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사히토


히사히토
悠仁
Akishinohisahito.jpg
2023년 9월 6일, 만 17세 생일 기념사진
인물 정보
출생 2006년 9월 6일 (17세)
도쿄도 미나토구 아이이쿠병원
국적 일본
학력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유치원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초등학교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중학교
쓰쿠바대학 부속고등학교
직업 왕족(왕자)
종교 신토
신체 170cm
가족 할아버지 아키히토 상왕, 할머니 미치코 상왕비
외할아버지 가와시마 타츠히코, 외할머니 가와시마 카즈요
큰아버지 나루히토 일왕, 큰어머니 마사코 왕비
아버지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 어머니 키코 비
고모 구로다 사야코, 고모부 구로다 요시키
외삼촌 가와시마 슈, 외숙모 가와시마 나오
형제: 큰누나 코무로 마코, 작은누나 카코 공주
사촌 누나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
외사촌 여동생 가와시마 리코

일본의 왕족(왕자). 나루히토 일왕의 남동생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의 장남. 현재 일본 왕실의 미혼 왕족들 중에서 유일한 남자이며, 아버지에 이어 왕위계승 서열 2위이다. 오시루시는 금송(金松).

출생[편집 | 원본 편집]

2006년 9월 6일,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 아이이쿠병원에서 아키히토 당시 일왕의 차남 부부인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의 늦둥이 셋째로 태어났다. (당시 큰누나 마코 공주는 중학교 3학년, 작은누나 카코 공주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히사히토 왕자의 탄생은 일본에서 굉장한 화제이자 경사였다. 1965년 후미히토 왕자가 태어난 이래로 일본 왕실에는 줄줄이 공주들만 태어나고 있어서[1],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장래 일왕이 될 나루히토 왕세자에게는 반드시 뒤를 이을 아들이 필요했지만, 결혼 8년 만인 2001년에야 어렵게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낳은 후로 더 이상 자녀를 낳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일본 왕실은 ‘법을 바꾸어 여왕을 허용하는 것은 어떤가’를 의논하려고 했다. 그렇게 된다면 아이코 공주가 나루히토 왕세자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2006년 초반,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가 ‘셋째 임신’을 발표했다. 그리고 동년 9월 6일에 ‘41년 만의 남자 왕손’인 히사히토 왕자가 태어남으로써, 여왕 허용론은 잠잠해져 버렸다.

한편 히사히토 왕자의 출생은 ‘41년 만의 왕자 탄생’이라는 기록 외에도 ‘일본 왕실 최고령 출산’과 ‘일본 왕실 사상 최초의 제왕절개’라는 기록도 세웠다. 1966년 9월 11일생인 키코 비는 40세 생일을 5일 앞두고 히사히토 왕자를 낳았고, 전치태반[2] 때문에 제왕절개로 출산했다. 이토록 키코 비에게도 여러 모로 힘든 출산이었기 때문에, 첫째와 둘째를 낳았던 궁내청병원 대신 일본에서 출산 전문 병원으로 명성이 높은 아이이쿠병원을 이용했다. 오전 일찍 시작된 제왕절개 수술에는 일본 최고의 산부인과소아과마취과 의료진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뒷이야기[편집 | 원본 편집]

히사히토 왕자는 ‘우연히 자연스럽게 잉태되어 탄생한 늦둥이 남자아이’가 아니라, 부모가 계획적으로 임신을 준비하고 성별을 선택한 결과로 태어난 아이이다.

1991년 첫째 마코 공주를 낳은 데 이어 1994년 둘째를 임신한 후미히토 왕자 부부는, 히사코 비[3]로부터 “형님(왕세자) 부부에게 아직 아이가 없는데 동생 부부가 자꾸 임신하는 것은 왕실의 위계질서에 어긋난다”는 지적을 들었다. 이야기를 꺼낸(총대를 멘) 사람은 히사코 비였지만, 히사코 비 개인만의 의견이 아니라 왕실 전체의 의견이어서, 동년 12월 29일 카코 공주가 태어난 이후로 오랫동안 후미히토 왕자 부부는 아이를 더 이상 갖지 않고 있었다. 1년 전(1993년)에 결혼한 나루히토 왕세자와 마사코 왕세자비는 당시 일본인들의 평균 결혼 연령(20대 중반)보다 조금 늦게 결혼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라서[4], 곧 아이를 낳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왕세자 부부가 좀처럼 아이를 가지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고, 2001년에야 어렵게 아이를 낳았지만 딸(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이었다. 왕실에서는 마사코 왕세자비가 어서 다시 임신해서 아들을 낳길 바랐고, 궁내청 장관 유아사 토시오(湯淺利夫)는 공식 기자회견에서 “왕세자 부부가 어서 둘째를 가지길 바랍니다.”라고 발언했다. 그러나 시집살이와 오랜 난임으로 심신의 건강이 좋지 못했던 마사코 왕세자비에게서 득남을 기대하기 어려울 듯하자, 몇 개월 후의 기자회견에서 유아사 장관은 “솔직히 말해서, 왕실의 번영을 생각한다면 후미히토 왕자 부부가 셋째를 낳았으면 좋겠습니다. 두 공주와의 나이 차이를 생각한다면 하루빨리 셋째를 가져야 합니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물론 이는 장관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아키히토 일왕 내외의 뜻이었다.

일왕 내외의 요구뿐 아니라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 스스로도 욕심과 야망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은 셋째 임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일본 왕실에서는 새해마다 왕족들이 모여 와카(和歌)[5] 발표회를 하는데, 2006년 초반에 후미히토 왕자 내외는 노골적으로 ‘아기를 갖고 싶다’는 마음을 담은 와카를 읊었다. 나루히토 왕세자가 결혼 초기 자녀계획을 묻는 기자들에게 “너무 조급증을 내면 (아기를 점지해주는) 황새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잖아요.”라고 가볍게 농담으로 받아친 적이 있는데,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는 왕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황새’를 소재로 창작한 와카를 읊으며 대놓고 왕세자 부부를 저격함과 동시에 ‘셋째를 낳으려고 한다’라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들은 ‘셋째를 임신했으며 현재 6주’라고 공개했다. 셋째를 가지기 위해 불임 치료를 받았다고 했는데, 인위적으로 남자아이를 골라(성감별) 임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나루히토 왕세자 부부가 인공수정 내지는 시험관아기 시술을 받을 때도 의료진이 성별(아들) 선택 임신을 권유했지만, 왕세자 부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왕절개 이유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일본 왕실에서 밝힌 공식적인 이유는 (앞서 서술했듯이) ‘전치태반 때문’이었지만, 세간에서는 ‘일부러 좋은 사주팔자를 타고날 시간에 맞추어 제왕절개 수술을 받은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참고로 히사히토 왕자가 태어난 날짜와 시간은 ‘오래 살며 많은 여자들을 거느릴 사주’라고 한다.

유아기[편집 | 원본 편집]

‘41년 만의 왕자’인 히사히토 왕자는 왕실과 일본 전국으로부터 어마어마한 관심을 받았고, 장래 대를 이을 귀한 남자아이로 사랑을 듬뿍 받았다. 히사히토 왕자의 아버지인 후미히토 왕자는 차남이어서 장남인 나루히토 왕세자보다 존재감이 적었고 왕위 계승 서열에서도 뒷자리였지만, 히사히토 왕자를 낳으면서부터 단숨에 주목과 칭송을 받게 되었다. 할아버지 아키히토 일왕과 할머니 미치코 왕비는 손자의 탄생 소식을 듣자마자 아이이쿠병원으로 달려왔고, 이후로도 손자와 자주 시간을 보내며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2010년 4월, 히사히토 왕자는 국립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유치원에 입학했다. ‘(전통적 왕실학교인) 가쿠슈인의 유치원에 입학하겠지’라는 예상을 깨뜨린 선택에 대해, 그의 부모는 “아들이 다양한 또래 친구들과 폭넓게 교류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마침 어머니 키코 비가 오차노미즈여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는 인연도 있었다. 같은 시기 큰누나 마코 공주도 가쿠슈인대학이나 가쿠슈인여자대학 대신 국제기독교대학 교양학부 예술과학과로 진학하여, 일본 언론에서는 “후미히토 왕자의 3남매 중 2명이, 가쿠슈인이 아닌 다른 교육기관을 선택했다”며 주목했다.

초등학교[편집 | 원본 편집]

2013년 3월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유치원을 졸업한 히사히토 왕자는, 다음 달인 4월에 동 대학 부속초등학교로 진학했다. 가쿠슈인 유치원이 아닌 외부 유치원에 다닌 왕족들도 있었고, 2008년 쓰구코 공주[6]와세다대학 국제교양학부에 입학한 것을 시작으로 ‘탈(脫) 가쿠슈인’ 사례가 줄을 잇고 있었지만, 그래도 왕족이라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는 다들 가쿠슈인에서 다녔는데, 히사히토 왕자는 최초로 그러한 전통을 깨뜨리고 외부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후로 히사히토 왕자는 부모를 따라 역대 일왕들의 묘지, 이세신궁[7],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오키나와현 평화기념공원의 전몰자 묘역 등을 참배했다. 마치 ‘이 아이가 미래 왕실의 후계자이다’라고 보여주려는 듯하는,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의 야심이 엿보이는 행보였다. 후미히토 왕자는 ‘연로하신 노인이 국왕의 임무를 수행하기는 힘드니까’라는 그럴싸한 이유를 내걸고 ‘국왕정년제’를 주장하기도 했고, 원로 종교학자 야마오리 테츠오(山折哲雄)는 나루히토 왕세자를 겨냥하여 월간지 신초(新潮)>에 “왕실을 위해 퇴위하십시오!”라는 도발적인 글을 발표했다. ‘왕위를 이을 아들도 없고, 아프다며 매일 요양만 하고 있는 마사코 왕세자비가 장래 왕비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도 못할 것 같으니, 아들과 부지런한 아내를 두고 있는 남동생 후미히토 왕자에게 왕위 계승권을 넘겨주라’는 것이었다.

그러다 작은 반전(反轉)의 분위기가 생겼다. 왕세자 부부의 무남독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우수한 성적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가쿠슈인 초등과 5~6학년 무렵부터 아이코 공주는 장래 도쿄대학 등의 명문대학 합격도 가능할 수준이며, 외국어에도 재능을 보이고 있다고 알려졌다. 이에 키코 비도 (아이코 공주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아들의 교육에 여러모로 무척 신경을 쓰며, 장차 아들을 도쿄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해 애쓴다고 한다. 키코 비는 아들에게 게임과 만화 등의 오락을 금지하고, TV 시청도 뉴스와 다큐멘터리 등의 ‘교육적인’ 방송만 허용했으며, NHK 외국어 교육방송 등을 활용하여 외국어 공부에도 힘쓰게 했다. 개인과외 교사도 구하려고 했지만, 키코 비가 시종들에게 혹독하게 갑질을 일삼고 있다는 소문에 좀처럼 지원자가 없었다. 그렇지만 경호 문제 때문에 일반 아이들처럼 학원에 보내기도 어려워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키코 비는 히사히토 왕자의 안전을 위해,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초등학교 운동회에도 이런저런 간섭을 했다. 많은 경찰들을 동원하여 삼엄한 경호를 펼쳤고, 학부모나 학생의 가족이어도 미리 허가받지 않은 사람이면 입장할 수 없었고, 사진과 동영상도 촬영하지 못하게 했으며, 언론의 관심도 높았지만 취재를 일절 불허하고 비공개로 행사를 치르게 했다. 당연히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고, 히사히토 왕자의 할아버지 아키히토 일왕과 할머니 미치코 왕비도 당황스러워했지만, 키코 비는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히사히토 왕자가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키코 비는 득달같이 학교로 쫓아와 “우리 아들이 이지메를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항의하며 담임교사에게 “제대로 대응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반응은 “히사히토 왕자는 학교에 잘 나오지도 않는데 무슨 소리냐?”라는 것이었다. 학교 근처 주민들은 (평소와 달리) 경호원들이 오가는 모습을 보고 ‘오늘은 히사히토 왕자가 등교했나 보구나’라고 짐작할 정도였다고.

그리고 다른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사실 히사히토 왕자를 부담스럽게 여긴다고 한다. 아이들끼리 놀다가 다치거나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왕실의 하나뿐인 귀한 후계자’와 자칫 그런 일로 얽혔다가는 굉장히 곤란해질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다. 특히 딸을 둔 학부모들은 자신의 딸이 히사히토 왕자와 가까워지는 것을 더욱 꺼린다. 왕실의 엄격하고 보수적인 생활과, 특히 (미치코 왕비, 마사코 왕세자비, 그리고 스스로 원해서 시집온 키코 비까지도 겪은) 매운 시집살이가 익히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키코 비는 아들을 우등생으로 키워내기 위하여 많이 노력했지만,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와 달리) 히사히토 왕자가 우수하다는 소문은 들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 아이코 공주가 그랬던 것처럼) ‘어딘가 부족한 아이’라거나 ‘장애가 있는 아이’라는 소문들이 돌기 시작했다. 운동회뿐 아니라 학업 성적도 공개되지 않았는데, 히사히토 왕자가 만들었다는 미술작품 몇 가지만 공개되었다. 그마저도 ‘시종이 대신 만들어준 것이다’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어린아이가 만든 것치고는 매우 훌륭했는데도, 그에 대해 왕실에서 자랑하거나 칭송하는 목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운동회 역시 수상했다. 히사히토 왕자가 운동하는 모습은 영상이 아닌 사진 몇 장으로만 공개되었고, 고학년인 그가 ‘가족들과 미리 연습까지 해가며’ 참가했다는 종목은 저학년 아이들도 할 만한[8] 단순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아키히토 일왕ㆍ할머니 미치코 왕비 내외와 자주 시간을 보내며 귀여움을 받는 모습이 자주 언론에 보도되던 영유아기와 달리, 자라면서 언론 보도가 뜸해지고 통제되기 시작한 것도 의심에 불을 지폈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2018년 8월, 히사히토 왕자는 어머니 키코 비와 함께 야리가다케(槍ヶ岳) 산을 등반했다. 나가노현(長野縣)과 도야마현(富山縣)의 경계에 위치한 야리가다케는 일본에서 5번째로 높은 산(3,180m)이며, 꽤나 험하여 오르기 힘든 산으로도 유명하다. 아들의 안전과 경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초등학교 6학년이나 된 아들의 가방까지 대신 들어줄 정도로 극성스러운 키코 비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행보였다. 히사히토 왕자의 자질을 의심하는 눈길들이 늘어나자 ‘우리 아들은 어린데도 이렇게 험한 산을 능숙하게 오를 수 있다’고 과시하려는 기획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칭송은커녕 ‘왕실의 유일한 후계자가 행여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느냐’라거나 ‘왕자가 등산한다고 입산 통제를 하여 일반인 등산객들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비판들을 받았다. 키코 비가 마음이 급한 나머지 실수한 것이었다.

2019년 3월, 히사히토 왕자는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며칠 후인 15일에는 어머니 키코 비와 함께 증조할아버지 쇼와 일왕(히로히토)과 증조할머니 고준왕후(나가코)의 묘소를 참배하여 초등학교 졸업을 보고했다. 작은누나 카코 공주도 함께 참배하여 국제기독교대학 졸업을 보고했다.

중학교[편집 | 원본 편집]

2019년 4월, 히사히토 왕자는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중학교에 입학하며 신입생 대표로 선서를 했다. 대개 수석 입학생이 맡는 역할을 성적도 불분명한 그가 차지한 것에 대해서도, 재학생ㆍ졸업생ㆍ학부모들의 사이에서 뒷말들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히사히토 왕자가 수석이었다면, 그의 부모와 왕실에서 먼저 떠들썩하게 자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학년 국화반에 배정된 히사히토 왕자는 평범하게 학교생활을 하는 듯했으나, 얼마 후에 큰 사고가 발생한다. 괴한이 교실까지 침입하여 왕자의 책상 위에 흉기를 올려두고 간 것이다. 마침 1학년 국화반은 체육시간이어서 괴한과 마주치지 못했지만, 운이 나빴더라면 히사히토 왕자나 다른 학생들이 큰 부상을 입거나 심지어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었을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범인은 얼마 후에 체포되었고, 경찰 조사에서 “히사히토 왕자를 해치려고 했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학부모들이 학교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왕실학교인 가쿠슈인으로 전학시키라”고 요구하는 학부모도 있었지만, 키코 비는 험악하고 고압적인 태도로 그러한 의견들을 묵살하며 “경호를 좀 더 강화하겠다”는 대책만 내놓았고, 끝내 아들을 전학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괴한 사건 때문에, 2019년도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중학교 운동회는 취소되었다.

동년 5월에는 할아버지 아키히토 일왕이 이례적인 ‘생전퇴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났고, 큰아버지 나루히토 왕세자가 새 일왕으로 즉위했다. 얼마 후에 아버지 후미히토 왕자는 왕세제로 책봉되었고, 이로서 히사히토 왕자는 아버지에 이어 계승서열 2위가 되었다. 여름방학 중이던 2019년 8월에는 부모와 함께 부탄을 방문했다. (부모와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히사히토 왕자는 생물에 관심이 많으며, 취미로 라이트노벨(소설)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2021년 10월, 큰누나 마코 공주가 약 4년 5개월의 길고도 지루한 갈등 끝에 남자친구 코무로 케이(小室圭)와의 결혼에 성공하여 왕실을 떠났다. 마코 공주는 왕실과 일본 전체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강행하여, 본인뿐 아니라 후미히토 왕자 일가의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켰다. 마코 공주는 결혼식도 지참금[9]도 없이 혼인신고만으로 케이와 부부가 되었고, 남편의 신분과 성씨를 따라 ‘평민 코무로 마코’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코무로 부부는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신접살림을 차렸다.

고등학교 시절[편집 | 원본 편집]

2022년 3월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중학교를 졸업했고, 4월에는 일본 최고의 명문고등학교 중 하나인 쓰쿠바대학 부속고등학교로 진학했다.

10월에는 이세신궁을 참배했다. 초등학교 입학 직전이던 2013년 3월에는 아버지 후미히토 왕자, 어머니 키코 비, 작은누나 카코 공주[10]와 함께 참배했지만[11], 고등학교 1학년이 된 2022년에는 혼자서 참배했다.

논란[편집 | 원본 편집]

부정입학[편집 | 원본 편집]

히사히토 왕자가 명문 유치원학교에 부정입학을 했다는 논란이 있다.

오차노미즈여자대학에는 부속어린이집[12]과 부속유치원이 있는데, 어린 자녀를 두고 있는 교직원과 대학원생은 어린이집을 이용한다. 유치원과 달리 부속초등학교 자동 진학이 보장되지 않지만 등하원을 시키기에 좀 더 편리하며, 어차피 초등학교는 각자의 집 근처 학군으로 보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키코 비오차노미즈여자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일 때,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유치원 입학전형에 ‘교직원ㆍ대학원생 자녀 특별전형’이 도입되었다. 특별전형으로 입학한 원생은 히사히토 왕자가 유일했고, 얼마 후에 특별전형은 폐지되었다.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가 오차노미즈부속을 선택한 공식적인 이유는 ‘아들이 다양한 또래 친구들과 폭넓게 교류하기를 바라서’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간에서는 ‘사실 히사히토 왕자가 가쿠슈인에 합격하지 못해서, 뒷돈으로 오차노미즈부속에 입학시킨 것이 아니냐’고 의심한다.

유치원 졸업 후에는 동 대학 부속초등학교로 진학했지만, 이번에는 고등학교가 문제였다. 오차노미즈여대 부속학교는 중학교까지만 남녀공학이고 고등학교는 여고이기 때문에, 남학생들은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예 중학교부터 외부 학교로 진학하는 남학생들도 많아서,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중학교에는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더 많다. 히사히토 왕자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그의 진학 문제가 슬슬 화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쿠슈인의 요청으로, 중학교부터는 가쿠슈인 중등과(남중)에 다닐 것이다’라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사립중학교에 진학할 생각이면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입시 대비 공부를 시작하는 등 준비해야 하는데 그런 기미도 없었고, 히사히토 왕자의 성적 또한 ‘비공개’였다.

또 다른 방안은 꽤나 충격적이었는데, 무려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여고를 남녀공학으로 전환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통 깊은 명문 여학교’라는 자부심이 강한 오차노미즈 동문들이 강력히 반대했다. 부속여고에 이어 대학도 남녀공학으로 전환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고, 오차노미즈여자대학 총장 무로후시 키미코(室伏きみ子)부터가 오차노미즈여대 부속학교ㆍ오차노미즈여대(이학부) 출신이라 남녀공학 전환에 대해 긍정적일 리가 없었다. 오차노미즈여대에 부속남고를 설립하자는 대안도 제시되었으나, 아무리 귀한 왕자라지만 왕자 1명을 위해 고등학교 1개를 새로 개교하는 것은 너무 어마어마한 일이었던 듯하다.

그러다가 새로운 방안이 생겨났다. 오차노미즈여자대학의 자매교인 쓰쿠바대학과 협정을 체결하여 서로 부속학교 학생을 교환하여 진학시키는 제도로, 히사히토 왕자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2017년부터 시행되었다. 소수 선발하는 교환진학 전형은 시험성적이 아닌 서류와 면접으로 이루어지는데, 유치원 입학 때와 마찬가지로 히사히토 왕자를 위해 만들어진 맞춤형 특별제도로 여겨져 곱지 않은 시선이 많았다. 가뜩이나 큰누나 마코 공주와 작은누나 카코 공주의 대학 입학에 대해서도 ‘최하위권 성적이면서 명문대학에 부정입학했다’며 논란이 많았고, 아버지 후미히토 왕자도 1984년 가쿠슈인대학에 입학할 때 구설수가 있었는데, 여기에 히사히토 왕자까지 가세한 것이다.

그럼에도 히사히토 왕자는 쓰쿠바대학 부속중학교에 진학할 것처럼 보였지만, 당장은 눈치가 보였는지, 그리고 큰누나의 결혼 문제로 한창 여론이 악화되어 있었기도 해서, 일단은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중학교로 진학했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쓰쿠바대학 부속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이 학교는 매년 30여명을 도쿄대학에 보내는 입시명문으로, 일본 전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중학생들이 치열한 입시경쟁을 치러 입학하는 고등학교이다. 이러한 명문학교에 히사히토 왕자는 무시험 전형으로 입학하여 학부모들과 학생들의 원성을 샀다.

이렇게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내내 입학 과정이 수상쩍고, 아버지와 누나들의 전례도 있다 보니, 히사히토 왕자의 대학 진학 역시도 마찬가지이리라고 전망되고 있다. 키코 비는 아들을 도쿄대학에 보내려고 하며, 도쿄대학에서 (히사히토 왕자를 염두에 두고) 추천입학전형을 도입한다고도 전해진다.

품성[편집 | 원본 편집]

태어나면서부터 남자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냐오냐 떠받들려 자란 히사히토 왕자가, 과연 올바른 품성으로 자라고 있는지에 대한 비판도 있다.

큰누나 마코 공주는 2011년 10월 23일 성년(만 20세) 기념 기자회견에서 “아버지께서 예전에는 화를 잘 내셨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작은누나 카코 공주도 2014년 12월 29일 성년 기념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단점으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도화선이 좀 짧은 편이어서,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이기도 합니다.”라는 문제를 언급했다. ‘후미히토 왕자가 화를 잘 내고 다혈질인데, 히사히토 왕자를 낳은 후로 좀 누그러졌다’는 소문을, 두 딸이 확인시켜준 셈이다.

2006년 히사히토 왕자가 태어나고 몇 년 동안, 아키히토 일왕과 미치코 왕비는 거의 매일같이 어린 손자의 재롱을 보며 손자를 무척이나 귀여워했으며, 손녀들에게 보여주었던 것보다 더욱 큰 애정을 쏟아주곤 했다. 후미히토 왕자는 2004년 3월 큰딸 마코 공주가쿠슈인 초등과 졸업식 이후로 딸들의 학교행사에는 일절 참석하지 않았지만[13], 아들의 입학식과 졸업식에는 모두 꼬박꼬박 참석하고 있다. 또한 두 딸이 어린 시절에 했다가 꾸중을 들었던 행동을, 아들이 했을 때는 꾸짖지 않는다고 한다. 당연히 딸들은 이러한 편애와 차별에 대해 불만이고, 특히 작은딸 카코 공주가 불만이 많다고 한다. 마코 공주가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남자인 코무로 케이와의 결혼을 무리하게 강행한 것도, 케이에 대한 애정도 있지만 ‘답답한 집을 탈출하고 싶어서’라는 이유도 크게 보인다.

누나들도 집안 분위기에 불만이지만, 사실 히사히토 왕자에게도 결코 좋은 환경만은 아니다. 애초에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는 자신들의 욕심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아들을 임신하여 낳았고, 부부의 금슬은 결혼 초기부터 좋지 않았다. 후미히토 왕자는 자주 을 마셨고, 키코 비는 집안에서 일하는 시종들에게 히스테릭하게 갑질을 일삼았으며, 두 사람은 어린 아들의 앞에서까지 부부싸움을 했다. 게다가 (히사히토 왕자가 11살이 되던) 2017년부터 시작된 큰누나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로 집안 분위기는 더욱 나빠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귀엽기만 하던 어린아이 시절을 지나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히사히토 왕자의 성격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하나둘 나오고 있다. 집안의 시종들, 학교에서 만나는 다른 학생들, 심지어 자신보다 15살이나 많은 큰누나 마코 공주에게도 함부로 대한다고.

각주

  1. 1969년 4월 18일 구로다 사야코(55세), 1981년 12월 20일 아키코 공주(42세), 1983년 10월 25일 요코 공주(40세), 1986년 3월 8일 쓰구코 공주(38세), 1988년 7월 22일 센게 노리코(35세), 1990년 9월 15일 모리야 아야코(33세), 1991년 10월 23일 코무로 마코(32세), 1994년 12월 29일 카코 공주(29세), 2001년 12월 1일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22세)
  2. 태반이 산도를 막고 있는 증상
  3. 아키히토 일왕의 사촌동생인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의 아내. 노리히토 왕자는 생전에 나루히토 왕세자와 친했다.
  4. 나루히토 왕세자는 1960년 2월 23일생, 마사코 왕세자비는 1963년 12월 9일생
  5. 일본의 전통 시(詩).
  6. 노리히토 왕자와 히사코 비의 장녀
  7. 2013년 3월 이세신궁 참배에는 부모뿐 아니라 가쿠슈인 여자고등과 졸업을 며칠 앞두고 있던 작은누나 카코 공주도 함께했다. 큰누나 마코 공주는 당시 영국 유학 중이라서 참석하지 못했다.
  8. 사촌누나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가쿠슈인 ‘유치원’ 시절에 참가했던 ‘공굴리기’ 등.
  9. 일본 왕실에서는 시집가는 공주에게 지참금을 준다.
  10. 당시 가쿠슈인 여자고등과 졸업을 며칠 앞두고 있어, 교복을 입고 참석했다.
  11. 큰누나 마코 공주는 당시 영국 유학 중이었다.
  12. 일본에서는 어린이집을 보육원(保育園)이라고 부른다. 한국의 보육원(고아원)은 保育院이라고 쓴다.
  13. 이후 두 공주의 입학식과 졸업식에는 어머니 키코 비만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