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철도 역사에 관련한 연표
1800년대
- 1877년
- 2월 : 수신사 김기수, 일동기유에서 일본 철도 시승기 소개
- 1894년
- 7월 : 주미 대리공사 이하영이 귀국시 철도 모형도를 가져와 고종에게 관람시키면서 철도의 필요성을 주장
- 8월 1일 : 청일전쟁의 발발로 일본은 서울-인천간 군용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철도기사를 보내 철도부지를 사전 답사하게 함
- 1896년
- 3월 29일 : 조선 정부, 경인철도의 부설권을 미국인 제임스 R. 모스에게 특허
- 7월 3일 : 조선정부, 경의철도의 부설권을 프랑스 피브릴르사에게 특허
- 7월 17일 : 농상공부에서 국내철도규칙 7조를 제정하여 공포함. 이 때 궤간을 4척8촌5푼(1435mm)의 표준궤로 정함
- 1897년
- 1898년
- 5월 10일 : 모스, 경인선을 경인철도인수조합에 양도(당시 금액으로 1,702,452원 75전)
- 6월 3일 : 박기종이 부산-낙동강 하단에 이르는 부하철도 부설권을 취득
- 7월 6일 : 농상공부에 철도사를 설치함. 이후 철도사는 철도국으로 개정됨
- 9월 : 광궤였던 국내 철도의 5척 궤간을 다시 4척8촌5푼의 표준궤로 환원
- 9월 8일 : 경부철도합동조약의 체결로 경부선 부설허가
- 1899년
1900년대
1910년대
1920년대
1930년대
1940년대
1950년대
- 1950년
- 6월 25일 : 한국전쟁 발발로 전시 수송체제로 전환하고 수송본부를 설치, 비상차량을 동원
- 7월 20일 : 딘 장군 구출결사대 열차가 세천-대전 사이에서 피습되어 김재현 기관사 등 승무원 3명이 사상, 미군 30여명이 전사
- 8월 3일 : 구미역, 약목역, 왜관역 철수와 동시에 왜관-약목간 낙동강철교 폭파
- 10월 8일 : 부산-서울간 철도 완전개통으로 복귀, 철 열차 운행(112열차), 서울, 용산지구 철도기관 완전 수복
- 1951년
- 1952년
- 1953년
- 1954년
- 1955년
- 1956년
- 1957년
- 3월 9일 : 함백선 영월-함백간 22.6km구간이 개통, 이후 이 구간의 대부분은 태백선의 기반이 된다.
- 7월 5일 : 한강교량 복선 C선 복구공사 완성으로 개통식, 동시에 기존에 먼저 복구되었던 A, B선의 노후로 틀:날짜/출력까지 C선만을 사용하였다.
- 8월 30일 : 특급 통일호 종전 운행시간 9시간을 7시간으로 단축
- 11월 10일 : 직통열차 26개 편성에 지정좌석제 실시
- 1958년
- 1959년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각주
- ↑ 대한제국정부를 의미
- ↑ 정확히는 가영업운전임
- ↑ 실제 통감부의 개청은 이보다 조금 뒤인 틀:날짜/출력이다.
- ↑ 수원 인근
- ↑ 현재의 장춘
- ↑ 광복 당시 철도 현황은 영업거리 6,362km, 기관차 1,166대, 객차 2,027량, 화차 15,352량, 역 수는 762개소였다. 이 중 남한 철도의 현황은 총연장 3,738km, 영업거리 2,642km, 기관차 488대, 객차 1,280량, 화차 8,424량, 동차 29량, 역 수는 300개소였다.
- ↑ 당시 사설철도의 길이는 표준궤구간 416.5km, 협궤구간 125.3km였다.
- ↑ 6.25 전쟁 철도 피해상황 : 터널 4,935m(6%), 선로 329,480m(7.5%), 신호 및 보안장치 20%, 급탄설비 38개소(40%), 전기신호장비 56%, 역건물 41%, 공장설비 27%, 기관차 51%, 교량 9,351m(12%), 노반 100,000m(3%), 급수시설 26개소(25%), 전신전화시설 50%, 전력설비 56%, 선로 부대건물 39%, 자재 80%, 객차 50%, 화차 34%
- ↑ 전란 중 UN군이 사용하다 휴전후 ICA 원조계획에 의해 이양됨
- ↑ KTX 13호
- ↑ KTX 46호
- ↑ 인명을 역명으로 표기한 최초 사례
- ↑ 인천국제공항 ~ 김포국제공항
- ↑ 대전 ~ 김천 ~ 구미 ~ 동대구
틀: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