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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2003년 완공된 신 등대가 선박을 안내하고 있으며, 옛 등대는 인천광역시 [[등록문화재|시도유형문화재]] 40호로 지정되어 쉬고 있다.
현재는 2003년 완공된 신 등대가 선박을 안내하고 있으며, 옛 등대는 인천광역시 [[등록문화재|시도유형문화재]] 40호로 지정되어 쉬고 있다.
==일제의 원형훼손==
현재 자리하고 있는 구 팔미도등대의 원형이 훼손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등대 건립 당시인 1903년에는 벽돌과 석조로 된 건물이었으나 [[러일전쟁]]이나 불명의 사건으로 등대가 훼손되자 일제가 1910년 등대의 보강 대신 아예 헐어버리고 [[콘크리트|공구리]]를 쳐 버린 것. 이 경우 현존하는 당시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한국 최초의 등대는 1904년에 최초 점등을 한 인천항 들머리의 [[부도등대]]가 차지하게 된다.<ref>[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61565.html “지금의 팔미도 등대, 한국 최초 아니다”]</ref> 물론 그렇다고 하여도 이 등대의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 [[인천상륙작전]]의 백신호 ==
== [[인천상륙작전]]의 백신호 ==

2015년 10월 2일 (금) 11:04 판

틀:등대틀:문화재

개요

한반도 최초의 등대

1876년 체결한 강화도 조약에 따라 인천항이 개항했지만 리아스식 해안의 영향으로 인천만에는 도처에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는 항만을 항행하는 선박들에게 매우 위험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조일통상장정에 따라 항로표지를 조정할 의무가 있었고, 인천만을 항행하는 선박들에게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한반도 최초의 근대식 등대인 팔미도등대를 건설했다.

현재는 2003년 완공된 신 등대가 선박을 안내하고 있으며, 옛 등대는 인천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40호로 지정되어 쉬고 있다.

일제의 원형훼손

현재 자리하고 있는 구 팔미도등대의 원형이 훼손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등대 건립 당시인 1903년에는 벽돌과 석조로 된 건물이었으나 러일전쟁이나 불명의 사건으로 등대가 훼손되자 일제가 1910년 등대의 보강 대신 아예 헐어버리고 공구리를 쳐 버린 것. 이 경우 현존하는 당시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한국 최초의 등대는 1904년에 최초 점등을 한 인천항 들머리의 부도등대가 차지하게 된다.[1] 물론 그렇다고 하여도 이 등대의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천상륙작전의 백신호

인천만의 복잡한 해안선과 조류는 인천상륙작전을 고려하던 연합군 사령부의 골칫거리였다.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인천만 중앙에 위치한 팔미도등대의 점등이 필요했다.

사령부는 작전 5일전인 9월 10일에 팔미도에 인원을 잠입시켜 등대의 상태를 알아보게 했다. 당시 팔미도등대는 전혀 운영이 되지 않는 상태이었기에, 혹시나 점등에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경우 작전 시일 연기를 불러올 수 있었고 최악의 경우 작전을 개시할 수 없게될 처지였다. 점검 결과 전기배선 1곳이 절단되어 있는 것 이외에는 문제가 없었고, 연합군은 이를 수리하여 14일 자정에 팔미도의 밤을 밝혔다.

연합군 상륙부대는 팔미도등대의 신호를 따라 인천항으로 항했으며, 그 결과 6.25 전쟁의 판세가 뒤바뀌게 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