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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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공화국이탈리아토스카나 지방에 존재했던 과두정 공화국이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술라 혹은 카이사르가 건설한 것으로 전해지는 로마 제국의 도시 플로렌티아(Florentia)에서 기원한다. 플로렌티아는 퇴역군인들을 위한 도시로 계획되어 번영을 누렸으나 서로마 제국 말기 이민족의 침입으로 황폐화되었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 형성된 이탈리아 내륙교역로의 요충지에 위치하게 되면서 다시금 번영하게 될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12세기 초까지는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해있는 자치도시였으나 기벨린파와 구엘프파의 대립 당시, 토스카나 후작령을 관할하던 카노사의 마틸다 백작 편에 서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4세와 각을 세우고 대결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독립된 공화국이 되었다. 비록 신성 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침공에 의해 잠깐 재복속되기도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독립을 회복하였다.

공화국의 성장[편집 | 원본 편집]

초기 피렌체 공화국을 장악한 집단은 토착귀족인 노빌레(Nobile)들로, 이 도시는 이들의 통치를 받았다. 이들은 피렌체 인근의 토지를 보유한 대지주 기사계급들로, 그들의 부를 토대로 하여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도시의 폭발적인 성장에 힘입어 실력을 키운 도시 상공인들에 의해 이들의 지배는 도전을 받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도시간, 그리고 도시 내부의 계층간 기벨린(신성 로마 제국 황제파)과 구엘프(교황파)로 찢어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벌이고 있었고, 피렌체도 이의 예외는 아니었다. 피렌체의 귀족들은 기벨린 측에 섰으며, 중산시민들은 구엘프 측에 섰고 서로 반목하다 1250년 시민계급의 혁명을 계기로 귀족들이 피렌체에서 축출당하였다.

이를 계기로 피렌체 공화국은 구엘프 파로 돌아섰고, 이는 이탈리아의 기벨린 파 도시들과의 분쟁을 야기하였다. 특히 같은 토스카나 지방에 위치해 있는 전통적인 라이벌 시에나(Siena) 공화국과의 대립이 첨예해졌다.

당시 시에나는 유럽 금융의 중심지였으며, 주요 산업인 직물업, 석공업 분야에서도 피렌체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1260년 피렌체 공화국은 같은 구엘프 파 도시국가들과의 연합을 통해 시에나를 굴복시키고자 선전포고를 하였고 시에나에서 5km 정도 떨어진 몬타페르티에서 기벨린 연합군과 일전을 벌였으나 기벨린 파인 시칠리아 왕 만프레디의 활약으로 인해 대패하였다. 추방된 피렌체의 귀족들은 이 전투에서 시에나 측에 붙었고, 결국 시에나 측의 승전함에 따라 이들은 피렌체로 개선하여 다시 피렌체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미 시민계급의 힘은 귀족들이 함부로 억누르지 못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고 로마의 교황과 피렌체의 기독교인들의 지지까지 등에 업고 있었다.

결국 1282년 시민계층은 또 다시 혁명을 일으켜 귀족들을 다시금 몰아내고 '정의의 법률'을 제정하여 과거 시에나 측에 가담한 피렌체의 72개 귀족 가문 중 55개 가문의 시민권을 박탈하였다. 이는 그들의 정치적 권리의 소멸을 의미했다. 중세 귀족 흉내를 내던 피렌체의 귀족들은 이로 인해 일대타격을 입었고, 상공인들이 이 도시국가의 명실상부한 실세로 자리잡게 된다.

피렌체의 시민계급이 지배계층으로 부상한 13세기 후반, 시에나의 대은행가문인 본시뇨리 가문이 몰락하면서 유럽 금융업의 패권이 피렌체로 옮겨가게 되었다. 전 유럽의 돈이 피렌체의 은행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피렌체의 화폐인 플로린(혹은 피오리노)은 유럽의 기축통화가 되었으며, 피렌체의 은행들은 이탈리아 도시들은 물론 프랑스, 저지대, 심지어 잉글랜드에까지 지점을 개설하였다.[1] 14세기 피렌체의 직물산업은 20,0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고, 피렌체의 인구는 10만명에 육박하여 유럽 유수의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새로이 경제강국으로 떠오른 피렌체로 이탈리아 각지의 상인들이 이주하였으며, 메디치 가문도 이 상인들의 행렬을 따라 피렌체로 이주하였다.

공화국의 위기[편집 | 원본 편집]

북서유럽에서 발발한 백년전쟁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군주들로 하여금 막대한 군자금을 필요로 하게 만들었다. 잉글랜드의 국왕은 런던에 지점을 운영하고 있던 피렌체 은행들로부터 200만 플로린에 이르는 막대한 군자금을 대출하였다. 이는 당시 잉글랜드 왕실의 경제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채무규모였고, 당연하게도 떼 먹히게 된다. 이로 인해 피렌체 금융가가 공황상태에 빠졌고, 이에 따라 피렌체의 금융 중심지 지위가 위태로워졌다. 게다가 1347년 이탈리아에 상륙한 흑사병의 영향으로 도시 인구의 30% 이상이 사망하는 참사까지 겹쳤다. 흔히 흑사병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질병 자체로 인한 피해보다는 질병 확산에 의해 패닉 상태에 빠진 폭도들에 의한 인한 인명 피해가 더 컸다. 가뜩이나 금융업 침체로 인해 부침하던 공화국 정부는 흑사병으로 인한 치안유지활동을 위해 민병대 인원을 증원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위해 증세 정책을 실행하여 대중의 불만을 사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공화국은 1362년 피사와의 전쟁을 치렀으며, 1375년에는 교황령의 확장주의 정책에 경계심을 느낀 피렌체의 공화국 정부가 밀라노, 시에나와 연합하여 교황령과의 '8성인의 전쟁'에 돌입하였다. 8성인의 전쟁 당시 교황령은 피렌체 공화국을 파문하였다. 피렌체 공화국은 이에 대한 응수로 피렌체 내의 교회재산들을 압류하여 교황 용병대의 대장인 존 호크우드(John Hawkwood) 매수에 유용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성직자들과 열성적인 카톨릭 신도들의 불만까지 사게 되었다.

결국 공화국 정부에 염증을 느낀 시민들은 1378년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치옴피의 난이라고 부른다.

치옴피의 난[편집 | 원본 편집]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상당한 경제적인 성공을 이룩하여 주요 가문 중 하나로 부상하였다. 메디치 가문의 일원인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Salvestro de' Medici)는 정의의 기수로 뽑힌 후 반(反)구엘프적인 개혁의 일환으로 귀족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 대 아르테와 인민 평의회의 권력을 줄이는 법안을 추진하여 대 아르테 소속 실세들의 정치적 공격을 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집권층의 실정에 불만을 갖고 있던 소 아르테 소속인들과 도시 서민들이 메디치 측에 가세하여 대규모 폭력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가 바로 치옴피의 난이다.

도시의 하층민들, 특히 직물산업 노동자들이 주가 되어 발생한 치옴피의 난은 1378년 5월에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그럭저럭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되었으나, 6월부터 성난 군중들이 공화국 실세들의 저택에 불을 지르는 폭력양상을 띄게 되더니 7월에는 폭도들이 아예 정부청사를 장악해 버렸다. 이로 인해 피렌체 공화국 정부는 노동자 계급에 의해 접수되어 버렸고, 이들은 반란의 주도자인 미켈레 디 란도(Michele di' Lando)를 정의의 기수로 내세워 프롤레타리아 정부를 수립하였다.

미켈레 정부는 서민들의 부채를 탕감하고, 하층민들에게 부과된 세율을 낮추는 등의 개혁에 착수하여 피렌체의 서민층은 혁명의 달콤한 결과물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신정부는 수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급진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대립하였고 그들끼리 유혈투쟁을 벌이게 되어 쇠락을 자초하고 말았다.

이는 기존의 지배계층인 대 아르테에게 반격의 빌미를 주었다. 대 아르테 계층은 서민층의 봉기를 막을만한 충분한 무력이 없었다는 사실을 통감하고 경찰력을 대대적으로 증원했으며, 피렌체 직물 노동자들의 정치적인 입김을 약화시키기 위해 유럽의 다른지역에서 노동자를 수입하여 이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였다. 결국 대 아르테는 프롤레타리아 정부를 무너뜨리고 혁명의 주동자 160여명을 사형에 처하는 한편, 미켈레와 살베스트로를 추방하여 피렌체 공화국을 원 상태로 되돌렸다.

비록 서민들의 정치적 투쟁은 결과론적으로 실패했지만, 서민들은 그들 편에 선 메디치 가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지배[편집 | 원본 편집]

메디치 가문은 한미한 상인 가문으로 시작하였으나, 메디치 왕조의 실질적 창시자인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cidi)에 의해 피렌체의 유력 상인가문으로 발돋움하였다.

1340년대에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은 결코 단발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종종 재발하여 유럽인들을 괴롭혔다. 1380년대에 흑사병이 피렌체에서 재발하자 조반니는 흑사병으로 인해 가치가 폭락한 피렌체 인근의 부동산을 대량 매입하였고, 이후 흑사병이 진정되자 가치가 반등한 부동산을 팔아치워 대규모의 수익을 올렸다.

조반니는 결혼도 성공적으로 하였다. 그는 롬바르디아의 부호귀족가문 출신인 피카르다 부에리라는 여성과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자태도 아름다웠지만 무엇보다도 결혼 지참금으로 1500플로린에 이르는 거금을 들고 왔다.[2][3] 조반니는 피카르다가 들고 온 결혼지참금을 자본으로 하여 로마에 은행을 설립하였고, 이 은행이 성공을 거둬 1397년에 자신의 근거지인 피렌체에 은행을 세워 이 곳으로 본점을 옮겼는데, 이 은행이 바로 메디치 은행이다.

조반니는 로마에서 은행을 운영하던 시절에 당시 추기경이었던 발다사레 코사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고, 훗날 발다사레가 교황(요안네스 23세)으로 즉위하자 교황령은 서유럽 각지에서 교황령으로 들어오는 자금의 관리권을 메디치 은행으로 위임하였다. 이는 두말 할 것없이 메디치 은행에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 줬고, 메디치 가문은 1410년경에 피렌체 제 3의 부호가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피렌체 공화국은 정계와 재계가 밀접하게 유착된 국가였고, 이로 인해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 위상도 강화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치옴피의 난 당시 메디치 가의 행보를 기억하는 대 아르테의 경계도 심화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다른 피렌체 유력가문들의 집중견제를 받고 몰락할뻔 했으나, 당시 메디치 가문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교황청과 베네치아 공화국 등 이탈리아 지역강국들의 쉴드 덕에 이를 모면하고, 결국 쿠데타에 성공하여 파치 가문을 비롯한 유수 가문들을 정계에서 몰락시키고 피렌체의 사실상의 지배가문이 된다. 새로이 피렌체의 주인이 된 로렌초 데 메디치는 자신의 통치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피렌체의 예술 진흥에 아낌없이 투자했고, 이 시기에 피렌체의 문화는 그 정점에 달하게 된다.

피렌체를 지배하던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후손들은 이탈리아 전쟁당시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지못해 피렌체의 정치에서 영원히 추방당할뻔 했으나, 스페인의 힘을 빌려 다시 피렌체를 장악한 후 공화제를 폐기하고 자신들의 공국을 이 도시에 건설했다. 이로 인해 피렌체 공화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정치[편집 | 원본 편집]

이탈리아에는 노빌레(Nobile)라 불리는 토착귀족층이 존재했다. 이들은 게르만족의 이탈리아 침공에 맞서 싸운 기사들로, 그 공로를 인정받아 교황으로부터 '교회의 기사'라는 칭호를 받은 계층들이었다.

그러나 피렌체 공화국은 (비록 매우 제한적이었기는 했지만) 민주적으로 운영되었고, 공화국 의회의 의원들은 투표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제 아무리 귀족이라고 할지라도 표를 얻지 못하면 의원으로 선출될 수는 없었다. 의회에 출마할 자격을 가진 시민은 피렌체의 주요 가문들 출신 뿐이었다. 피렌체에서는 귀족이 아니지만 의회에 출마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파트리치아(Patrizia)라고 불렀다.

피렌체 공화국의 인구는 50만명에 달했으나 그 중 투표권을 가진 시민의 수는 3,000여명에 불과했는데, 이는 동업자조합인 아르테(Arte)에 가입되어 있는 30세 이상의 남성들만이 투표권 행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의회인 인민 평의회(Capitani di Parte)와 집행기관인 총무회에서는 대 아르테 소속자들이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였으며, 피렌체 공화국의 수반인 정의의 기수(Gonfaloniere di Giustizia) 직에는 항상 대 아르테 출신자만이 당선되었다. 정의의 기수는 피렌체 공화국의 국가원수이나 임기가 2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아르테에서 선출된 이상 그들의 이권을 대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권력은 약했다.

사회[편집 | 원본 편집]

아르테(Arte)[편집 | 원본 편집]

아르테(Arte)는 이탈리아 도시에 존재했던 동업조합이다. Arte의 어원은 '일, 기술, 직업'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인 Arte이다.

근대적인 경찰제도가 없던 중세시대 유럽의 부유한 지주들은 사병을 거느리고 그들 스스로의 신변과 재산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고, 일반 농민들은 지주들과는 달리 사병을 고용할 돈조차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지주들로부터 땅을 빌려 소작을 하는대신 지대를 바치는 방법으로 지주의 '안보우산'에 편입되었다. 지주들은 또 다시 영주들과 비슷한 형태의 쌍무계약을 맺었으며, 영주는 또 상위 영주와 이러한 계약을 맺었다. 즉, 중세유럽의 봉건질서는 이와 같은 농촌의 질서가 다층적, 다단계적으로 체계화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봉건제도가 수립된 왕국들과는 달리 피렌체와 같은 이탈리아나 네덜란드의 도시국가들에 거주하는 시민들은 이러한 안보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신변 안전을 위해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끼리 조합을 결성했는데, 이 조합을 이탈리아에서는 아르테(Arte)라 불렀고, 네덜란드에서는 길드(Guild)라고 불렀다.(후자가 더 잘 알려진 중세 도시국가 동업조합제도의 명칭이다.)아르테는 조합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의료 보험, 교육, 노후 연금 등을 책임졌는데, 이는 현대 복지국가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며 현대 유럽의 조합주의도 여기서 연원한다.

피렌체에는 22개의 아르테가 존재했고, 이 아르테는 대(大)아르테와 소(小)아르테로 나뉘었는데, 대 아르테는 상업, 금융업, 직물업, 의약업, 법률업자 등 8개의 아르테로 구성되었으며, 소 아르테는 정육점, 주점, 목공, 석공 등 14개의 아르테로 구성된 조합이었다. 아르테는 피렌체에서 관습적인 제도를 넘어 법적인 제도로 정착했고, 아르테에 가입한 자들만이 선거권과 피투표권을 가질 수 있었다(그러나 모든 아르테 가맹자들이 선거권을 갖는 건 아니었다). 시민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의원을 선출할 때에도 아르테별로 할당수를 안배하여 선출하였다. 그러나 과두정 국가답게 막강한 재력을 갖춘 대 아르테 소속시민들이 정부 의석의 대다수를 점유하여 피렌체 공화국의 실세로 군림하였다.

각주

  1. 지금도 런던의 금융중심가에는 롬바르드 가라는 거리가 있는데, 이곳이 과거 이탈리아 은행가들이 거류하던 지구였다.
  2. 이탈리아에서는 결혼 시 신부 집안 측이 결혼지참금을 가지고 오는 것이 관례였다.
  3. 당시 1500플로린은 군소도시국가의 1년 예산과 맞먹는 금액이었으며, 유럽의 대다수 하층민은 1인당 연 수입이 1플로린 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