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박정희
Parkjunghee pic.jpg
공식 초상화
인물 정보
출생 1917년 11월 14일
조선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1]
사망 1979년 10월 26일 (62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안가
국적 대한민국
학력 육군대학교
정당 민주공화당
배우자 김호남, 이현란, 육영수
가족 박성빈, 母 백남의
아들 박지만
박재옥, 박근혜, 박근령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
임기 1963년 12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
국무총리 최두선 (1963~1964)
정일권 (1964~1970)
백두진 (1970~1971)
김종필 (1971~1975)
최규하 (1975~1979)
전임 윤보선 (제4대)
후임 최규하 (제10대)

박정희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호는 중수(中樹)이다. 본관은 고령 박씨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젊은 시절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가 만주국 신경군관학교(신징, 현 중국 장춘 소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일본 육사를 학사편입을 통해 입교, 57기로 졸업하였다. 졸업후 만주국 육군 제8단에 임관과 함께 배치되어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장교로 근무하였다. 이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친일파로 규정했지만,[2]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파 목록에서 제외하였다. 이 일은 그의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언급되게 된다. 광복 후인 1946년 7월에 광복군 소속으로 귀국하하여 늦은 나이에 육군사관학교(당시명칭은 조선경비 사관학교)에 입교한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 좌익운동에 투신하던 형님 박상희 씨가 대구사건[3]에 휘말려 사망하자, 남로당 측의 제의로 남조선로동당에 입당, 여수·순천 사건이 발생하자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이 구형되었으나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일본 육사 출신 백선엽(당시 계급 대령)[4]에게 한번 도와달라고 말한 것이 인연이 되어 백선엽이 적극적인 구명운동을 벌이게 되었고 이후 만주군계 선후배 인맥들이 가세하여 남로당에 가입은 하였으되 활동을 한 것이 별로 없고, 수사에 협조적이었단 이유를 들어 감상적 공산주의자에 불과하니 석방하자는 의견을 군내 좌익숙군 책임자인 특무대 장교 김창룡(당시 헌병 대위)이 제출했고 죽이기에 아까운 인물이란 판단을 받아들여 국방부, 미국의 승인을 거쳐 이승만의 서명을 얻어 불명예제대로 그쳤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알고 있던 남로당원들의 명단을 모두 바쳤다. 흔히 이것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이라 언급되지만 실제론 큰 의미가 없었다. 그리하여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어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강제 예편되었으며 월급이 압류되었고 이때문에 동거중이던 여성마저 떠나버리는등 고난의 연속이었다.(참고로 이때당시 첫번째 부인 김호남 씨와 이혼상태) 하지만 백선엽 대령이 이때 그의 생활을 돌봐주었다. 백선엽 장군 은 그 답례로서 3공화국때 우방국 대사등을 역임하는 등의 보은을 받기도 하였다. 백선엽의 주선으로 군문관(오늘날의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훗날 군사정변의 동지이자 친인척이 되는 김종필 씨를 만나기도 했다. 그런데 다시금 박정희 에게도 기회가 찾아오는데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그는 곧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복귀하였다. 이후 1953년 11월 준장이 되었고, 1954년에는 제2군단 포병 사령관, 1955년 제5사단 사단장, 1957년 제6군단 부군단장과 제7사단 사단장을 거쳐 1958년 3월 소장으로 진급한 뒤 제1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으며, 1959년에는 6관구 사령관이 되었다. 1960년에 군수기지 사령관, 제1관구 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제2군 부사령관에 이른다.

한국 전쟁 기간에도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혼란은 여전하였으며 이를 보고 자체적인 쿠데타를 획책했지만 4.19 혁명이 일어나서 그만두었다. 첨언하자면, 아이러니 하게도 당시 군부는 미국에 의해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장교단으로 구성되었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집단중 하나였다.OMG! 거기다가 미국의 벤 플리트 장군의 지지도 있기도 했고.

4.19 혁명 이후 허정의 임시내각이 집권, 이후 윤보선 대통령의 제 2공화국이 들어섰으나 사회적 혼란은 계속되자 박정희는 접어두었던 쿠데타 계획을 다시 꺼내들어 육군사관학교 8기를 중심으로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켰다. 박정희는 이후 장도영 장군을을 포함한 이른바 알레스카 토벌작전(반혁명 사건)을 통해 군부내 반대파를 숙청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올랐다가 4성장군으로 최종 예편후 민정 이양약속을 실현시키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윤보선 전 대통령과 접전을 벌이며 승리하여 제 5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을 역임하게 된다.이 과정에서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60~70년대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다. 한국의 경제는 이 시기 매년 2자리 수의 경제 성장을 이룩했으며, 현대 한국 경제의 기초가 되는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논란이 많다. 그는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집권을 추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을 탄합하였고, 물리적 정치적 테러 역시 개의치 않았다.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결국 이로말미암아 인권외교를 주창한 미국 카터정부와의 불화와 중화학 공업 몰빵으로 인한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경제가 집권 말기에 악화되기 시작하는 악재가 겹치게 되었고, 그로인해 YH무역 사건과 이를 도화선으로 부마항쟁이 시작된다. 이른바 유신 공화국의 종말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결국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차지철 등과 함께 부마항쟁 진압에 대하여 논의하던중 5.16 혁명 동지이자 육사 동기인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쏜 총탄에 의해 암살당했다.[5] 유언은 "난 괜찮아."였다고 한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이유에 대해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으며, 그는 저격 후에도 자신의 본거지인 중정이 아니라 육군본부로 향함으로써 더욱 의문을 낳았다. 결과적으로 김재규는 이에 대하여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나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그리 한 것이었다. 아무런 야심도 어떠한 욕심도 없었다." 라고 증언하였을 뿐이었다.[6] 이후 박정희장례식은 1979년 11월 3일 국장으로 치러졌다.

딸인 박근혜는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평가[편집 | 원본 편집]

긍정적인 평가[편집 | 원본 편집]

물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윤보선이 만든 것은 맞지만[7], 그것을 성공적으로 진행시킨건 박정희이다. 또한 국민건강의료보험 제도도 만들어 외국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고, 검소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 외 업적은 녹화사업을 펼쳐 민둥산이었던 한국의 산들을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게 했다. 무엇보다도 경제 발전이 긍정적인 업적 중 하나로 손꼽힌다.

군사독재를 통해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라는 박정희 최대의 실수가 있었지만 긍정적인 평가로 인해 어느 정도는 상쇄되었다. 군사독재는 잘못한건 맞지만 당시 혼란스러웠던 사회를 바로 잡았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는 한편 군사독재 자체가 그 동안의 업적을 싹다 지워버렸다는 평가도 있다.

부정적인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우리는 아직까지 박정희의 그늘 아래 있다.
—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92년판

현재 대한민국에서의 박정희 대통령의 평가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이다. 과거 일제강점기 때 친일 행적, 광복 후에 남로당 가입, 5.16 군사정변으로 세운 정부의 정당성, 유신헌법 등 통치 행위의 정당성, 그리고 70년대의 경제 발전 등이 주된 논쟁의 대상이 된다.[8]

흔히 현대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주요 업적을 꼽지만 그게 오롯이 박정희의 힘으로 일군 것도 아니고[9][10][11] 사실상 그 업적을 10월 유신으로 다 말아먹었다. 그는 군사독재를 통해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점에서 비난을 피할 수 없으며 여성 편력이 복잡하다는 점도 논란 거리다. 또한 군사를 이용해서 정권을 찬탈 했다는 점은 6.25 전쟁 당시 북괴군이 남하하여 대한민국을 빼앗으려 했다는 점과 동급으로 볼 수 있다. 무엇이 다를까?

박정희 정권 당시는 젊은 층들이 누리는 문화를 정서를 해친다는 명목을 내세워 검열 했다. 정서를 해할 우려가 있다는 건 핑계고 사실상 젊은 층들을 우민화 시키기 위한 통제의 수단으로 문화를 탄압한 것이다. 당시, 미니스커트 단속, 장발 단속, 외국노래 방송 금지, 만화책 검열 등이 이뤄졌다. 중국의 죽의 장막과 같은 일이 민주국가 라고 하던 당시 대한민국에서 있어서는 안될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지역감정 조장, 일본 식민 배상금의 배분, 소득 불평등 심화, 도시로의 인구 쏠림, 박근혜 빨리빨리 문화, 군필자 우대, 경찰 공무원의 인권 침해 등 현대 한국사회의 문제는 박정희 시절에 시작했다고 봐도 된다.

집권 말기에는 부마항쟁 등 전국 곳곳에서 시위가 터져나왔는데 이에 대하여 너무 온건하게 나간다고 김재규를 비난했으며 반항하는 자들은 모조리 전차로 밀어버려야 된다고 주장한 차지철의 주장에 동조하며 김재규를 더욱 더 압박했다. 차치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도 100~200만 명 죽인다고 별 일 있겠냐고 주장했고 박정희는 이에 대하여 자신이 직접 발포명령을 내릴 것이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발언하여 이를 독려하였다. 실제로 실행하기 전에 김재규가 두 사람을 사살하였기에 대규모 학살은 벌어지지 않았으나 박정희가 국민을 어떻게 여겼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박정희는 자신에게 명예로운 죽음을 선사한 김재규한테 감사해야 한다. 실행했다면 전두환과 동급의 취급을 받는다.

대한민국 역대 최장기 집권을 한 대통령이다.

국가주도의 자본주의인 국가자본주의를 추구했다.

비교되는 인물[편집 | 원본 편집]

산업화를 이뤘다는 점에서 비스마르크와 스탈린과 비교받는 경우가 있다. 박정희식 경제 정책은 계획 자본주의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개발동원체제는 위로부터 사회를 조직하고 재편하며 아래의 '동원'을 이끌어내는 체제이다. 국가가 단순히 정책 집행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 경제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사회를 재편하면서 특정한 방향으로 선도하는 역할을 한다. 사회에 대한 일종의 국가적 '기동전'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국가가 사회의 반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사회에 대한 역작용하는 체제이다. 근대로의 이행기에 나타났던 독일의 비스마르크 체제, 사회주의적 발전 전략을 구사했던 스탈린 체제, 한국의 박정희 체제,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경제체제, 현재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 타이완의 장제스 체제등이 여기에 포함된다.[13]
— 조희연[12],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5·16에서 10·26까지, 12~13쪽

게다가 누구는 박정희가 지지층을 끌어 오르기 위해 경제 발전 정책, 유신헌법 제정, 새마을 운동 같은 정책이 포퓰리즘적이라는 점에서 후안 페론과 비교하기도 했다.[14]

또 그가 비난을 피할 수 없는 비난은 한일 수교를 굴욕적으로 졸속적으로 맺었다는 점이다. 당시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기 시기를 벗어난 지 불과 20여년 이였으며 일본의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본이 한국을 계속 깔본다는 것이다.

사건사고[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현재 대한민국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
  2. 이걸 가지고 박정희 반대세력은 "박정희는 친일파다." "독립운동가를 죽였다." 고 하고, 지지세력은 "국가에서는 박정희는 친일파로 규정하지 않았다." "민족문제 연구소는 사설조직이라서 뭔가 문제있는 조직이다."라고 말한다. 이 만주국 장교 근무 문제는 아직까지도 뜨거운 감자이다. 친일인명사전 박정희 항목 전문(PDF내려받기) - 민족문제연구소
  3. 대구 폭동이라는 서술이 있었는데 일단 이 사건은 국가에서는 10월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고 "항쟁"이냐 "폭동"이냐 하는 역사평가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다.대구 10월사건 진실화해보고서
  4. 이 사람은 명백한 친일파로, 실제로 간도특설대에 근무해서 독립운동가 토벌에 나선적이 있었다! 심지어 창시개명도 시라카와 요시미치라는 당시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에 죽은 일본군 장교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5. 인터넷 상에서는 김재규가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는 발언과 함께 쏘았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김재규는 "차지철 너 이새끼 건방져"라는 말과 함께 차지철을 먼저 쏘고 그 다음 박정희를 쏘았다. 김종필 전 총리의 증언에 의하면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한 말은 "야, 너두 죽어봐"였다고.
  6. 박정희 반대파는 김재규를 유신의 심장을 쏘아서 민주주의를 수호했다고 추모하는 사람도 있지만, 지지층들은 이것은 김재규가 차지철 때문에 욱해서 죽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7. 윤보선은 경공업 위주였다.
  8. 참고로 박정희의 정책이 포퓰리즘적이라는 이야기가 제기되고 있다. 그래서 임지현 학자는 그가 유신헌법이 서구식 민주주의에 물든 비판적 지식인들을 물리치기 위해 국민투표를 쓴 포퓰리즘 정책이라고 했다. 게다가 그는 경제 정책 또한 포풀리즘적이라고 했다.
  9. 비록 현재 태극기부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연령대지만 그 어르신들의 노고도 기억해야 한다. 박정희 1인의 힘으로 일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10. 박노자, 박정희 시대, ‘기적’은 없었다, 한겨레, 2015.04.14.
  11. 사실 한국의 경제 성장은 JFK의 경제 원조 정책 덕택이라는 이아기가 있다.
  12. 나중에 서울특별시교육감이 되는 그 조희연이 맞다.
  13. 이에 대해 우파 만화가로 유명한, 경제만화를 썼던 이원복 교수에 따르면, 일본의 근대화와 산업화의 모델이 독일제2제국 비스마르크 정부의 이른바 기술 관료 주도형 경제를 참조하고 기시노부스케로 대표되는 일본경제관료들은 여기에 만주국 산업화와 공업화를 위해 스탈린의 5개년 계획을 참조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독일제국의 헌법에 관심이 있었다고 했지만(소위 대전 전의 그 형식적 법치주의 헌법), 사실 한국의 경제 발전 정책은 처음 장면 정부가 내세웠으며 박정희는 그저 지지층을 끌어내기 위해 이를 가지고 이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 경제 개발 정책은 JFK의 해외 원조 정책으로 해택 얻은 건데 박정희가 했다는 식으로 포장 했다고 한다.
  14. http://kang.tistory.com/m/26
헌정체제 제1공화국 제2공화국 제3공화국 제4공화국
대선
(년도)
제1대
(1948)
제2대
(1952)
제3대
(1956)
3·15(1960)
제4대(1960)
제5대
(1963)
제6대
(1976)
제7대
(1971)
제8대
(1972)
제9대
(1978)
제10대
(1979)
당선자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헌정체제 제4공화국 제5공화국 제6공화국
대선
(년도)
제11대
(1980)
제12대
(1981)
제13대
(1987)
제14대
(1992)
제15대
(1997)
제16대
(2002)
제17대
(2007)
제18대
(2012)
제19대
(2017)
제20대
(2022)
당선자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
취소선은 무효 선거, 탄핵, 기울임체는 간접 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