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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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663년])는 한반도의 고대 국가로, 고구려, 신라와 함께 삼국의 하나이다.

개요[편집 | 원본 편집]

백제는 성왕 16년(538년)에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천도하며, 남부여(南扶餘)라는 국호를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백제의 국호에 관하여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와 고려시대에 기록된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이 상이하여, 어느 쪽 기록이 정확한지는 정의할 수 없다.

온조왕을 시조로 하여 기원전 18년 현재의 한강 하류의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해 건국되었다. 《삼국지》에는 백제가 마한의 일부였다고 한다. 1세기에서 3세기에 걸쳐서 한반도 중부의 소국들 및 한사군과 대립하면서 성장하였으며 4세기부터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근초고왕 때는 전라도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고 북쪽으로의 진출, 고구려와 대립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5세기 초부터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아신왕이 직접 항복을 하기도 하고 개로왕이 전사하는 등 수난을 당하였다. 그리고 475년에는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기도 하였다.

이후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맞섰으며, 성왕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 유역을 다시 상실하였으며, 관산성에서 전사하였다. 그것도 소수의 병력만 끌고 와서……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고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어 멸망하였으나 멸망을 부흥 운동이 끝날 시기인 663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백제의 문화는 대체로 세련되고 섬세한 것이 특징으로, 이러한 백제의 문화는 등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건국과 초기 발전[편집 | 원본 편집]

건국 이전에 백제 영토에는 마한이 있었다. 마한은 진한, 변한과 같이 수많은 소국들의 연맹체였는데, 삼한중에서도 가장 강력하여 마한의 목지국은 "진왕"이라 불리우며 삼한 전체에 왕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기원전 18년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들 온조비류가 신하들을 이끌고 마한에 도착하였는데, 온조는 한강 유역의 위례성에 장착하고 비류는 인천에 장착하였다. 온조는 자신의 국가를 십제라 하였고 번성하였으나, 비류의 땅은 물이 짜고 늪지대가 펼쳐저 있어 농사를 짓기 어려워서 쇠퇴하였다. 결국 비류는 십제를 침공하였으나 패배하였고, 자살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비류의 땅은 십제에 병합되었고, 온조는 십제의 새로운 이름을 백제라 하였다.

당시 백제는 마한 중에서 딱히 영향력이 있다고 할 수 없어서, 다른 마한 소국들의 견제 아래 수도를 시도때도 없이 옮기는 등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러나 3세기 들어서는 백제도 서서히 발전하기 시작했고, 3세기 중엽에는 고이왕 하에 한강을 침공하려던 한사군 세력을 막아내고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249년에는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해 가야와도 국경을 맞닿게 되었고, 마한의 소국들을 야금야금 흡수해 나가고 있었다. 한사군과의 전쟁으로 북쪽으로도 진출해 경기도, 황해도 일대도 장악하였다.

근초고왕과 고구려와의 충돌[편집 | 원본 편집]

346년 근초고왕이 즉위하고 백제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369년 남아 있는 마한을 정벌하여 전라도 전역을 흡수하고, 366년에는 신라에게 접근하여 우호 관계를 맺게 된다. 칠지도를 왜왕에게 보낸 것도 이 무렵이다.

369년 고구려고국원왕이 백제를 침공하였는데, 백제는 이를 격퇴하였다. 371년에는 고구려를 역공하여 황해도 전역을 빼았고, 이 기세를 몰아 평양까지 진격해 고국원왕이 전사하면서 고구려는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1년 뒤인 372년에는 중국 진나라과 처음으로 교류를 하였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패권을 휘두르는 백제였지만, 4세기 말 광개토대왕의 침략으로 패권을 차지한지 거의 30년 만에 판이 완전히 반전되어버린다. 396년에는 수도 위례성이 고구려 군대에 의해 포위당해 버리고, 함락당하지는 않았지만 이때 백제는 성을 58개나 빼았기는 등 막강한 피해를 입어 아신왕은 아예 스스로 고구려에게 복속을 해버린다. 가야와 왜와 연합하여 신라 침공을 꾀하지만 고구려에게 저지당하고, 오히려 고구려의 한반도에서의 패권을 강화시키는 일만 초래한다. 397년에 백제가 중국 요서를 지배했다는 기록이 《송서》, 《양서》 등 남조 기록에 등장하는데, 이렇게 고구려에게 털리는 동안 요서를 침공하기가 어려웠을 테고, 아마 이런 기록은 남조 입장에서 북쪽의 선비 계열 국가들을 까기 위해서 지어냈을 가능성이 크다.

475년에는 장수왕의 공격으로 인해 아예 위례성이 함락당하면서 한강을 잃게 되는데, 따라서 백제의 수도는 현재 공주시에 해당하는 웅진으로 옮겨진다. 이 일을 계기로 백제는 신라와 더 가까워지게 된다. 그리고 이 때부터 탐라가 백제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한다.[1]

중흥기와 쇠퇴기[편집 | 원본 편집]

5세기 후반 및 6세기 초의 동성왕무령왕, 성왕 때에는 백제가 중흥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동성왕 때는 신라와의 연합을 강화하고, 493년 때는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성왕 때는 수도를 사비성으로 옮긴다(538년). 왕권을 강화하고,이때 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일시적으로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면서 부여에 대한 정통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는데, 아마 똑같이 부여에서 떨어져 나온 국가인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마침 이때 고구려에 왕위 계승 싸움이 일어나면서 국가가 혼란기에 접어들었는데, 이를 틈타 551년 백제 신라 연합군은 한강 유역을 침공하여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신라는 백제의 뒤통수를 치고 한강 유역 전체를 장악하는데, 553년까지 백제와 신라는 분쟁을 겪다가 결국 성왕이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한강은 신라 휘하에 들어오게 된다.

7세기 무왕 대에 다시 중흥하는 모습을 보이나 다음 대인 의자왕당나라와의 외교를 끊어 버린 탓에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660년 멸망하게 된다.

멸망과 부흥운동[편집 | 원본 편집]

660년 중국 당나라신라가 백제를 침공하였다. 백제는 전통적인 동맹국 를 끌어들여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660년 7월 18일 의자왕이 사비성에서 항복하면서 백제는 멸망하게 된다. 전쟁 시작한지 1년도 채 안되어 처참하게 멸망해 버린 백제였고, 그에 따라 부흥운동도 끝나지 않았다.

일본으로 도주했던 백제 태자 부여풍이 백제 옛 땅으로 복귀하면서 부흥운동이 가속화되었고, 현재의 충청남도 서천군에 위치한 주류에 기지를 설치하고 위례성을 포위하는 등 나름 강하였고, 200여개의 성을 회복하고 4년 동안 저항을 했지만, 까지 동참한 백강 전투에서 당-신라 연합에게 참패한 뒤 이 부흥운동은 완전히 진압당하였다.

역대 국왕[편집 | 원본 편집]

여담[편집 | 원본 편집]

대륙백제설[편집 | 원본 편집]

일부 학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료를 통해 백제의 본거지는 중국 대륙에 있었다는 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 백제는 후에 점점 강하고 커져서 작은 나라를 병합하고 그 나라가 본래 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는데 진나라 때 구려가 이미 요동을 점령하고 백제 역시 요서.진평의 2군을 점령하고 백제군이다. 《양서》 백제전
  •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함께 있었으며 그 후 고구려는 요동에 있었으며 백제는 요서에 있었고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불렀다. 《송서》 권 97
  • 금주, 의주, 애훈 등지가 모두 백제이다. 《만주원류고》
  • 북위가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패하였다. 백제는 진대부터 요서와 진평 2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자치통감
  •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한 병사가 100만 명이나 되어 남쪽으로는 오월을 침범하였다. 《삼국사기》 최치원전

주류 학계에서는 백제의 전성기 시절 중국 해안가에도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는데는 이견을 보이고 있지는 않다.

백제는 강력한 해양국가였고, 중화 대륙 동해안에 영향을 끼치고 일시적으로 영토를 점거할 만큼의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백제의 본거지가 대륙에 있었다는, 대륙백제설을 지지하기에는 고고학적 근거가 절대적으로 미약하다.

전라도 드립[편집 | 원본 편집]

일간베스트 저장소 등 대한민국의 각종 극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전라도 지역민을 비하하며 백제와 연결지어 풍자하는 일이 간혹 있는데, 전라도는 백제의 영지 중 일부였을 뿐 전성기와 쇠퇴기를 통틀어 어느 순간에도 전라도가 백제의 중심지였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백제는 건국 초기 한성백제 시절 서울특별시를 도읍으로 하며 현재 대한민국 수도권을 중심지로 두었고, 한성이 함락되어 웅진으로 천도한 후에는 현재 충청남도 공주시부여군 일대를 중심지로 두었다.

각주

  1. 《삼국사기》 문주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