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켄왕후

쇼켄왕후
昭憲王后
인물 정보
본명 하루코
다른이름 결혼 전 본명: 이치죠 마사코
결혼 전 별칭: 후키기미(富貴君), 후미기미(富美君), 스에기미(壽榮君)
출생 1849년 4월 17일
교토부 교토시
사망 1914년 4월 9일 (향년 64세)
시즈오카현 누마즈시
국적 일본
직업 왕족(왕비)
종교 신토
배우자 메이지 일왕
가족 아버지 이치죠 타다카, 어머니 니이하타 타미코
양자 다이쇼 일왕, 며느리 데이메이왕후
손자 쇼와(히로히토) 일왕,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왕자,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왕자,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
활동기간 1867년 뇨고 책봉
1869년 왕비 즉위
1912년 대비 즉위

일본 메이지 국왕의 왕비. 오시루시는 와카바(若葉)이다.

출생과 어린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이치죠 타다카(一條忠香)의 3녀로, 어머니는 타다카의 측실인 니이하타 타미코(新畑民子)이다. 결혼 전의 이름은 마사코(勝子)였다.

이치죠 가문은 일본의 유서 깊은 귀족으로, 고노에(近衛)[1]ㆍ니죠(二條)ㆍ다카츠카사(鷹司)[2]ㆍ쿠죠(九條)[3] 가문과 함께 ‘고셋케(五攝家)’라고 불린다. 메이지유신 이후로 귀족 가문들은 서양식 작위[4]를 받았는데, 이러한 근대적 귀족을 화족이라고 부른다. 이치죠 가문은 공작 작위를 받았다.

지체 높은 가문의 딸이었던 마사코는, 형제들과 함께 가정교사 와카에 니오코(若江薰子)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한문과 와카(和歌)[5] 등의 전통문학뿐 아니라 서예, 그림, 다도, 꽃꽂이 등등 귀족들이 갖추어야 하는 교양도 배웠다. 마사코는 이 모든 것들을 잘 배워서 니오코로부터 호감을 샀고, 훗날 니오코는 마사코를 왕비 후보로 추천했다.

왕비 책봉[편집 | 원본 편집]

본래 고메이(孝明) 일왕에게는 2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장남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차남인 사치노미야 무쓰히토(祐宮睦仁) 왕자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고메이 일왕은 1867년 1월 천연두로 죽었고, 다음 달인 2월 13일에 무쓰히토 왕세자가 122대 일왕(메이지)으로 즉위했다. 동시에 일본 왕실에서는 메이지 일왕의 왕비 후보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왕실에서는 이치죠 가문과 쿠죠 가문에서 번갈아가며 왕비를 맞이하고 있었다. 고메이 일왕의 정실 에이쇼왕후(英照王后)는 쿠죠 가문의 딸 아사코(夙子)[6]였고, 따라서 메이지 일왕의 왕비는 이치죠 가문에서 선발할 차례였다. 이치죠 가문의 딸들 중에서 왕비로 뽑힌 사람은 마사코였다.

다만 마사코는 곧장 왕비로 책봉된 것이 아니라, 후궁 중에서 최고 등급인 뇨고(女御)로 책봉되어 입궁한 다음 왕비로 승격되었다. 이는 일본 왕실의 오랜 전통에 의한 것으로, 왕족의 딸이 왕비가 될 때는 곧장 왕비로 책봉되지만, 귀족의 딸이 왕비가 될 때는 뇨고 단계를 거쳐서 왕비로 책봉되어야 했다. 또한 이름도 ‘하루코(美子)’로 바꾸었고, 출생연도도 (서류상으로) 1850년생으로 고쳤다. 본래 하루코는 메이지 일왕보다 3살 연상인 1849년생이었는데, 당시 일본에는 ‘3살 연상은 좋지 않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1869년, 하루코는 정식으로 입궁하여 왕비가 되었다. 그 무렵 일본은 수도를 교토에서 도쿄로 옮겼고, 따라서 왕실도 도쿄로 옮겨졌다. 하루코 왕비도 고향인 교토를 떠나, 메이지 일왕과 함께 도쿄의 새로운 왕궁으로 이주했다.

근대의 왕비[편집 | 원본 편집]

당시 일본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서양 국가들과 접촉하고 교류하며 서양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오랫동안 막부(幕府)가 다스리던 체제가 무너지고 있었다. 동시에 그동안 장식에 불과했던 일왕이 통치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대정봉환, 메이지유신) 따라서 하루코 왕비도 이전까지의 전근대적 시대의 은둔적인 왕비들과 다른 모습, 즉 근대적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의생활과 식생활의 서구화[편집 | 원본 편집]

하루코 왕비는 서양 여성들처럼 남편과 부부동반으로 공식 석상에 참석했으며, 일본 여성 왕족 최초로 서양식 의복을 입었다. 서양의 왕족ㆍ귀족 여성들처럼 드레스,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티아라), 장갑, 부채, 목걸이, 훈장(勳章) 등으로 치장한 일본 왕비의 모습은 근대화의 상징이었고, 왕비를 따라 후궁, 공주, 귀족, 더 나아가 평민들도 서양식 의복을 입기 시작했다.

이렇게 양장(洋裝)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니, 자연스럽게 일본의 양재(洋裁) 기술과 보석 세공 기술도 점점 발전했다. 의생활뿐 아니라 식생활에서도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 하루코 왕비와 메이지 일왕은 커피 등의 서양 음식을 일상에서 즐겨 먹었다.

하지만 마냥 서양 문화만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어서, 상황에 따라 기모노도 입었고 일본 요리도 먹었다. 또한 일본의 전통 연극, 미술, 공예의 보존과 발전에도 힘썼다.

여성교육과 학문[편집 | 원본 편집]

의식주뿐 아니라 교육도 변화하여 근대적 학교제도가 시행되었고, 특히 이전까지 집안에만 있었던 여성들을 위한 학교도 신설되었다. 하루코 왕비는 도쿄여자사범학교[7]와 화족여학교[8]의 설립에 관여했고, 개교식에 참석했으며, 종종 학교를 방문하여 수업을 참관하고, 기부금을 내는 등등, 새로 시작되는 여성교육에 큰 관심을 보이며 후원했다.

또한 문학에도 소질이 있었던 그녀는 <금강석(金剛石)>, <물은 그릇(水は器)> 등의 와카를 지어 여학교에 하사했다. <금강석>은 ‘원석(原石)을 갈고 닦아야만 아름다운 보석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부단히 노력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내용을, <물은 그릇>은 ‘어떠한 형태의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물의 모양이 달라지는 것처럼, 사람도 좋은 벗을 사귀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대의 음악가들이 작곡한 곡조에 하루코 왕비의 와카가 결합되어 노래로 만들어졌고, 이 노래들은 일본 전국의 여러 여학교에서 널리 불렸다.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독려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루코 왕비 자신도 학문과 공부에 열성을 쏟았다. 그녀는 독서와 와카 창작을 즐겼으며, 시녀들과 함께 저명한 학자나 교육자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구호활동[편집 | 원본 편집]

한편 일본 정부의 이러한 근대화 정책들에 반발하는 무리들도 있었고, 전쟁까지 일어날 정도로 사태가 심각해지기도 했다. 1877년 규슈 지역에서 일어난 이 전쟁을 ‘세이난(西南) 전쟁’이라고 한다.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부상자들을 보살피기 위하여 1878년에 창설된 단체인 하쿠아이샤(博愛社)는 1886년 일본적십자사로 발전되었다.

하루코 왕비는 하쿠아이샤와 일본적십자사를 적극 후원했고, 거액의 기부금도 하사했다. 그녀의 활동은 후대에도 계승되어, 오늘날도 적십자사 관련 활동은 일본 왕실의 중요한 공무 중 하나이며, 왕비가 명예총재를, 왕세자비가 명예부총재를 맡고 있다.

또한 하루코 왕비는 나병 환자들의 구호, 치료, 복지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나환자 관련 활동들은 며느리 데이메이왕후가 이어받게 된다.

침략전쟁의 뒷바라지[편집 | 원본 편집]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점차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내며 주변국들을 침략하기 시작한다. 청일전쟁, 의화단 운동 진압, 러일전쟁 등등 각종 침략전쟁을 벌였고, 많은 일본군이 전투에서 부상당하거나 전사했다.

하루코 왕비는 왕족ㆍ화족 여성들을 지휘하여,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일본군을 뒷바라지했다. 의약품ㆍ위문품ㆍ의복 등을 마련하여 전쟁터에 보냈고, 직접 병원 등을 방문하여 부상자와 사상자들을 위문하기도 했다. 왕비가 앞장서니 자연스레 분위기가 조성되어, 지배층뿐 아니라 백성들까지도 동참하게 되었다. 일본적십자사 산하에는 간호부인회가 결성되어 왕족 여성들과 화족 여성들이 간호 훈련을 받았는데, 이방자 비의 외할머니 나베시마 나가코(鍋島榮子)와 어머니 나시모토 이츠코(梨本伊都子)도 간호부인회 회원으로 적극 참여했다.

나베시마 가문의 근거지인 사가현(佐賀縣)에서는 1901년 오쿠무라 이오코(奧村五百子)가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대처승의 딸인 이오코는 한국에 건너와 일본식 불교를 포교하는 한편 일본인들을 한국 땅에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녀의 이러한 활동에는 폭력 우익조직 고쿠류카이(黑龍會)[9]의 지원이 있었다.

불임과 양자[편집 | 원본 편집]

이렇게 하루코는 왕비로서 많은 노력을 했지만 딱 하나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바로 ‘불임’이었다. 그녀는 작은 체구에 몸이 약하여 임신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일본 왕실은 적자(嫡子)를 얻지 못하여 후궁 소생의 서자(庶子)가 왕위를 계승해왔고, 당시 일본에는 아직 서구식 일부일처제가 완전히 정착되지 못했기에, 그리 새삼스럽거나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메이지 일왕은 여러 후궁들을 거느려 5남 10녀를 낳았으나, 대부분은 1~2살 안팎에 병으로 죽었고 1남 4녀만이 살아남았다. 5남매 중에서 유일한 아들인 하루노미야 요시히토(明宮嘉仁) 왕자가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적모(嫡母)인 하루코 왕비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요시히토 왕세자는 오랫동안 하루코 왕비를 생모로 알고 자랐기에, 나이를 한참 먹은 후에야 자신에게 생모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요시히토 왕세자는 화족 쿠죠 가문의 딸인 사다코를 왕세자비로 맞이했다. 사다코 왕세자비는 건강한 아들을 4명이나 낳았고, 요시히토 왕세자와의 금슬도 좋았다. 때문에 요시히토 왕세자는 후궁을 두지 않고 아내에게만 충실했고, 이후부터 일본 왕실에도 일부일처제가 정착되었다.

죽음[편집 | 원본 편집]

1912년, 남편 메이지 일왕이 먼저 죽었다. 그의 시신은 도쿄에서 교토로 옮겨져 매장되었다. 한편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10] 장군과 그의 아내 시즈코(靜子)는 메이지 일왕의 뒤를 따른다며 자결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메이지 일왕의 뒤를 이어 외아들 요시히토 왕세자가 다이쇼 일왕으로 즉위했고, 며느리 사다코 왕세자비왕비가 되었다. 하루코 대비는 며느리에게 왕비의 임무를 물려주고 누마즈(沼津) 궁으로 물러나 조용히 지내다가, 2년 후인 1914년에 사망했다. 메이지 일왕의 묘에 합장되었으며, 메이지 일왕과 함께 메이지신궁에 신으로 모셔졌다. 시호(諡號)는 ‘쇼켄왕후’이다.

각주

  1.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의 장녀 야스코(寗子) 공주가 시집간 가문
  2. 쇼와 일왕의 3녀 다카노미야 가즈코 공주가 시집간 가문
  3. 쇼켄왕후의 며느리 데이메이왕후(사다코)의 친정.
  4.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의 5개 등급
  5. 일본의 전통 시(詩)
  6. 데이메이왕후에게는 고모이자 시할머니가 된다.
  7. 오차노미즈여자대학
  8. 가쿠슈인 여자중등과ㆍ여자고등과ㆍ여자대학의 전신
  9. 중국러시아의 국경을 이루는 흑룡강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러시아에서는 ‘아무르강’이라고 부른다.)
  10.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지휘관. 일본 왕족들과 화족들의 학교인 가쿠슈인의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