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공화국

제3공화국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제2공화국이 사라진 후, 과도기적 통치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기존 내각책임제대통령 중심제 및 국민의 직접선거를 골자로한 제5차 헌법개정 이후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 정권을 의미한다. 이 헌정체제는 이른바 10월 유신으로 불리는 제7차 헌법개정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개요[편집 | 원본 편집]

5.16 군사정변의 과업을 완수한다는 명목으로 헌법의 효력까지 정지시키며 초월적 권한을 행사한 국가재건최고회의제5차 헌법개정을 통해 대통령 중심제와 국민의 직접선거를 확정하였다. 이후 치뤄진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제4대 대통령 출신의 윤보선과 군부 출신 민주공화당박정희가 격돌했다. 투표결과 박정희는 46.6%를 획득해 45.1%를 획득한 윤보선에게 1.5%의 매우 적은 득표율 차이로 겨우 승리했다. 두 후보의 표차는 15만 6026표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는 한국의 대통령 선거사상 가장 적은 표차였다. 이로서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차지한 박정희는 국민투표라는 정당한 절차를 거쳐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제3공화국 시대가 열렸다.

1967년 대선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출마하였다.

1969년에 삼선개헌을 했다. 기존 헌법은 중임이 가능했는데 세 번까지 연임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정권의 지속성을 도모하는 권위주의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과 접전을 벌였다.

정치[편집 | 원본 편집]

김종필이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실권을 행사했다. 당시 검찰보다 중앙정보부의 수사권이 우위인 등 중앙정보부의 권력이 막강했다. 김종필은 민주공화당 창당의 주역이기도 하다. 김종필은 기존의 정치인에 대해 배제적 조치를 취했다. 기존 정치인의 공민권(정치 참여 권리)를 박탈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공화당은 김종필의 노력과 달리 나머지 정당을 압도하는 패권정당이 되지 못했다. 이후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 의석비율이 급격히 감소하는 등의 현상이 나타났다. 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선 민주당의 지역 하부 조직이 활성화되어 있어 민주당 조직의 해체가 어려웠다. 때문에 방향을 바꿔 공민권을 다시 회복시키는 등 민주당을 회유하는 전략을 취하게 된다.

또한 공화당이 내적으로 단결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김종필 계열과 반김종필 계열이 대치해서 주요 사안에서 분열했다. 예를 들면 당 사무국 강화 여부 논의에서 김종필은 사무국 강화 입장인데 반김종필계열은 김종필계열이 사무국을 장악할 것이라 예상하고 사무국 강화에 반대했다.

그리고 공화당은 인기영합주의적 정책보다 자본의 요구를 들어주는 정책을 폈다. 노동자를 달래는 정책은 펴지 않았다. 이런 이유 등으로 공화당이 압도적 패권정당이 되지는 못했다. 이런 배경에서 신민당이 부상했다.

사회[편집 | 원본 편집]

3공화국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시민사회와 정부가 충돌한 대표적 사건이 한일국교정상화 교섭에 대한 시위였다.

경제[편집 | 원본 편집]

취임 이후, 박정희 정권은 무엇보다도 낙후된 대한민국의 경제를 끌어올리는 데 국력을 집중했다. 제2공화국 시절 계획되었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본격적으로 실행하였다.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결과로서 산업의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도로항구, 공항 등의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여 전국 1일 생활권의 기치를 실현하려 노력했다. 이후 지속적인 경제 개발 정책 및 간척 사업 과 식물 품종 계량으로 농업 생산 증대에도 기여했다.

외교[편집 | 원본 편집]

남북 관계[편집 | 원본 편집]

한미 관계[편집 | 원본 편집]

한중 관계[편집 | 원본 편집]

한일 관계[편집 | 원본 편집]

제1공화국부터 한국은 일본이 수탈한 인적 물적 자원을 배상하라는 입장이었다. 반면 일본은 역청구권 논리를 제기해 왔다. 이는 한반도에 살던 일본인의 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말한다. 입장 차이로 한일국교정상화가 미뤄지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이 회담 재개 압력을 가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을 동맹기지로 해 방위부담을 일본과 나누기를 원해서였다.

청구권을 둘러싸고 일본은 경제협력방식으로 회담을 타결하겠다 생각했다. 한국에 자본재를 주고 청구권 요구를 포기시키자는 것이다. 일본 오히라 외상과 김종필이 만나서 한 오히라-김 메모에는 자금을 일본이 제공하는데 이 자금의 명목은 설명되어 있지 않다. 한국은 배상을 받았다 해석하고 일본은 개발자금 혹은 독립축하자금으로 해석하게 된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평가[편집 | 원본 편집]

긍정적[편집 | 원본 편집]

부정적[편집 | 원본 편집]

사건/사고[편집 | 원본 편집]

이 시기를 다룬 대중매체[편집 | 원본 편집]

1993년 2월 7일부터 1993년 8월 1일까지 문화방송에서 방영하였던 드라마이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