리고 1916년 베트남 봉기 이후, 그 뒷수습을 위해 사로는 다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1919년까지 다시 총독으로 재임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사로는 인도차이나 지역의 점진적 독립 계획을 발표하는 등, 2번째 총독 임기의 많은 부분을 현지 민심을 달래는 데 할애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사로는 총독부 산하의 비밀경찰 기관인 인도차이나 보안국(Surété Générale Indochinoise)을 창설하여, 프랑스 식민당국의 통치에 방해가 될 만한 사상과 사회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부터 사로는 호치민과 필담으로 논쟁하면서 언급했듯 공산주의를 경계하기 시작했고 이는 후일 사로가 페탱파의 친위 쿠데타에 참여하는 등의 극우적인 행보를 보이는 데 일조했다.

전간기 거물 정치인으로서[편집 | 원본 편집]

수많은 내각조각(組閣)과 붕괴 사이에서[편집 | 원본 편집]

식민지장관 1기[편집 | 원본 편집]

그렇게 2번에 걸친 인도차이나 총독 직책을 수행한 사로는 중앙정계에 식민지 정책 전문가로 인식되었고, 곧 알렉상드르 밀랑의 단기간 내각에서 식민지 담당 장관으로 입각한다. 이때 사로는 프랑스 식민지들에 대한 발전 및 개발 계획을 내각에 상신하게 되는데, 이는 식민지인들을 대상으로 한 기초적인 복지 제도와 기초교육 제도의 도입을 골자로 하는 것으로, 요컨대 식민지인들을 위한 교육기관이나 기초적인 생계를 지탱할 부를 지원함으로서 식민지 산업에 통솔력과 인재를 공급하고, 이를 통해 블록 경제의 파이를 키우겠다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리고 사로는 이에 대한 홍보 목적으로 1922년 마르세유 식민 박람회를 지원했으며, 물류 이송 등에 필수적인 철도건설을 주도했는데, 대표적으로 콩고-대서양 철도(Chemin de fer Congo-Océan)가 사로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로의 제안은 당시 프랑스의 재정 상태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특히 정치적 측면에서는 사정이 더더욱 좋지 못했는데, 당시 프랑스 정계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우익 성향의 청회색 의원(Chambre bleu horizon)[2]과의 공조로 유지되던 우익 무당파 ~ 급진당 내각으로서는 사로의 식민지 지원 정책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정부나 자본가들로부터 대규모 자본 수급이 되지 않으니 사로의 계획은 점점 비효율적이고 난잡한 환상에 가깝게 변해갔고[3] 가뜩이나 현지 사정에 무지했던 식민지 관료들은 환상에 가까운 사로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인간 사냥을 통한 강제 노동과 강제 이주, 식민지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동원하는 노역 등과 같은 잔혹한 수단들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매우 참혹했다. 사로주의의 대표적인 치적인 콩고-대서양 철도의 건설에만 13년이 넘게 걸렸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현지인 노동자들을 1930년대 프랑스 식민지부에서 집계한 결과, 무려 15,000명에서 23,000명이 희생되었다는 통계가 나올 정도로 처참했던 것이다.[4]

결국 이런 이유들로 사로의 새로운 식민지 정책 제안과 계획들은 내각과 의회, 그리고 시민들의 집단적인 비토를 받고 대부분 좌초되고 만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후 내각들은 식민지 정책 전문가인 사로를 계속 식민지 담당 장관으로 유임시켰고, 1924년에 3기 레몽 푸앵카레 내각이 붕괴되기 이전까지 사로는 식민지장관으로서의 직위를 유지하게 된다.

내무장관 1기[편집 | 원본 편집]

그리고 2년 후인 1926년 7월 18일, 사로는 현재 옥시타니 주(Région)의 오드 지역구 보궐선거에서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당선된 지 5일 만에 4기 레몽 푸앵카레 내각의 내무장관으로 입각하고 1928년까지 장관으로 봉직하는데, 사로가 내무장관으로 입각하고 있던 1927년 10월, 우크라이나국의 군사 독재자였던 시몬 페틀류라가 우크라이나계 유대인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사무일 슈바르츠발트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페틀류라 군벌이 자행했던 수많은 유대계 우크라이나인 학살과 우크라이나 무정부주의자의 거물이자 페틀류라의 적이었던 네스토르 마흐노의 비참한 말년에 슈바르츠발트가 분노해 저지른 짓이었다. 이런 점이 참작되어 슈바르츠발트는 1년여의 재판을 걸쳐 풀려났으나, 이는 슈바르츠발트를 소련 비밀경찰로 여기고 있던 프랑스 극우세력이 준동하는 수많은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거기다가 앞서 인도차이나 총독 재임기에서 서술했듯 공산주의를 죄악시하는 제국주의자였던 사로는 1927년에 알제리에서 소비에트의 코민테른이 반식민주의 운동을 선동해 프랑스를 무너뜨리려고 한다면서 "공산주의가 바로 적이다!"라고 주장하여 프랑스 내의 중도파와 좌파의 반발까지 불러 일으키고 만다.[5]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1928년, 푸앵카레 총리가 개각을 시행했을 때, 사로는 저명한 청회색 의원이자 포슈 원수의 후견인으로 알려져 있던 앙드레 타르디외에게 내무장관 자리를 내줘야 했다.

해군장관 1, 2기[편집 | 원본 편집]

이후 11기 아리스티드 브리앙 내각과, 1기 앙드레 타르디외 내각 등의 단기 내각을 걸쳐, 1930년에 급진당 우위의 1기 카미유 쇼탕 내각이 들어서자 사로는 해군장관으로 입각했지만, 앙드레 타르디외가 이끄는 민주동맹 등의 정당들이 급진당 내각을 비토함에 따라 사로는 겨우 9일만에 허무하게 해군장관 자리를 내놔야 했다. 하지만 9개월 후, 2기 타르디외 내각이 붕괴하면서 다시 급진당의 테오도르 스테그를 총리로 삼는 급진당 우위 내각이 구성되었고, 사로는 다시 한번 해군장관으로 입각한다. 그 과정에서 사로는 자신의 대자인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을 밀어주면서 해군 예산을 증액시켰지만, 또 1개월만에 내각이 다시 붕괴되면서 사로는 또 다시 자리를 내놓아야만 했다.

식민지장관 2기, 해군장관 3기[편집 | 원본 편집]

그리고 1932년, 급진당 우위의 3기 에두아르 에리오 내각이 들어서고, 사로는 다시 식민지장관으로 입각하게 되는데 이때 사로는 식민주의의 영광과 구속(Grandeur et servitude coloniales)이라는 제목의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책을 집필했다. 이 책에서 그는 1920년대의 식민지인들의 문명화에 대한 낙관 대신 공산주의에 맞서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식민지 개발론을 주장했는데, 여기서 사로는 이전까지의 자유주의적 견해를 모두 버리고 아프리카인의 본성이 게을러서 그렇다는 인종론을 내세워 자신의 실책을 변명했다.[6]

그러면서 사로는 1920년대에 이어 다시금 식민지에 대한 공공지출의 증가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당시 에리오 내각은 대공황 때문에 사로의 제안을 받아들일 형편이 되질 못했고, 결국 대공황으로 인한 부채 문제 때문에 내각이 붕괴되고 만다. 그리고 이런 사로의 제안은 조제프 폴 봉쿠르 내각과 1기 에두아르 달라디에 내각을 거쳐서도 통과되지 못했고, 결국 사로는 1933년 9월 2일 개각 때, 같은 당의 알베르 다리미에(Albert Dalimier)에게 식민지장관 직책을 이임하고 해군장관에 재취임하게 된다. 결국 사로의 구상이 받아들여진 것은 사로가 내무장관으로 입각하고 있던 1934년이었는데, 이때 프랑스가 지배하던 식민지 내부 사정이 경제 불황과 심각한 강제 노동으로 인해 발생한 수많은 노동쟁의들 때문에 굉장히 불안한 형국에 놓이고, 영국이 한발 앞서 식민지발전법안과 기금, 그리고 제국관세블록 등의 정책들을 입안하자, 프랑스 정부도 식민지를 안정시키기 위한 방책으로서의 식민지인에 대한 투자를 더는 미룰 수 없게 되었기에 이루어진 일이었다.[7]

하여튼 사로는 최후의 사회공화당 총리를 배출한 조제프 폴 봉쿠르 내각에서 해군장관을 겸임하게 되었고, 이 해군장관 자리는 사로가 식민지장관 직책을 사임하고 난 뒤에도 에두아르 달라디에 내각과 사로 그 자신을 수상으로 삼는 내각까지 계속 유임되었다.

단기내각의 총리[편집 | 원본 편집]

총리 1기[편집 | 원본 편집]
총리 2기[편집 | 원본 편집]

페탱의 쿠데타에 합류하다[편집 | 원본 편집]

말년[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한자로는 중기흠사(中圻欽使)라고 불림
  2. 청회색(Bleu horizon)은 당시 프랑스군 군복의 색으로 제1차 세계대전 참전자 출신의 의원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3. 당대의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자문위원이자 전직 장교인 페르낭 베르나르(Fernand Bernard)는 자신의 저서인 L'indo-chine: Erreurs Et Dangers(인도차이나:오류와 위험)에서 이런 사로주의식(Sarrautisme) 정책이 거대한 공공지출만 요구할 뿐, 지역색과 인구의 감안도 없고, 마땅한 예비조사와 측량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집행되고 있다는 것을 매우 날카롭게 지적했다.
  4. 이마저도 크게 축소되어 발표된 것으로, 후일 제임스 P. 도튼(J. P. Daughton)의 연구의 추정에 따르면 약 30,000명에서 60,000명의 현지인들이 강제노동에 희생되었다는 결과가 나올 정도였다.
  5. 재미있게도 사로는 인도차이나 총독 시절부터 최후에 이르기까지 반식민주의 운동이란 본질적으로 오롯이 공산주의라는 외부적 요소에서 파생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6. 하지만 이는 각주에서 인용한 페르낭 베르나르의 저작에서 '사로주의'의 문제점이라고 언급되듯이, 당시 프랑스령 아프리카 식민지의 인구 밀도가 낮았고, 주민 중 상당수는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공사와 이후 대농장 운영에 필요한 노동력을 동원하는 것은 극히 어려웠다는 점을 사로가 식민지 당국의 행정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 과소평가한 것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프랑스 식민지의 강제 노역 문제는 더욱 심화되고 만다.
  7. 그러나 이런 식민지 공공지출의 증가는 되려 식민지 피지배민들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키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그 공공지출이 융자의 형태로 주어져 자연히 식민지의 부채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고, 대공황이 겹쳐 그 부담이 더욱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로주의식 공공지출을 두고, 프랑스의 사학자인 C. 코크리 비드로비치(Catherine Coquery-Vidrovitch)는 그녀가 다른 학자들과 함께 공저한 저작인 Histoire de la France Coloniale(프랑스 식민지의 역사)에서 "우리는 이 시대에 잘 알려진 현상이 탄생한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것은 제3세계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원조와 부채의 악순환이고 이는 그때 이후 증가 일로에 있다"라고 비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