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무로 마코


小室眞子

일본의 前 왕족(공주). 나루히토 일왕의 남동생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의 장녀이다.

출생

1991년 10월 23일, 아키히토 당시 일왕의 차남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의 첫째로 궁내청병원에서 태어났다.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가 결혼한 지 1년 만에 태어난 첫 아이이자, 아키히토 일왕과 미치코 왕비의 첫 손주여서[1], 부모뿐 아니라 왕실과 일본 전체로부터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받으며 태어나 자랐다.

명칭과 신분

‘마코’라는 이름은 아버지 후미히토 왕자가 지어준 것으로, 꾸밈없이 자연스러운 인생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眞이라는 한자를 썼다.

일왕의 자녀와 왕세자의 자녀에게는 따로 ‘~노미야’ 형태의 어칭호[2]가 주어지지만, 왕자의 자녀인 마코 공주에게는 어칭호가 주어지지 않았다. 반면 후미히토 왕자는 왕세자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아야노미야(禮宮)’라는 어칭호를 받았고, 가와시마 키코와 결혼하여 분가(分家)하면서 ‘아키시노노미야’라는 궁호를 새로 받았다.

일본 왕족들에게는 성씨가 없지만, 학교ㆍ직장ㆍ기타 사회생활을 할 때는 어칭호나 궁호를 성씨처럼 사용하기도 한다. 이때 왕자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궁호를 사용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장남이 궁호를 물려받는다. 차남 이하는 결혼으로 분가하여 가장(家長)이 되면 새로이 궁호를 받는데, 이렇게 창설되는 방계 왕족 가문을 ‘미야케(宮家)’라고 한다. 일본의 민간에서는 사위가 처가의 성씨를 따르고 처가를 계승할 수도 있지만(데릴사위) 왕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즉 공주들은 미야케를 창설할 수 없고, 결혼하면 남편의 성씨를 따르는 수밖에 없다.

왕족 남자는 평민 여자와 결혼해도 왕족 신분을 유지하지만, 왕족 여자가 평민 남자와 결혼하면 남편을 따라 평민이 된다. 예전에는 왕족의 범위가 넓어서 왕족끼리 결혼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1947년부터 다이쇼 일왕의 직계들을 제외한 모든 방계 왕족들이 평민으로 강등되었고, 1965년부터 2006년까지 41년간 줄줄이 공주들만 태어났기 때문에, 왕족끼리 근친혼[3]을 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일본의 공주들은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지 않는 한, 언젠가는 결혼하여 평민 출가외인(出嫁外人)이 될 수밖에 없다.

마코 공주는 2021년 평민 코무로 케이(小室圭)와 결혼했고, 왕족의 신분을 잃고 남편의 신분과 성씨를 따라 ‘평민 코무로 마코’가 되었다.

어린 시절

나루히토 왕세자는 남동생 후미히토 왕자보다 3년이나 늦은 1993년에 결혼했고, 이후 8년간 아이를 갖지 못하여 애태우다가 2001년에야 간신히 무남독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낳았다. 따라서 마코 공주와 3살 아래의 여동생 카코 공주는 조부모인 일왕 내외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카코 공주는 둘째딸이라서 그녀의 탄생을 서운하게 여기는 분위기도 있었고[4], 키코 비가 카코 공주를 임신했을 때는 히사코(久子) 비[5]로부터 “큰며느리가 아직 아이를 낳지 않았는데 작은며느리가 자꾸 임신하는 것은 왕실의 위계질서에 어긋난다.”는 지적을 듣기도 했지만, 마코 공주는 첫째이자 첫 손주라서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귀여움을 듬뿍 받았다.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는 자주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아키히토 일왕 내외를 방문했고, 일왕 내외는 손녀들의 재롱을 보며 즐거워했다.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도 작은오빠의 딸들을 예뻐했다. 반면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한 나루히토 왕세자와 마사코 왕세자비는 이러한 가족모임이 점점 부담스러워졌고, 나머지 가족들도 불편해하여, 가족끼리 사이가 어색해지고 멀어지게 된다.

마코 공주는 무럭무럭 자라 1996년 4월 왕실학교인 가쿠슈인유치원에 입학했고, 1998년 4월에는 가쿠슈인 초등과로 진학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2003년에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태국을 순방했는데, 어린 두 공주에게는 첫 해외여행이었다.[6] 초등과 졸업 작문에서는 일본 전통미술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였고, 제법 어른스러운 글로 주목받았다.

2007년 3월에는 가쿠슈인 여자중등과를, 2010년 3월에는 가쿠슈인 여자고등과를 졸업했다.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카코 공주와 함께 부모의 공무에 동반하는 일이 늘었고, 해외에도 방문했다. 중학교 3학년이던 2006년에는 오스트리아[7]에서 홈스테이를 했고, 고등학교 1학년이던 2007년에는 아버지 후미히토 왕자와 함께 아프리카의 섬나라인 마다가스카르를 방문했다. 한편 2006년에는 남동생 히사히토 왕자가, 2007년에는 외사촌 여동생 가와시마 리코(川嶋理孔)가 태어났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2008년에는 첫 단독 공무를 했다. 도쿄에 있는 우에노(上野) 동물원에서 일본 토종마를 분양받는 행사에 참석했는데, 아버지 후미히토 왕자가 동물에 관심이 많고,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마코 공주도 마찬가지라서, 동물원 측에서 공주를 초청했다고 한다. 일본 언론에서는 “마코 공주님은 웃는 얼굴로 말에게 당근을 주고, 말의 코끝을 쓰다듬어 주는 등, 큰일을 훌륭하게 해내셨다.”라고 보도했다.

국제기독교대학 진학과 성년

가쿠슈인 여자고등과를 졸업한 마코 공주는, 가쿠슈인대학이나 가쿠슈인여자대학이 아닌 다른 대학을 택했다. 개신교계 명문 사립대학인 국제기독교대학의 교양학부 예술과학과로, 18번째 생일이던 2009년 10월 23일에 합격 통지를 받았다.

일본 왕족들은 (해외유학 제외) 전통적 왕실학교인 가쿠슈인에서 공부하는 것이 전통이었으나, 2008년부터 그러한 전통이 조금씩 깨지고 있다. 마코 공주도 새로운 흐름에 동참한 것으로, 폭넓은 교양교육(liberal arts)과 우수한 영어교육에 매료되어 국제기독교대학에 지원했다고 한다. 그녀가 지원한 ‘AO입시’는 시험성적이 아닌 서류와 면접으로 당락을 결정하는 전형으로, 왕실ㆍ궁내청ㆍ대학에서는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경쟁하여 합격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으나 ‘특혜입학’ 내지는 ‘부정입학’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2011년 10월 23일, 마코 공주는 성년(만 20세)이 되었다. 일본 왕실의 전통에 따라 하얀 드레스에 국비(세금)로 제작한 티아라(왕관)[8]를 쓰고 성년식을 치렀다. 성년 기념 기자회견에서 ‘가족’에 관한 질문을 받자, 마코 공주는 여동생 카코 공주에 대한 각별한 우애를 보였고, 아버지 후미히토 왕자에 대해서는 “예전에는 화를 잘 내셨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성년이 되면서 더욱 많은 공무를 했고, 2013년 7월에는 첫 단독 지방 공무를 했다. 후쿠오카현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했다.

한편 해외 경험도 계속 쌓았다. 대학 1학년 때는 아일랜드에 1달간 영어 연수를 다녀왔고, 3학년이던 2012년에는 영국 에든버러대학교[9]로 반년간 유학을 다녀왔다.

대학 졸업 이후

2014년 3월 국제기독교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마코 공주는 대학원 진학이나 취업을 하지 않고 한동안 공무에만 전념했는데, 고령의 할아버지 아키히토 일왕과 미치코 왕비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 후미히토 왕자가 맡고 있던 테니스협회 명예총재직도 맡았다.

그러다가 동년 9월, 마코 공주는 영국 레스터대학교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전공은 박물관학이며, 2016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하여 귀국했다. 마코 공주가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안에는 카코 공주가 언니의 공무를 대신 수행했다. 특히 2014년 12월 29일부로 성년을 맞이한 카코 공주는 예쁜 외모로 많은 인기를 끌었고,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교육학과[10]를 자퇴하고 2015년 4월부터 언니가 졸업한 국제기독교대학 교양학부 예술과학과에 새로 입학하여 화제가 되었다. 이러한 배경들로 인해, 2015년 당시 갓 성년(만 20세)을 맞이한 왕족이자 국제기독교대학 신입생이었던 카코 공주는 학업과 공무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마코 공주는 2016년 1월에 귀국했고, 카코 공주는 공무를 줄이고 학교생활에 좀 더 전념하기 시작했다. 귀국 이후 마코 공주는 박물관에서 무급 비상근직원으로 일했는데, 고모 구로다 사야코도 결혼 전에 비슷한 형태로 일했다.[11] 왕족으로서의 공무가 우선이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는 정식 직원으로 근무하지는 못했다.

2016년 가을부터 마코 공주는 국제기독교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공무, 박물관 비상근직원, 박사과정 공부까지 3가지 일을 병행하겠다는 것이었다. 공무는 왕족들이 항상 해야만 하는 의무이니 빼놓을 수 없지만, 공무에 더해 박물관 비상근직원과 박사과정 공부를 병행하겠다는 그녀의 입장에 여론은 좋지 못했다. 7촌 고모인 아키코(彬子) 공주[12]도 마코 공주의 이러한 계획을 비판했다. 그리고 이후 마코 공주가 대학원에 제대로 다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알려져, 더욱 비판을 받았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마코 공주에 대한 민심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지만, 이후 그녀는 자신과 왕실의 이미지를 크게 하락시키는 사고를 저지른다.

코무로 케이와의 약혼 발표

2017년 5월, 26세 생일을 5개월 앞둔 마코 공주는 약혼 발표 기자회견을 했다. 상대 남성은 마코 공주와 마찬가지로 1991년 10월생인 코무로 케이였고, 두 남녀는 국제기독교대학에서 만나 교제해온 캠퍼스커플이었다.

케이는 사립 구니타치(国立)[13] 음악대학 부속초등학교와 국제학교를 거쳐 국제기독교대학을 졸업했다. 미국 어학연수 경험이 있어 영어도 잘하고 토익 점수도 높다. 또한 가나가와현 쇼난(湘南)이라는 지역의 관광지 에노시마(江ノ島)에서 ‘바다의 왕자’라는 이름으로 홍보모델 활동을 했던 경력도 있어, 사람들은 ‘공주와 왕자의 결혼’이라며 재미있어하기도 했다. 약혼 발표 당시 케이는 법률사무소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하며, 히토츠바시대학 대학원에 다니며 경영법무 공부도 하고 있었다.

이전까지 왕족과 결혼한 사람들은 다들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었다. 1959년 쇼다 미치코아키히토 왕세자에게 시집오기 전까지 왕족의 배우자는 전부 같은 왕족 내지는 귀족이었고, 1947년에 (다이쇼 일왕의 직계를 제외한) 방계 왕족들과 귀족들이 모두 평민으로 강등된 후에도[14] 왕족들은 옛 방계 왕족ㆍ귀족과 많이 결혼했다. ‘평민’이라 해도 부유하고, 본인 및 가족들의 능력이 뛰어나며, 좋은 집안 출신인 사람들이 왕족과 결혼하곤 했다. (미치코 왕비, 마사코 왕세자비 등) 가쿠슈인대학 교수의 딸인 키코 비의 배경이 제일 뒤떨어진다고 평가될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코무로 집안은 정말 평범했다.

케이의 아버지 코무로 토시카츠(小室敏勝)는 케이가 초등학교 5학년으로 진급하기 1달 전인[15] 2002년 3월에 사망했고, 이후 케이는 어머니 코무로 카요(小室佳代) 및 외할아버지 카쿠다 구니미츠(角田國光)과 함께 살고 있었다.

마코 공주와 케이는 2018년 가을에 결혼식을 올릴 계획이라고 했고, 두 사람의 결혼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폭로와 결혼 반대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와 코무로 일가에 대하여 온갖 좋지 않은 사실들이 폭로되었다.

우선 토시카츠와 그의 부모가 사망한 정황이 수상했다. 토시카츠는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병이나 사고 때문이 아니라 무려 ‘분신자살’이라는 끔찍한 방법으로 죽었고, 어째서인지 자세한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지만, 토시카츠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잇달아 사망했다. 따라서 ‘카요가 돈을 노리고 남편과 시부모를 살해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많다. 또한 카요는 재산 분배를 놓고 시가인 코무로 일가와 다툼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야쿠자인지 폭력배인지를 동원했다고도 한다. 또한 ‘코무로 일가가 사이비종교인지 신흥종교인지를 믿고 있다’는 설도 있었다.

사별하여 혼자가 된 카요는 케이를 키우면서 어느 남성(이하 A)과 깊이 사귀었고, 그와 재혼할 계획까지 세웠다. 교제 과정에서 A는 카요에게 돈을 여러 차례 건넸고, 그 돈은 코무로 일가의 생활비와 케이의 학비 등으로 사용되었다.[16] 그러나 A와 카요의 재혼은 무산되었고, 이후 A는 코무로 모자(母子)에게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으나 코무로 모자는 “우리는 돈을 빌린 것이 아니라 증여받은 것이니까, 돌려줄 이유가 없다”고 맞섰다. 반면 A는 “나는 그 돈을 빌려준 것이었다”며 재반박하였다. A와의 문제 외에도, 카요가 토시카츠의 유족연금을 부정수급했다는 문제도 있다.

코무로 일가뿐 아니라 케이 본인에 대한 문제점들도 제기되었다. 가뜩이나 이전의 왕자비ㆍ부마들보다 집안 배경도 좋지 못한데다가, 일단 케이는 법률사무소의 정식 직원이 아니라 1주일에 2~3회 출근하는 파트타임 직원이어서, 안정된 직업과 수입이 없는 그가 공주의 남편감으로 적절한지 의문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법률사무소에 근무하기 전에는 은행원이었는데, 은행에서 행실과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마코 공주와 사귀면서 동시에 다른 여자[17]에게 ‘양다리’를 걸치고, 아나운서 학원[18]에 다닐 때도 여자들에게 집적대는 등, 여자관계가 깨끗하지 못하다고도 했다.

케이가 초등학교 5~6학년 시절 학교폭력 주동자였다는 사실도 폭로되었다. 케이로부터 피해를 당한 B군은 구니타치음악대학 부속중학교로의 내부진학을 포기하고 수험을 치러 다른 중학교로 진학했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마음의 상처로 힘들어하다가, 케이가 ‘마코 공주와 결혼할 남성’으로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케이와 (휴대전화 문자로) 연락이 닿은 B군은 인사와 안부를 대강 주고받다가 “초등학교 시절 네가 나에게 저질렀던 이지메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케이는 더 이상 답하지 않았고, 늦게라도 케이가 자신에게 사과한다면 모든 것을 잊고 용서할 생각이었던 B군은 분노하여 이 사실을 언론에 터뜨린다.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는 코무로 모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후미히토 왕자 내외는 ‘안정된 직업과 수입을 가질 것’과 ‘A와의 금전관계 문제를 깨끗이 해소할 것’을 요구했고, 그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마코 공주를 시집보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카요는 A와의 금전관계에 대해 여전히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며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고, 왕실에 금전적 지원을 요구했다.

한편 케이는 장모가 될 키코 비에 대해 “귀국자녀(歸國子女)[19]이셔서 일본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라는 무례한 발언도 했다. 참고로 키코 비는 어린 시절 외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지만[20], 중학교 2학년 이후로 줄곧 일본에서 살아오고 있으므로 ‘일본어를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아니다.

일반인이었어도 꺼릴 조건들인데, 하물며 ‘공인(公人)’이며 세금으로 성장한 공주의 결혼이니, 당연히 국민적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공주의 결혼은 세금으로 이루어지며, 시집갈 때 가져가는 거액의 지참금도 세금으로 마련되는 돈이며, 만약 좋지 못한 남성에게 시집갔다가 결혼생활에서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그 폐해는 일반인의 결혼 실패와는 규모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케이와 코무로 일가가 지참금과 왕실의 배경을 노리고 마코 공주와 결혼하려 한다’고 의심하며,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케이의 미국 유학

여러 가지 논란들이 불거지며 ‘코무로 케이와 파혼하라’는 여론이 강해졌고, 결혼식은커녕 왕실의 정식 약혼식인 노사이(納采)[21] 의식도 치르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다. 마코 공주와 케이는 일단 결혼식을 예정보다 2년 뒤인 2020년으로 연기했고, 2018년 2월에는 케이의 미국 유학 계획이 발표되었다. 뉴욕 포덤대학교 로스쿨에서 3년간 공부하여 미국변호사 자격을 취득하는 것이 목표이며, 학비는 케이가 근무하고 있던 법률사무소의 지원과 장학금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미국 유학에 대해 ‘케이와 마코 공주를 자연스레 떼어놓기 위한 방법’이라고 의심하는 시각이 많았다.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지내다 보면 마음도 멀어져 서로를 잊을 가능성이 높기에, 왕실에서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케이를 머나먼 타국에 내보냈다는 것이다. 7월에 마코 공주는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 여러 지역의 국가들을 2주간 순방했는데, 일본인의 남미 이민 110주년[22]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했다지만 덕분에 세간에서는 ‘파혼하고 머리 식히러 해외여행을 다녀온 듯하다’고 보았다.

2018년 8월부터 시작된 케이의 미국 유학 생활은, 여러 모로 특혜를 받은 부분이 많아 보였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일본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것도 아니고, LSAT[23]를 치러 합격했다는 이야기도 없는 케이로서는 수강할 수 없는 수업들을 들었고, 학교로부터 장학금도 풍족하게 받으며 물가가 비싼 뉴욕에서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 케이는 포덤대학교 로스쿨에 자신을 ‘마코 공주의 약혼자’라고 과시했고, 일본 왕실의 법에 대해 잘 모르는 학교 측에서는 ‘공주와 결혼하면 케이도 왕실에 입성하여 왕족이 되겠지’라고 생각하여 케이를 ‘학교 홍보용’으로 활용하기 위해 특혜를 주었다. 일본 왕실에서는 포덤대학교에 “케이는 아직 정식 약혼자가 아니다”라고 정정을 요구했다.

또한 마코 공주와 약혼 발표 기자회견을 하면서부터 케이는 일본에서나 미국에서나 여러 경호원들로부터 경호를 받았는데, 이는 ‘약혼 예정자’로서는 전례 없이 과분한 조치였다. 왕족과 결혼한 다른 사람들도 ‘약혼 예정자’와 ‘약혼자’였던 시절에 이렇게까지 삼엄한 경호를 받은 경우는 없었고, 심지어 왕족들도 외국 유학 중에는 간단한 경호만 받았다. 분에 넘치는 조치임과 동시에, 경호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부 일본인들의 세금인지라, 일본인들은 불만이 많았다.

계속되는 반대, 하지만…

왕실에서는 케이와 마코 공주를 떼어놓으면 두 사람이 자연스레 멀어져 이별하리라고 기대했던 모양이지만, 그 기대는 빗나갔다. 케이는 공부하느라 바빠서 방학 중에도 일본에 돌아오지 못하고, 예비 처가인 후미히토 왕자 일가로부터 연하장도 받지 못하면서도[24], 마코 공주와 계속 연락하며 장거리 교제를 이어나갔다.

마코 공주와 케이는 ‘우리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며 결혼하겠다는 의지를 여전히 굽히지 않았고, 코무로 일가와 A의 지저분한 금전관계에 대해서도 ‘다 해결된 문제’라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심지어 이러한 입장을 후미히토 왕자 내외와 아키히토 일왕 내외가 공무로 부재중인 틈을 타서 발표하여 더욱 비판을 받았다. 이렇게까지 마코 공주가 결혼을 고집하는 이유는, 케이에 대한 애정도 있겠지만 ‘답답한 집(왕실)을 벗어나고 싶어서’로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왕실에서 엄격한 제약 아래 살고 있는데다가, 일본 왕실은 보수적인 일본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며, 특히 남존여비가 심하기 때문이다.

케이와의 결혼 문제로 인하여 마코 공주 본인뿐 아니라 후미히토 왕자 일가, 더 나아가 왕실의 이미지도 하락했다. 후미히토 왕자는 2006년에 ‘41년 만의 남자 왕손(왕위 계승자)’인 히사히토 왕자를 낳은 이래로 나루히토 왕세자를 제치고 주목받아 오고 있었으나, 차츰 이런저런 좋지 않은 모습들로 구설수에 올랐고, 결정적으로 큰딸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 때문에 인심을 잃게 되었다.

한편 마코 공주와 비슷한 시기에 약혼을 발표했지만 순조롭게 결혼에 성공한 아야코(絢子) 공주의 사례도 있어, 결혼 문제로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마코 공주와 크게 대조되었다. 아야코 공주는 노리히토 왕자와 (1994년 카코 공주임신키코 비에게 한소리 했던) 히사코 비의 3녀 중 막내로, 마코 공주보다 1살 연상인 1990년생이다. 어머니 히사코 비가 소개해준 5살 연상의 모리야 케이(守谷慧)와 2018년에 결혼했는데, 코무로와 달리 모리야는 좋은 집안의 아들이며 본인의 자질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하필 (한자는 다르지만) 이름의 발음이 같아서, 사람들은 “같은 ‘케이’인데 너무 다르다”며 코무로 케이를 비판하고 모리야 케이를 추켜세웠다. 이후 모리야 아야코는 2019년에 장남을, 2022년에 차남을 낳고, 원만한 가정을 꾸려 살고 있다.

왕실에 마코 공주의 결혼을 찬성하며 지지해주는 사람은, 이전부터 마코 공주와 우애가 깊었던 여동생 카코 공주밖에 없었다. 2019년 3월 국제기독교대학을 졸업한 카코 공주는, 졸업식을 취재하러 모여든 기자들의 앞에서 질문에 답하다가 ‘언니의 결혼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자 “본인의 희망이 가장 중요하다”라며 언니를 옹호했다. 덕분에 카코 공주도 비판을 받았다.

2019년 5월에 마코 공주의 할아버지 아키히토 일왕이 퇴임했고, 큰아버지 나루히토 왕세자가 즉위했다. 아버지 후미히토 왕자는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케이와의 결혼과 미국 이민

2021년 8월, 케이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공항으로 입국하는 케이는 머리를 길게 길러 묶은 모습이었는데, 가뜩이나 좋지 못했던 그의 평판을 더욱 깎아먹었다. 그리고 2달 후인 10월, 마침내 마코 공주와 케이는 정식으로 법적인 부부가 되었다. 결혼식도 치르지 못하고, 지참금도 받지 못하고, 관청에 혼인신고만 하여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마코 공주는 왕족의 지위를 잃고, 남편을 따라 ‘평민 코무로 마코’가 되었다.

다음 달인 11월 4일, 외할아버지 타츠히코가 향년 81세[25]에 사망했다. 한동안 도쿄에서 지내고 있던 코무로 부부도 장례식에 참석했고, 얼마 후에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여 신접살림을 차렸다. 케이는 몇 차례의 도전 끝에 2022년 10월 미국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일하기 시작했다. 미술사와 박물관학을 공부한 마코는, 뉴욕의 박물관에서 일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맞벌이를 하더라도 뉴욕의 비싼 집세는 감당하기 어려운데, 코무로 부부는 자신들의 수입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 분명한 집에 살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지참금을 한 푼도 주지 않았다’지만 왕실에서 (눈에 띄지 않게) 도와주고 있는 것이 분명해보여서, 결혼 후로도 코무로 부부와 왕실-더 정확히는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에 대한 이미지는 좋지 않다.

각주

  1. 외할아버지 가와시마 타츠히코(川嶋辰彦) 교수와 외할머니 가와시마 카즈요(川嶋和代)에게도 첫 손주이다.
  2. 장남은 왕세자 책봉 전까지, 차남 이하의 아들과 딸들은 결혼하기 전까지만 사용하는, 일종의 아명(兒名)이다.
  3. 일본에서는 사촌부터 결혼이 허용된다. 다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라고 한다.
  4. 어머니 키코 비부터가 출산 직후 “아들을 낳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산부인과 의사에게 질문했다.
  5. 아키히토 일왕의 사촌동생인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高円宮憲仁) 왕자의 아내. 노리히토 왕자는 5촌 조카이지만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나루히토 왕세자와 친했다.
  6. 후미히토 왕자는 젊어서부터 호색한으로 유명하고, 태국에도 애인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내와 어린 두 딸도 함께 갔던 2003년의 태국 순방에서도 애인을 만났다고 한다. 키코 비는 남편의 그러한 행동을 알면서도, 순방 내내 억지로 웃음을 짓고 있어야 했다고.
  7. 어머니 키코 비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곳이다.
  8. 마코 공주의 티아라는 도쿄의 번화가인 긴자(銀座)에 있는 와코(和光) 백화점에서 제작했다.
  9. 노리히토 왕자와 히사코 비의 장녀인 쓰구코(承子) 공주도 이 대학에 유학했다.
  10.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학과로, 카코 공주가 입학하던 2013년부터 신설되었다.
  11. 구로다 사야코는 야마시나(山階) 조류연구소에서 비상근직원으로 일하면서 돈을 받았다. 돈을 잘 쓰지 않았던 그녀는, 조류연구소에서 받은 월급도 거의 그대로 모아두었다.
  12. 아키히토 일왕의 사촌동생인 토모히토(寬仁) 왕자의 장녀.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여, 일본의 여성 왕족으로서는 최초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에는 대학교수로 일하고 있다.
  13. 한자를 보고 국립학교로 착각할 수 있는데, 사립학교이다. 일본에서도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14. 이것을 신적강하(臣籍降下)라고 한다.
  15. 일본에서는 4월에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므로.
  16. 케이가 다닌 학교들은 모두 학비가 비싼 사립학교이다.
  17. 프랜차이즈 외식업을 운영하는 사장의 딸이라고 전해진다.
  18. 이 비용은 어머니 카요와 사귀던 남성 A가 부담했다.
  19. ‘외국에서 태어났거나 어린 시절에 외국으로 떠나서 성장한 사람’을 가리키는 일본어 단어.
  20. 1살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미국에서 살았고, 초등학교 5학년 2학기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는 오스트리아에서 살았다.
  21. 신랑 측에서 신부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어 청주(), 도미(생선) 암수 1쌍, 옷감(비단)을 예물로 전달하는 의식.
  22. 이렇게 일본인의 남미 이민 역사가 길다 보니, 브라질에는 일본계 브라질인들이 많다. 일본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조상의 나라인 일본에 돌아와 일하기도 한다.
  23. 미국법학전문대학원 입학시험. Law School Admission Test.
  24. 일본에서는 연하장을 주고받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이어서, 아무 말 없이 연하장을 보내지 않는 것은 ‘인연을 끊자’는 뜻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25. 1940년 4월 20일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