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하

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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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초상화
인물 정보
출생 1919년 7월 16일
조선 강원도 원주군 원주면 봉산리
(현재 대한민국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사망 2006년 10월 22일 (87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국적 대한민국
학력 도쿄고등사범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종교 유교
배우자 홍기
가족 최양오, 母 이응선
아들 최종석, 최윤홍
최종혜
대한민국의 제10대 대통령
임기 1979년 12월 6일 ~ 1980년 8월 16일
국무총리 신현확 (1979~1980)
박충훈 (1980)
전임 박정희 (제9대)
후임 전두환 (제11대)

대한민국의 제10대 대통령이다. 국무총리 출신 대통령이자, 제4공화국의 2번째 대통령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최측근 김재규에게 권총으로 암살당한 뒤 동년 12월 21일 유신헌법에 의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1979년 12월 12일에 일어난 전두환, 노태우가 주모자였던 12·12 군사 반란으로 인하여 결국 하야하게 된다.

최규하 전 대통령의 일대기가 실려 있는 기사

최규하 대통령 사임

각주

대통령 이전의 삶

최규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경성 제일 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를 나와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의 고등학교는 19살에 입학해 20살에 졸업했다. 이는 대학의 예과 과정에 해당하는 최고의 엘리트 과정이다. 동경제국대학에 가기 위한 준비 과정의 동경 제일고등학교와 중등학교 교사 양성 목적의 동경고등사범학교에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모였다. 최규하 역시 영어 교사가 되기 위해 일본에 유학했다고 추정한다. 이때 최규하의 동기생들은 비밀결사를 만들었지만, 학업 외에 시국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최규하는 가담하지 않았다. 최규하는 동경고사를 졸업한 후 만주국 관리로 임용되어 경험을 쌓았다가 해방된 후 외교 분야 공무원의 길에 입문했다. 최규하는 박정희 정권 당시 정일권, 김종필과 함께 정의 2인자로 자리 잡았다. 박정희 시대 말기에 최규하는 권부에서 김재원과 차지철과 김재규가 서로 갈등을 일으켜도 상관하지 않고 행정부의 총리로서 묵묵히 일을 수행했다. 최규하는 10.26이라는 정치적 돌발 사태로 갑작스럽게 대권의 자리에 올랐다.

대통령 되기까지의 과정

최규하 총리와 신현확 부총리 등 관료 그룹은 박정희를 도와 유신체제를 이끌고 온 네 집단 중 하나였다. 이들은 박정희 정권 당시 도구적 역할이었지만 사후 국정 운영을 직접 담당했다. 그러나 이 집단은 대중적 지지나 조직적 기반을 갖지 못한 채 이 정치적 상부구조만 장악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박정희 사후 최규하는 대통령 당선에서 유력한 후보가 아니었다. 당시 김종필은 박정희 체재 내에서 언제나 ‘제2인자’로 존재해 왔고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한 김정렴에 의하면 박정희는 후계자로 김종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중요한 일은 대통령 자리를 누군가 이어받는 일이었고 만약 김종필이 출마했다면 최규하가 출마하더라도 당선이 유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종필이 출마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 정치적 권력자들이 김종필을 반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서도 군부 지도자들이 김종필의 출마를 반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또한 최규하 대통령 대행, 내각, 군이 최규하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김종필의 정치적 부상을 불편해했다. 당시 주요 현안은 10.26 이후 거의 매일 열리는 비상시국 대책 회의에서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 대신 후임 대통령을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즉,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고 그 대통령이 잔여 임기를 채우지 않고 새로 제정되는 헌법에 따라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정부를 이양하도록 하고, 대통령 후보로는 최규하 권한대행을 내세운다는 것이었다. 최규하는 출마 제안에 강력히 반대하고 여러 차례 고사도 했지만 결국 이들에게 떠밀려 대통령 출마를 받아들였다. 결국 최규하는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김종필이 대통령 선거 출마를 포기하게 한 TK 세력은 최규하를 대통령으로 내세워 김종필의 정치적 부상을 견제하는 데 성공하면서 이후의 정국 전개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원정부제 추진

최규하-신현확 체제는 강력한 대중적인 지지기반이나 권력 자원을 갖지 못한 과도내각으로 출범했다. 이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구체제에서 내부의 통치 엘리트 간의 협력 때문이었는데, 신현확은 최규하라는 명분이 필요했고 최규하는 신현확이라는 실리가 필요했다. 최규하의 집권 이전엔 유신 체제였는데, 이 체제는 박정희의 개인 통치 체제로서 작동헀다. 이런 개인적인 체제는 개인이 사라짐과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지만 모든 방식은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즉,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끌어갈 대안적 정치 주체가 마련되기 어려웠다. 10.26 이후 최규하-신현확 체제가 마련되면서 TK가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지만, 박정희 없는 유신 체제는 근원적으로 불안정했다. 즉 개헌을 통해 새로운 체제를 마련해야 했다. 최규하는 처음엔 권력 의지 없이 등 떠밀려 대통령이 되었지만, 점차 자신의 역할을 과도정부로 이끄는 것을 제한하지 않았다. 최규하-신현확 체제에서는 정부가 개헌의 주도권을 갖고 싶어 했고, 유신 체제에 대한 대안적 체제로 이원정부제 개헌을 추진하고자 했다. 이는 최규하와 신현확이 이끄는 TK 세력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통치 형태였다. 외교 관료 출신인 최규하 대통령은 외교 등 대외 문제를 담당하고 내치와 관련된 실질적 권력은 신현확 총리가 TK 주도 내각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할 부담은 최규하, 신현확 모두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10.26 이후 정치적 자유화가 회복되면서 일반적으로 논의되었던 개헌의 방향은 유신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최규하 대통령이 정부 주도로 헌법을 연구하겠다고 한 것은 다른 의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특히 최규하의 연설문을 보면 이들은 이원정부제 개헌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최규하 대통령의 정치 일정과 헌법 개정에 대한 언급은 시간이 가면서 뉘앙스가 달라진다. 10.26 직후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최규하가 한 특별연설(1979.11.10.)에서 자신의 역할을 과도적인 것으로 분명히 정의한다. 한 달여 뒤 1979년 12월 21일의 10대 대통령 취임사는 국회의 개헌 논의와 무관하게 자신의 정부가 개헌을 주도할 의사가 있음을 시사한다. 이후 1980년 1월 18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최규하는 구체적인 개헌의 방향에 대한 언급한다. 이 연설에서 4.19 이후 최규하는 마련된 헌법을 비판하지만 당시엔 내각책임제를 채용하겠다는 국민의 공통적인 감정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최규하는 내각제에 대한 분명한 거부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이미 취임사에서 밝힌 대통령 주도의 헌법 개정 방식을 국정자문회의 설치, 헌법 개정심의위원회 구성 등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또한 최규하는 대통령제로의 개헌도 원하지 않았다. 결국 최규하는 내각제뿐만 아니라 대통령제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뚜렷이 했다. 여기서 최규하가 의도했던 것은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며 체제의 지속 상징이 될 국가원수로서의 대통령과 일상적 정책 집행의 책임을 맡는 행정수반으로서의 총리를 구분하는 이원정부제였다고 볼 수 있다.

최규하-신현확 체제의 갈등

정부 주도 개헌을 통해 권력을 나누고자 했던 최규하-신현확 체제에는 갈등적 관계도 나타났다. 최규하가 대통령이지만 당시 정국을 이끌어 나가는 힘은 TK 세력을 대표했던 신현확이 가졌다. 최규하는 신현확의 힘의 기반 위에서만 움직일 수 있었지만 세력을 확대하는 것에 불만을 갖거나 위협을 느꼈다. 신현확 주변에서는 신현확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1980년 2월 중순, 신현확은 최규하에게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민간인을 임명하자고 제안하였지만 최규하는 의견을 수용하지 않고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1980년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했다. 국무총리 등이 반대의견을 개진했음에도 최규하는 의도적으로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했다. 그 이유는 최규하는 신현확의 의견을 그 요직까지 장악하려는 것으로 간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규하는 전두환을 임명하여 신현확을 견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규하는 전두환을 활용하여 신현확과 TK 세력을 견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최규하는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직을 허용함으로써 호랑이를 불러들인 셈이 되었다. 최규하는 전두환을 임명할 당시 신군부의 정치 개입 가능성을 전혀 우려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의 임명이 갖는 의미는 권력 찬탈의 과정에서 중요한 요직을 장악했다는 것이지만 동시에 최규하-신현확의 균열과 갈등을 의미하기도 했다. 대중적인 지지기반을 갖지 못한 최규하나 신현확 모두 권력의 기반이 안정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체제가 이어진 이유는 궁정 내부의 통치 엘리트 간의 협력 때문이었다. 이런 협력 관계를 제도화하려 했던 것이 이원정부제적 제헌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미묘한 갈등으로 균열이 생겼고 세력을 갖지 못한 최규하는 전두환을 불러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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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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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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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1956)
3·15(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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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제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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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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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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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년도)
제1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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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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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당선자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
취소선은 무효 선거, 탄핵, 기울임체는 간접 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