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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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하가 차남 장자크 홍 푸안 씨를 안고 기뻐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 하단에 프랑스어로 '아버지와 나 1943년'이라고 적혀 있다.

洪在厦.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홍재하는 1892년 1월 18일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195번지에서 부친 홍완섭과 모친 함종 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서울 배제학당 유학시절 구길회와 혼인하고 어린 자녀까지 태어났으나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꾀하다가 검거망이 좁혀오자 1913년 만주를 거쳐 러시아 무르만스크로 망명했다. 이후 무르만스크의 철도공사 현장 등지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홍재하 등 한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이곳을 점령한 영국군을 따라 우여곡절 끝에 에든버러까지 흘러 들어갔다.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는 황기환 서기장을 영국에 급파했다. 당시 영국과 일본은 영일동맹을 맺고 있었기에, 자칫하면 홍재하 등은 일본으로 송환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기환의 노력으로 홍재하 등 35인은 1919년 프랑스로 이송될 수 있었다.

이후 홍재하는 프랑스 최초의 한인단체인 '재법한국민회' 결성을 주도해 이 단체의 2대 회장을 맡았고, 프랑스에서 동료 한인들과 함께 1차대전 전후복구 노동으로 힘들게 번 돈을 갹출해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 보내는 등 자금책 역할도 했다. 또한 1920년에는 프랑스에서 3.1 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그 후 1920년대에 파리의 미국인 사업가의 집사를 맡았고, 어느 프랑스인 여성을 만나 가정을 꾸린 뒤 벌어들인 돈을 지속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냈다. 현재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황기환 서기장이 돈을 모아 보내준 것에 대해 홍재하에게 감사를 표하는 친필편지가 홍재하의 차남 장자크 홍 푸안 씨에게 보관되어 있다. 또한 홍재하의 유품에서는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통령에서 탄핵당한 사실을 알리는 '독립신문'의 호외본도 확인되었다.

홍재하는 프랑스 여인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고, 8.15 광복 후 처음 설치된 주불 대한민국 공사관 문서의 체류목적을 적는 난에 "국속을 복슈허고. 지구상 인류에 평등허기를 위허여"라고 적었다. '국속'을 '國束'으로 읽는다면,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것에 복수하고 인류 평등에 공헌하고자 프랑스로 건너왔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는 그는 한국이 해방된 뒤에도 귀국하지 못했고, 고국이 6.25 전쟁에 휩싸이자 비탄에 빠졌다. 그러다 마음을 다잡고 전쟁 구호물자 조달에 매달렸고, 휴전 뒤엔 귀국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1960년 2월 10일 파리 교외 콜롱브 자택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프랑스 파리 근교 콜롱브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사후[편집 | 원본 편집]

홍재하의 차남 장자크 홍 푸안 씨는 부친의 유품인 각종 서신과 기록들의 뜻을 풀어보려고 한국 대사관에도 접촉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면서 주위에 아는 한인도 없어서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조명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1971년 한 일간지가 홍재하의 프랑스 내 독립운동을 조명해 그의 삶을 비교적 상세히 보도한 적이 있지만, 이후 그의 공적을 조명하는 작업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거의 진전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 2018년 국가보훈처가 장자크 홍 푸안 씨와 처음으로 연락이 닿으면서 비로소 홍재하의 독립운동 행적이 밝혀질 수 있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2019년 홍재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장자크 씨는 2018년 10월 30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부친이 눈을 감으신지 60년이 돼가는데 이미 너무 늦은 것 아닌가. 그래도 아버지가 그렇게 바랐지만 끝내 못 이룬 고국행이 지금이라도 꼭 이뤄지면 좋겠다"며 끝내 눈물을 보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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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