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선

경인선
나라 대한민국
종류 일반철도(간선)
번호 301
구간 구로 ~ 인천
영업거리 27.0 km
역 수 21개
소유자 대한민국 정부 (국가철도공단 위탁)
운영자 한국철도공사
개통일 1899년 9월 18일
시설 정보
궤간 1,435 mm (표준궤)
선로 4 (구로 - 동인천)
2 (동인천 - 인천)
전기 교류 25 kV, 60 Hz, 가공전차선
신호 ATS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역인천광역시 중구 인천역을 잇는 헬게이트 복복선 간선철도. 길이 27.0 km로 1974년 이래로 수도권 전철 1호선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철도이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철도부설 쟁탈전[편집 | 원본 편집]

18세기 말에 전 세계적으로 보급이 확산된 철도교통은 1880년대 말에 본격적으로 조선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 시초는 1876년 2월 26일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체결 이후 같은 해 4월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김기수 예조참의가 1877년경 당시 막 개통된 도카이도 본선신바시역~요코하마역까지의 구간을 타보고 화륜거(火輪車)라 표현해 저서인 일동기유에 소개한 것이었다.

이후 1882년 4월 한미수호조규(韓美修好條規)에 따라 1887년 주미조선공사 박정양을 수행한 이하영이 1889년 대리공사로 기국하면서 미국에서 이용한 철도의 모형을 구입해 들여와 고종 황제와 대신들과 함께 도입의 필요성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94년 7월 갑오경장(甲午更張)이후 관제개혁과 함께 의정부(議政府) 산하 공무아문에 철도국을 설치하고 참의 1명과 주사 2명을 배치하고 도로 측량작업을 실시해 본격적으로 철도부설에 관한 논의를 하게 되었다. 1885년 의정부 산하 공무아무과 농상아문을 통합하여 농상공부로 개편함에 따라서 농상공부 산하 조직이 되었다.

지금도 인천항부산항은 대한민국의 양대 물자 관문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그 당시에도 두 도시는 바다와 바로 연결되어 있는 탓에 수도와 연결할 철도의 필요성이 가장 먼저 논의되었고 구한말 한반도를 노리던 수많은 열강들의 표적 중 하나가 된다. 그리고 경인선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착공되고 먼저 개통된 철도 노선이 되었다. 이것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어촌에 불과했던 인천이 대도시로 성장한 이유이기도 하다.[1]

당시 조선의 철도부설권과 광산개발권은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수많은 강대국들이 따먹기에 여념이 없었다. '구한국외교문서 제10권 993호'에 내용에 따르면 앞서 1892년 4월 고종 황제는 미국인 모어스(James R. Morse)를 초청하여 이완용, 이하영 등에게 경부철도 건설 조건에 대해 협의하고 모어스가 부설자금을 출자해 부설하고 25년 내 자금을 회수하며, 5개의 금광 개설권을 허가하도록 했으나 정병하 등 일부의 강경한 반대로 무산되자 모어스는 왕복 여비, 출장중 사업상 손해 등 은화 10,000냥에 달하는 손해 배상금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

일본 또한 필사적으로 움직여 이미 1885년 일본인 마쓰다 코조(松田行藏)가 수 년 동안 조선을 답사해 교통과 경제 상황을 파악했던 전력이 있었고 1892년에는 일본인 철도전문 기사가 경부 간의 경로 답사후 부산 주재 일본 영사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 이후 1894년 8월, 일본은 철도건설에 관한 권리를 조선에서 못박아 버리기 위해 조선 정부 내정의 개혁을 희망하며, 이를 위하여 경부, 경인 간에 부설 철도 권리는 조선정부가 재정적 여유가 없음을 감안하여 일본 정부 또는 일본의 기업이 시기를 보아 기공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한일잠정합동조관(韓日暫定合同款)을 강제 체결시키기까지 이른다.

상황은 미국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면서 고종과 세자가 아관파천을 감행하면서 일본의 영향력이 잠시 약해지게 된 것, 미국은 이 틈을 타서 1896년 3월 29일 경인선 철도에 대한 부설권을 얻어냈고, 모어스는 다시 이 바닥에 복귀했다. 철도부설에 관한 권리는 모어스에게 부여되는 대신 특허 1년 내에 착공하고, 전쟁 등의 비상사태가 아닌 이상 3년 이내에 반드시 완공할 것, 완공 후 15년이 경과하면 한국 정부는 전체를 매수할 수 있으나 매수하지 못할 경우에는 특허권을 10년 더 연장할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모어스가 경인선의 부설권을 얻는 데 성공하자 다른 강대국들의 움직임도 빨라져서 압박이 더욱 거세졌고, 프랑스의 피브릴(Fives-Lille) 상사 징징서울~원산간, 서울~의주간, 서울~홍성간 철도 부설을 요구해서 결국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얻어내는 등의 일이 있게 된다.

  • 제1조 국내 인민 왕래와 물품출입의 편리함을 위하여 국내 각 지방의 철도를 설치함
  • 제 2조 국내 각 지방철도의 척량(尺量)을 균일케 하여 이쪽 지방의 윤차(輪車)가 다른 지방에서도 지장 없이 통행케 함
  • 제 3조 국내 각 지방철도의 넓이를 외국의 현행 표준에 따라 부설 선로 간의 간격을 영국식 거리(英尺) 4척 8촌 반으로 확정함
  • 제 4조 관립(官立)한 철도기차의 왕래인 표값과 출입문 운반비는 농상공부대신이 정함
  • 제 5조 본국인이나 외국인이 철도회사를 국내 각 지방에 설치할 시에도 이 규칙을 일체 준행하고 표값과 운반비도 농상공부와 협의해서 결정함
  • 제 6조 철도세칙은 농상공부대신이 추후로 정함
  • 부칙-본령은 반포일로부터 시행함
1896년 7월 15일 대한제국 정부 칙령 제 31호 철도규칙

1896년 7월 15일 칙령 제 31호로 철도규칙이 제정됨과 동시에, 궤간에 대한 문제도 논의되었다. 초기에는 표준궤로 정해졌다가 1896년 아관파천에 따라 러시아의 영향력이 세지면서 시베리아 철도와 연결되게 1,524 mm 광궤로 변경되었다가 1898년 7월 6일 농상공부 산하에 설치된 철도사는 최종적으로 1898년 9월 철도궤간을 다시 표준궤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는 케이프궤로 철도를 부설한 일본 또한 무시하지 않고 한국 내 철도를 표준궤로 건설했다.

우여곡절 끝에 경인선 철도의 건설 특허를 얻어내는 데 성공한 모어스였지만, 일본은 계속된 공작으로 끈질기게 괴롭혔다. 건설권이 체결되자마자 일본은 1894년 한일잠정합동조관에 위배된다는 주장을 들이대 계약이 무효라고 주장했고, 마침내는 한국에 곧 난리가 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미국인 투자자들이 발을 빼게 만들었다. 덕분에 처지가 곤궁해진 모어스는 일본은행에서 융자를 빌려야만 했고, 공사 완료 후 경인선에 관한 권리를 일본에 양도하도록 계속 회유하는 한편, '경인철도인수조합'을 구성하여 부설권 매수 공작을 하는 등 갖은 노력을 한다.

점점 지쳐가던 Morse는 공사 완료 후 철도를 일본에 넘긴다는 조건으로 공사를 진행했으나 조합과의 의견충돌과 일본인들의 끈질긴 간섭에 경인선을 완전히 포기하고 이후의 건설권과 소유권은 일본에 넘어가게 된다.

착공과 개통[편집 | 원본 편집]

탁포((坼浦, 현재의 답동)의 물가를 매립하여 인천역(당시 제물포역)을 건설하려는 계획이 시작부터 난항을 겪으면서 착공이 지 지연되었다. 토지의 소유자인 일본인 지주 2명의 반발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뒤로 만석동 방면의 토지 소유자였던 독일인 Wollter와 초대 인천해관 세무사였던 영국인 stripiig, 일본인 2명 등 4명이 자신들의 사유지를 기부하는 것을 제공하자 노선을 우회하여 전환국과 응봉산을 우회한 현재의 인천역 위치를 정하게 된다. 뒤늦게 협상에 응하겠다고 한 일본인 두명의 요구는 거부당했다. 가까스로 특허조건의 특허일(1897년 3월 27일)로부터 1년 이내 착공 조항을 만족시켜 1897년 3월 22일 우각동 역터에서 기공식을 거행, 공사를 시작했다. 당시 촬영 사진에 따르면 기공식에 참여한 한국 사람들의 복장은 전부 흰 옷을 입고 있는데, 이 시기의 조선은 명성황후의 국상 기간이었기 때문.

1898년 1월 29일자 미국 뉴욕의 신문 《Harper's Weekly》에 따르면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코리아에서 미국인이 철도를 건설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소개하면서 주말에 이미 개통된 구간을 트롤리를 통해 이동하는 사진, 노반 공사 현장의 사진 또한 소개하고 있다.

일본의 공작으로 사업이 계속 방해 되었지만 전체 30개월의 건설 기간 중 80%에 달하는 25개월이 미국인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이런 덕분에 한국 최초의 역인 인천역(당시에는 제물포역으로 불리며, 현재의 제물포역과는 다르다) 사의 모습은 전형적인 미국 역의 모습을 따르고 있으며, 레일 또한 미국의 lllinois 철강회사의 것을, 최초로 달린 기관차 또한 미국 Brooks 사의 모갈 탱크(Mogal), 심지어는 한강 철교의 철재 또한 미국제를 사용하고 있었다. 애초에 일본에서 자급 가능한 철강재 자재가 당시엔 없다시피 했기도 했지만, 영국, 독일제 자재를 전혀 쓰지 않은건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력으로 읽을 수 있다.

한참 동안의 갑론을박 끝에 1898년 말에 끝내 모어스로부터 부설권을 완전히 받아낸 일본은 1899년 4월 23일 인천에서 다시 기공식을 열고(...) 나머지 5개월 동안 공사를 진행했다. 당시의 기록으로도 상당히 급속한 공사였는데, 부설권의 기한이 1900년 3월 29일로 임박해 왔고 동절기 동안은 사실상 공사가 불가능했기에 공사가능한 일정이 지극히 촉박했기 때문이다.

공정의 최후단계인 한강철교의 부설이 장마철 홍수 덕분에 지연되자 노량진역부터 제물포역(제물포역은 현재의 제물포역이 아니라 인천역과 같은 위치이다. 실제로 인천역으로도 불렸다. 현 동인천역인 축현역(杻峴驛, 역명의 유래는 '싸릿재'에서 왔다), 우각동역(牛角洞驛, 이름의 유래는 말 그대로 쇠뿔고개이며 1906년 4월 폐역), 부평역(富平驛), 소사역(素砂驛, 현재의 부천역), 오류동역(梧柳洞驛), 노량진역(鷺梁津驛)[2]까지의 구간을 1899년 9월 18일에 선 개통시키고 운행을 개시했다. 1899년 9월 19일자 독립신문의 내용은 철도 개업식을 위하여 인천에서 화륜거가 떠나 영등포로 와서 내외 귀빈을 모시고 오전 9시로 향하는데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를 진동하고 기관차의 굴뚝 연기는 하늘로 솟아오르더라, 창밖을 바라보니 산천초목이 내달리는 듯하고 나는 새도 따르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당시에는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던 것이다. 요금은 상등석 1원 50전, 중등석 80전, 하등석 40전으로, 오늘날의 기준으로 하등석이 최소 12,000원 정도나 되니 보통 사람들이 쉽게 이용하기는 부담스러운 액수.

개통 당시의 표정속도는 약 시속 20kph, 총 소요시간은 1시간 40분이나 걸렸지만 자전거를 타고 가도 이 정도로 갈 수 있다 지금의 같은 구간은 급행열차로 50분이면 가면 된다.

한강철교의 준공[편집 | 원본 편집]

공사가 지연되던 한강철교1900년 7월 5일 개통됨으로써 한강 남북이 직접 연결되었다. 이후 7월 8일 북쪽 구간인 용산역, 남대문역(현 서울역 위치), 경성역(1905년 3월 24일 서대문역으로 변경되었으며 3.1 운동의 집결지가 된 후에 폐지되었다.) 까지의 구간을 완공했다.

한강철교 건설의 비화라면, 모어스는 한강철교의 양 교대와 중간의 제1, 제 2, 제 9교각 3개를 준공하였는데, 일본은 양 교대만 남겨놓고 중간 교각 3개를 돌연 철거해 버린다. 일본측의 기록은 모어스가 건설한 교각이 조악하여 쓸 수 없는 수준이어서 재시공을 실시하였다고 언급하고 있으나 그것이 명확한 사실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알기 어렵다. 다만, 본래 한강철교 우측에 폭 4자의 인도를 가설한다는 계획이 있었고, 이 계획 또한 폐지해 버렸으므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중의 성장[편집 | 원본 편집]

일제강점기에 돌입한 이후 1920년대에 이르러서 인천은 경성에서 가장 가까운 해양 항구이자 관광지로서 주목을 받게 되고, 영등포, 소사(현재의 부천), 부평 등의 연선지역도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여객 이용이 증가 추세를 띄었으나, 교량 등의 시설이 빈약하여 고출력의 대형기관차 투입이 제약을 받고, 그에 따라 일반형 객차 투입이 어려워 수송력 증가에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30~40톤에 달하는 일반객차에 비해 최대한 경량화한 22.3톤의 경량객차를 도입하여 이에 대응하였다.[3] 이 경량객차는 이후 경인선의 표준열차로서 장기간 사용되고, 이후 경의선 등의 구간열차에도 투입되는 등 근교열차에 가까운 용도로 사용되었다.

1930년대 이후 경성과 인천의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가 발달하면서 양 도시간의 지역 개발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30년대 국제정세가 요동침에 따라 경인권 일대의 공업화가 본격 추진되고 이를 지탱하기 위한 철도수송력의 개발이 요구되게 되었다. 이런 동향에 발맞추어, 조선총독부는 경인선의 복선화를 추진하기 위한 예산 80만 원을 1937년 최초로 배정하였으며, 또한 철도국 내에 전기과를 신설하면서 경인선의 전철화 계획도 수립하였다.[4]

이후 1939년에는 철도국 내에서 본격적인 전철망 개발의 일환으로 확대 추진되어, 심지어 남대문을 지나 조선은행 앞 까지의 지하철 직결운전도 구상에 두고 있던 것이었다. 당시의 검토에서는 직류 3000V기반으로 2칸 1편성의 전동차를 20개 편성을 투입하여 20분 마다 발착하는 고빈도 운전을 실시하며 경인간을 40분만에 주파하겠다는 구상이었다.[5] 특히, 지하철 직결의 경우 장래 경춘철도가 추진하던 경성부의 지하철과 직결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전쟁체제가 격화되면서 복선화와 함께 물자 확보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보류, 사실상 중단되게 되었다.

이후 전시체제가 본격화되면서 부평에 육군조병창이 설치되고, 이에 따른 군수 화물 수송을 위한 지선이 인천, 부평 등 경인선 곳곳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전황의 악화로 인해 점차 여객수송이 억제되고, 시설개량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노후한 단선 체제를 유지한 채로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수도권 전철 개통과 카오스[편집 | 원본 편집]

해방 이후 경인선은 수도권 인구집중의 정중앙에서 인구 유입을 당당히 받아내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매시 1왕복의 열차가 서울역과 인천역 간을 운행하고 있었으며, 혼잡 문제가 지적될 만큼 수요는 넘쳐흐르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전후복구가 어느 정도 완료된 시점에서 복선화나 전철화가 언급될 정도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1963년 11월에 복선화를 착공, 1965년에 복선화가 이루어졌다. 복선화 이후 교행의 생략으로 운행시간은 1시간으로 단축되고, 횟수 또한 단선 말기의 1시간 배차 간격에서 30분 간격으로 하루 67회의 열차가 투입되었으며 혼잡개선을 위해 열차별 개찰이 아닌 상시 개찰이 각 역에 실시되었으나[6], 역시 폭증하는 수요를 감당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지하철 도입 요망에 따라 경부선과 함께 전철화 및 통근형 전동차의 투입이 추진되어, 1974년 8월 15일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과 함께 이와 직결운행하는 수도권 전철이 다니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정기 일반 여객 열차는 운행되지 않게 되었다.

서울-인천 사이를 연결하는 간선 철도 겸 수도권 전철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투자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중반에는 또다시 포화되어 이용객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1989년 시점에서 개봉역~인천역 간의 승차인원은 하루 평균 38만 5천명으로, 개통 첫 해의 2만 2천명을 17.5배, 80년의 19만 2천명을 2배 이상 상회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막대한 수요가 아침 출근시간대(07시~09시)에는 9만 8천명, 약 25.4%가 집중되며, 저녁 퇴근시간대(17시~20시)에는 7만 3천명, 약 18.9%이 집중되는 것으로 전체 수요의 반 가까이가 러쉬아워에 집중되는 것이었다.[7]

극한의 혼잡도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차량고장과 같은 운행장애나, 노동조합의 파업 내지 태업이 겹치는 경우에는 그야말로 지옥철이라는 표현을 넘는 상황이 벌어졌으며, 이로 인해서 폭동사태가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일례로, 1991년 2월 28일에는 오류동역에서 전철 고장으로 인해 열차가 정차 상태로 후속열차들을 추월시키자, 이에 항의하던 승객 3천여명이 폭동 사태를 일으켜 전동차 유리창과 역무실 집기를 부수고 매표원을 폭행하는 등 1시간 반 가까이 소동이 발생하기도 하였다[8].

결국 이러한 극한의 혼잡으로 인해 복복선화가 검토되기 시작, 1994년부터 1999년까지 단계적으로 복복선화 공사를 추진하였다. 당초에는 1995년까지 구로~부평간의 복복선을 완공할 계획이었으나, 예산확보 문제나 외환위기 등 여러 이유가 겹쳐서 1999년에야 1단계로 구로~부평 구간의 복복선을 완공하였다. 해당구간의 개통과 함께 지금의 급행 전동열차에 해당하는 직통 전동열차가 운행을 개시하여 수도권전철 최초의 상시 급행열차 운행 노선이 되었다.[9] 이후 2003년에는 주안역까지, 2005년에는 동인천역까지 복복선구간이 확대 건설되었으며, 이에 따라 경인선은 인천역~동인천역 구간을 제외하고는 전부 복복선 구간으로 되어 있다.

운행[편집 | 원본 편집]

경인선은 인천항과 부평 인근의 군기지를 위한 화물이 간간히 있었지만, 군기지가 모두 이전되고 인천항에 철도 화물이 중단되면서 현재는 거의 없다.

광역전철[편집 | 원본 편집]

서울 도시철도 1호선 개통과 함께 전동차가 직결 운행하고 있다. 경인선 복복선 개통과 함께 급행이 운행했으며, 2017년 7월 7일부터 정차역이 더 줄은 특급이 운행을 시작했다. 경인선 전동차는 보통 경원선 소요산까지 운행하며, 한국철도공사가 제공하는 시간표에서는 경인경원선으로 안내한다.

역 목록[편집 | 원본 편집]

  • 1호선 일반열차는 해당 구간의 모든 역에 정차
  • : 1호선 용산-동인천 급행
  • : 1호선 용산-동인천 특급
  • ●: 모든 열차 정차, ┃: 모든 열차 통과
번호 km 정거장 연계 노선 소재지
141 0.0 구로 경부선 (연결): 1호선 구로구
1.0 삼각선 (분기) 구로삼각선 (연결)
142 1.4 구일
143 2.4 개봉
144 3.7 오류동
145 5.6 온수 7호선
146 6.9 역곡 부천시
147 8.4 소사 서해선
148 9.5 부천
149 11.2 중동
150 12.2 송내
151 13.4 부개 부평구
152 14.9 부평 인천 1호선
153 16.6 백운
154 18.1 동암 인천 1호선 인입선 (연결)
155 19.3 간석 남동구
156 20.5 주안 인천 2호선 미추홀구
157 21.5 도화
158 22.5 제물포
159 23.9 도원 동구
160 25.1 동인천 중구
161 27.0 인천 미운행 수인선: 수인·분당선

폐역[편집 | 원본 편집]

지선[편집 | 원본 편집]

경인선의 지선은 모두 폐지되었다.

주인선[편집 | 원본 편집]

주인선
종류 일반철도(지선)
구간 주안 ~ 인천(남부)
영업거리 3.8 km
역 수 2개
소유자 대한민국 정부
운영자 철도청
개통일 1959년 3월 1일[10]
폐지일 1997년
시설 정보
선로 1
전기 비전철
신호 불명
나머지 정보는 경인선과 동일

주인선은 주안역과 인천역(1973년 10월 10일부터는 인천역 남부구내로 변경[11])을 연결하는 노선으로, 화물 운송을 담당하였다.

1996년 인천광역시에서 공원화를 발표하였고, 2005년 공원으로 재단장하였다.

km 정거장 연계 노선
0.0 주안 경인선 (연결)
3.8 인천(남부)

각주

  1. 원래 인천도호부의 중심은 바다에서 다소 떨어진, 현재의 인천 남구 문학동 일대였으나 경인선의 개통과 인천의 성장으로 인하여 인천의 중심은 현재의 중구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2. 실은 영등포역 인근으로 노량진 가역사의 형태로 영업을 한 것.
  3. 철도청(1979). "한국철도사", 제3권. P. 78.
  4. 염복규(2016).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이데아. P. 344.
  5. '전철화계획수구체화'. 동아일보, 1939년 7월 22일 보도.
  6. "경인선 『다이어』 전면개정". 동아일보. 1965년 9월 14일 보도.
  7. '電鐵승객 17倍늘어'. 동아일보, 1989년 3월 1일 보도.
  8. '전철 또 고장 3천여명 항의소동'. 동아일보, 1991년 3월 1일 보도.
  9. '구로~부평 복복선 29일 개통 직통열차 운행 주행시간 17분으로 단축'. 경향신문, 1999년 1월 21일 보도.
  10. 교통부 고시 제151호, 152호
  11. 철도청 고시 제47호 (1973년 9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