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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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독립운동가, 재건교회 첫 여성 목사. 신사 참배 반대 운동과 교회 재건 운동을 이끈 인물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초년기[편집 | 원본 편집]

1901년 음력 6월 25일 경상남도 통영군 길야정(현재 통영시 항남동)에서 경주 최씨 최익문[1]김해 김씨 사이에서 출생했다. 부친 최익문은 통영에서 갓을 만드는 일을 했다.

통영갓은 조선 14대 임금 선조 37년(1604) 두룡포에 삼도수군통제영과 함께 공방이 설치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이곳에서 관급 기능공을 양성하여 갓을 군, 관, 민에게 보급하였고, 조선 말기 양반이 증가하였고 고종 32년(1895)에 천인층에게도 갓을 쓸 수 있도록 함으로써 갓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통영갓은 전국적인 특산품으로 대량 제작되었다. 통영 갓을 생산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장인으로서 우대를 받았고, 경제적인 안정도 누렸다. 최덕지 역시 부친이 공방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1914년 6월 21일 통영 대화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때 거주 지역은 길야정으로 표기되었다. 이후 대화정(현 문화동)으로 이주했으니, 그녀는 적어도 14년간 길야정에서 거주하였다. 길야정은 청루가 있던 곳으로 구한말에 일본인들이 증가하면서 유곽이 형성되어 많은 술집이 들어섰고, 일식 요리점 및 음식점도 숱하게 들어왔다. 그녀는 이렇듯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고 유곽히 형성된 지역에서 성장하여 조선인과 일본인이 마찰을 빛는 걸 숱하게 목격했고, 여성들이 몸을 파는 광경도 목격했다. 훗날 그녀는 '인신매매, 공창 폐지'를 항상 기도 제목으로 삼았는데, 어릴 때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보인다.

최덕지는 대화정교회에 다닐 때 누구보다도 열심히 전도에 앞장섰으며, 박봉삼, 권남선, 문복숙, 김순이, 양성숙, 진평헌, 박중한, 최봉선, 강상은, 박열순, 최상림 등 인사들과 두루 교류하면서 그들로부터 민족의식을 전수받았다. 또한 1912년 12살의 나이로 통영진명학원에 입학한 이래 4년간 내한선교사로부터 근대 교육을 받으며 '신여성'으로 거듭났다. 1916년 진명학원을 졸업한 뒤 1917년 마산 의신여학교 고등과에 입학하여 2년 6개월간 학교를 다녔다. 민족적 분위기가 강한 이 학교에서, 그녀는 교사 박순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박순천은 원래 이름이 박명련이며, 1917년 3월 동래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뒤 마산 의신여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1919년 3월 22일 3.1 운동을 주동했다가 일경에 체포된 후 풀려난 뒤 신분을 감추기 위해 박순천으로 개명했다. 최덕지는 박순천으로부터 민족의식을 강하게 이식받았고, 1919년 3월 초 통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진명유치원 교사로 일하던 문복숙, 김순이, 양성숙에게 태극기 만드는 작업을 지원했고, 세 사람은 1919년 3월 13일 태극기를 통영민들에게 배부해 만세시위를 벌이게 했다. 이 일로 문복숙, 김순이, 양성숙은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부산 감옥에 수감되었다.

사회운동[편집 | 원본 편집]

얼마 후 부친이 사망하면서 집안의 가장이 된 그녀는 1922년 4월 대화정교회 집사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시기 여전도회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25년 4월에는 기독교 청년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이때부터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오전에는 통영 여성들을 위해 부인반에서 활동했고, 오후에는 유년반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또한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진명유치원 교사로 활동했으며, 1925년부터 1929년까지 도천리와 대화정에서 유치원과 야학운동을 벌였다.

1925년 2월 10일 대화정교회 제41회 당회에서 도천리 구역 권찰로 임명된 뒤, 1926년부터 유치원과 야학을 경영했다. 1928년에는 대화정교회에서 아동 10명으로 동부유치원을 설립하여 소년, 소녀와 부인들의 교육에 힘썼다. 그녀는 유치원과 야학에서 한글, 산수, 역사, 노래 등을 가르쳤다. 또한 유치원이 끝나면 각 가정을 일일이 방문하여 여성도 배워야 인간 구실을 할 수 있고, 여성이 교육을 받아야 한민족이 자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밤에 여성들을 야학에 초대해 기독교를 전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최덕지는 비단 기독교 계열에서만 활동하지 않고, 통영에서 조직된 대부분의 여성운동단체에 가담하여 왕성하게 활동했다. 최종규의 <이 한목숨 주를 위해-최덕지 목사 전기>에 따르면, 최덕지는 상해독립단 통영원조회에 가입해 활동했다고 한다. 최종규에 따르면, 이 단체 구성원들은 모두 12조로 나뉘어 통영, 하동, 사천, 고성, 김해, 양산 등 각 지역을 분담하여 군자금을 모집한 뒤, 통영 김필애, 김해 이갑성 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했다고 한다.

그녀는 1926년 1월 2일에 조직된 통영여자청년회에 가담했다. 이날 열린 임시총회에서, 최덕지는 임원 선거시 서기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1926년 8월 9일 통영여자청년회 제1회 정기총회에서 조선사회단체 중앙협의회 및 사상단체의 통일적 기도기관인 '조선사상총동맹'에 가입하기로 결정되었을 때, 최덕지는 임원으로 선출되지 않았다. 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녀가 사회주의 성향이 강해진 통영여자청년회에서 나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 기독교 여성 중심으로 결성된 통영부인회에 가담하여 1928년 8월 24일 김마리아의 사회로 임원회 및 부흥총회가 개최되었을 때 서기를 맡았다. 또한 1929년 6월 7일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의 통영지회가 설립되었을 때 참가하여 집행위원장과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자신의 집을 근우회 통회지회의 임시사무소로 사용했다. 그러나 1929년 11월 11일에 개최된 근우회 통영지회 제2회 임시대회에서 선출된 임원에는 포함되지 않았는데, 이는 근우회가 사회주의자들에게 장악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최덕지는 1920년대 통영에서 유치원 및 야학 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여성지도자로 부상하였고, 여러 여성 단체에 가담하여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여성운동단체들이 사회주의 경향으로 기울어지고 일제 당국의 통제와 감시가 심해지자, 그녀는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1931년 10월 6일, 이용도 목사가 통영 대화정교회를 찾아와서 일주일간 부흥 집회를 개최했다. 이용도는 1901년생으로, 최덕지와 같은 나이였다. 그는 일찍이 3.1 운동에 참여하고 태평양회의에 한국 독립을 요구하는 문서를 보내는 등 민족운동을 펼쳤고, 1928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 뒤 침체되어 있던 한국교회의 부흥에 앞장섰다.

1931년 무렵, 이병도는 평양중앙교회, 재령동부교회, 경남거창교회, 북간도용정교회, 국자가교회, 투주거우교회, 평양남문밖교회, 함남 영무수양회, 황해도 은율교회, 선천남교회, 북교회, 아현성결교회, 경남통영교회, 사천교회, 충북진천교회, 서울삼청동교회, 중앙천도관, 인천내리교회, 개성남부교회, 화천교회, 평양명촌교회, 산정현 교회 등 가는 곳마다 부흥운동을 이끌엇다. 이용도가 대화정교회에서 집회를 끝낸 후 경남 사천으로 갈 때, 최덕지는 그곳까지 그를 따라갔다. 이용도는 한국의 기독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현대의 교인은 괴이한 예수를 요구하매 현대 목사는 괴이한 예수를 전한다. 참 예수가 오시면 꼭 피살될 수밖에 없다. 참 예수는 저희들이 죽여버리고 말았구나. 그리고 죄의 여구대로 마귀를 예수와 같이 가장하여 가지고 선전하는구나. 화 있을진저, 현대 교회여! 저희의 요구하는 예수는 육의 예수, 화의 예수, 부의 예수, 고의 예수였고, 예수의 예수는 빈의 예수, 영의 예수니라.[2]

이용도는 한국의 기독교가 현재의 권위에서 내려와 민중과 함께 해야 하며, 기도, 개인전도, 열심, 사랑, 용기, 감사, 찬송, 협동, 구도심, 봉사, 가정기도 등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한국의 기독교가 민중과 동떨어져 있는 걸 비판한 것이다. 이는 그만의 주장이 아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가 자본주의 제도를 옹호하고 대중의 계급적 해방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 정체를 철저히 폭로하여 대중이 마수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계는 이를 위기로 여기고 대책을 세우려 했으나 뚜렷한 방안을 찾지 못했다. 게다가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서북 지역 인사들에 대한 남한 지역 교회의 반발이 심했고,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젊은 신학자들 사이에도 갈등과 대립이 심했다.

최덕지는 이런 현실에서 교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촉구하는 이용도의 주장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녀는 신학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1932년 호주장로회 여선교사인 신애미(A.M.Skinner)의 추천을 받아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에 입학햇다. 이 학교는 1923년 3월 평양 경찰리에 설립된 장로교 여성신학교육기관으로, 목회학을 제외한 것 외에는 평양신학교와 같은 교육과정을 밟았다. 목회학을 제외한 건 당시 교장을 맡고 있던 배귀례 선교사가 여성이 목사와 장로가 되는 걸 철저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1933년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 학우회 회장을 맡던 중, 장로교에서 이용도를 이단으로 단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모두가 이용도를 이단시하며 배척했지만, 최덕지만은 그를 변호했다. 그러나 이용도는 면직 처분 당하고 1933년 해주에서 여러 교인들이 던진 돌을 맞고 원산에서 치료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이후 최덕지는 평양 산정현교회로 파송되어 장년반 주일학교를 담당했고, 1935년 22회로 이 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마산선교부로 파송되어 선교사들과 함께 마산지방 83개 교회를 돌보는 전도사가 되었다.

마산선교회에서는 이술연, 이복순, 박경애 등과 함게 활동했으며, 호주선교부 마산지구 산하의 함안군, 창원군, 김해군, 의령군 일대에 흩어져 있넌 83개 교회를 순회하면서 불신자들에게 전도하고, 교인을 심방하고, 가난한 아동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특히 학교에 못 가는 농촌 아이들을 위해 각 교회에 임시학교를 만들어 일주일간 그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가르쳤으며, 여름에는 각 교회들의 여름성경학교를 도왔다. 1936년 12월 9일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에서 경남여자성경학원 이사 및 교사로 임명되어 학원을 운영하면서, 여러 인사들과 두루 교류했다.

신사 참배 반대 운동[편집 | 원본 편집]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일제 당국은 기독교계에 공식적으로 신사 참배에 따라달라고 강요했다. 1938년 2월 총독부의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 발표 이후, 기독교회에 대한 신사참배 압력이 갈수록 강경해졌다. 이에 따라 1938년 이후 내한선교사들 중 남북장로교, 호주장로교 계통에서는 신사참배 불가 입장을 표명하며 기독교계 사립학교를 자진 폐쇄했다. 그러자 일제는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며, 따르지 않는 교회와 성직자를 엄단하겠다고 경고했다.

1938년 9월 9일부터 16일까지 개최된 장로회 제 27차 총회에서, 평양노회장 박응률이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총회 이름으로 발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신사는 종교가 아니며, 또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참뜻을 이해할 분 아니라 개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한다. 따라서 솔선수범하여 신사 참배를 행하고 자진하여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참가함으로써 비상시국하에서의 총후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다하도록 한다.

이에 참가자 전원이 이를 찬성, 가결했다. 이후 기독교인들은 징병제, 정신제 독려 연설을 하였고, 1943년 6월에는 조선군사령부에 육군환자용 자동차 3대의 기금으로 23,221원 28전을 헌납했으며, 비행기 헌납 기념식도 별도로 거행했다. 이렇듯 한국 교회가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신사 참배를 단행하고 자금과 물자를 헌납하고 있을 때, 최덕지는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감행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녀는 신사 참배를 하는 것은 기독교적 정신에 어긋날 뿐 아니라 전쟁에 찬성하는 것이며,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보고, 차라리 목숨을 잃을 지언정 신앙을 저버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1940년 1월 1일, 한상동 목사가 최덕지를 찾아와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할 것을 논의했다. 최덕지는 당시 마산 상남동 제비산 소재의 호주장로회 선교부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경남 지역의 여성들을 설득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때 그녀는 다음과 같은 강령을 세웠다.

1. 신사 참배한 현 노회를 해체토록 한다.


2. 신사 참배한 목사에게 세례받지 않는다.

3. 신사 불참배주의 신도들만의 산노회를 조직한다.

4. 신사 불참배 동지의 상호 원조를 목적으로 한다.

5. 신사 불참배 그룹예배를 드리고 동지 획득에 노력한다.

1940년 3월 5일 부산 항서교회에서 경남 부인 전도회를 소집할 때 임원을 선출한다는 사실을 알고, 3월 1일부터 조직적으로 선거 운동을 전개했다. 3월 1일 염애나, 한상동 등과 회합하여 전주, 부산 지역은 한상동, 김해지역은 염애나, 마산 지역은 최덕지가 담당하기로 했다. 이후 그녀는 3월 3일 마산 문창교회 여성 기독교인들을 회합하여 마지막으로 설교하고, 1940년 3월 5일 개최된 경남여전도회 회합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그녀는 경남여전도회의 조직망을 활용하여 경남 지역 교회를 돌면서 신사 참배 밴대 운동을 벌였다.

최덕지는 먼저 경남부인전도회 회원을 중심으로 경남일대의 교회와 경남여자성경학원 학생들과 연계해 조직화 작업에 주력했다. 경남일대에서는 주로 마산, 진주, 통영, 고성 등을 중심으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그녀는 각 교회를 돌면서 비밀리에 매주 수요일마다 모임을 가지도록 했고, 모임에서 신사 참배를 반대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자신이 선창하면 모두 따라사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1. 신사에 참배하는 신도들이 속히 뉘우치고 올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2. 천황을 비롯하여 1억 국민이 속히 기독교도가 되도록.

3. 평양 옥중에 구금 중인 신사 참배 반대의 동지들이 속히 승리를 얻어 석방되도록.

1941년 11월 중순경, 최덕지는 마산부를 떠날 때 이술연에게 자기가 했던 역할을 맡겼다. 이술연은 그해 12월 중순까지 십여 회에 걸쳐 모임을 가져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그녀는 1940년 4월 초순 조선총독부의 수업 불가령을 거부하고 경남여자성경학원 개학을 단행했다. 학생들에게 신사 참배의 부당성, 장로 박관준이 일본 제국의회에 참가한 이야기 등을 해주면서 그들을 독려했다. 일요일에는 학생 30여 명과 함께 학원 뒷산인 옥봉산에서 기도모임을 가졌다. <판결문>에 따르면, 최덕지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고 한다.

신사 참배와 같이 하나님께 범죄한 자라도 그 죄를 회개하면 사죄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면 어떤 시련에도 승리하게 된다. (중략) 신사 참배는 우상 숭배이니 국가 당국이 아무리 강제, 탄압하더라도 이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1940년 3월 28일, 이인재가 한상동과 회합하여 '이 운동은 반국가적인 운동이므로 경남지방만은 효과가 적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마땅히 전국적인 규모여야 한다'고 주장해 의견 일치를 봤다. 그러던 중 평양 산정현교회의 주기철이 석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남과 평안 남북도를 연결하여 전국적으로 운동을 확대시키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1940년 5월 최덕지를 찾아가 박경애의 집에서 선교사 태매시 등과 함께 남북간의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의 방침을 협의하여 북조선 지역과 같이 행동하기로 하였다.

최덕지의 이러한 활동은 일제 형사들에게 감지되었다. 1940년 4월 9일 경남여자성경학원에서 학생들에게 신사 참배의 부당성을 가르치던 중, 형사들이 난입하여 그녀를 체포했다. 이후 그녀는 17일간 마산지방 유치소에 감금되었다가 4월 26일에 풀려났다. 1940년 6월 23일 진주부 봉래정 101번지 1호에 거주하는 계모 김성심 집에서 박내복, 강신애, 문경업 등 10여 명의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참배를 반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교하던 중 밀고자에 의해 진주경찰서에게 체포되어 며칠간 고생했다.

1941년 1월 중순 재차 검속되었다가 4월 중순경 금식기도로 몸이 쇠약해져 석방되었으며, 1941년 8월 다시 검속되었고, 1942년 2월 통영경찰서에 구속되어 경남 도경찰서로 넘겨진 뒤, 1943년 1월 초순에 평양감옥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옥중에서도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지속했다. 21일간 금식기도를 했는데, 이는 성경의 인물 다니엘이 조국을 위해 21일간 기도한 데서 착안한 것이었다. 김두석은 최덕지의 금식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최덕지 선생은 금식이 주식이 되었으며, 이를 무기로 삼아 감방 문기둥 사이로 다른 사람이 잘 보이게끔 오른편 무릎을 세우고 왼쪽 무릎은 꿇은 채 두 손을 모아 합장한 후 뼈만 남은 앙상한 몰골로 3일이고 4일이고 일주일이고 10일이고 금식기도로서 아침 궁성요배와 정오 묵도 시간을 끝내 이기고 많은 동지들의 신앙을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 김승태, <증언: 어둠의 권세를 이긴 사람들>, p.73.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 네 차례의 예배시간(새벽, 오전 11시, 오후 3시, 저녁)을 지켰다. 이 때문에 일본 교도관들에게 심한 핍박을 받았으나, 이에 굴하지 않았다. 당시 평양형무소에 투옥되어 있던 안이숙은 훗날 <죽으면 죽으리라>를 출간하면서, '최덕지 선생'이라는 별도의 장을 할애해 그녀의 옥중 투쟁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녀는 최덕지에게 느낀 경외심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도 저분 같이 강했으면, 같이 찬송을 크게 부르고 같이 매를 맞고 같이 주리를 틀리고 같이 저주와 욕설을 받고 같이 애썼으면 얼마나 큰 힘이 되었고 위로가 되었겠으며, 또 얼마나 큰 이적을 가져올 수 있게 하였을까 하고 나는 몇 번이나 생각하였다.


(중략)

최 선생은 그야말로 매 맞아 죽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매를 맞아야 하니 그 얼마나 큰 고역인가. 그는 어쩌면 여자로서 그러한 믿음을 받았던가. 그는 매를 맞아 죽으며 일본 귀신을 대적하여 싸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혼자가 아니다. 그를 붙드신 분이 확실하게 그의 편이시다. 그 빛나는 눈, 얼굴, 태도 그것은 나를 놀라게 했다. 나로 하여금 그 별다른 것이 이때까지 보지 못하던 그 신기한 무엇을 보게 했다.

- 안이숙, <죽으면 죽으리라>, p.283~284.

8.15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최덕지는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1946년 초 부산에 도착한 그녀는 남은 인생을 재건 교회 운동에 쏟아붓는다.

재건교회 운동[편집 | 원본 편집]

광복 후, 일제에게 굴복하여 신사 참배를 한 한국 교회 내에서 자성과 반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그러나 교회를 확고히 장악한 인사들은 이를 거부했다. 1938년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 참배 가결을 할 때 총회장이었던 홍택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생활을 했거나 혹은 은퇴 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한 사람의 노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한국민족교회 형성 과정사>, p.514.

이리하여 한국 교회는 세 개 그룹으로 분열하였다. 첫째 그룹은 일제에 부역한 것을 합리화하여 교권 유지에 급급한 교권파(일명 총회파), 두번째 그룹은 기존교회 안에서 우상 앞에 무릎 꿇고 범죄한 죄를 회개하고 교회 개혁을 수행하고자 한 고신파, 그리고 마지막 그룹은 배교한 기존교회와 단절하고 새로운 재건교회를 설립하자고 주장한 재건파였다.

출옥 후 부산에 돌아온 최덕지는 경남노회에서 신사 참배를 가결한 총회 때 부총회장이었고, 해방 후 신사 참배 참회주간의 자숙행사를 원천적으로 거부하고 불참한 김길창이 노회장으로 선출된 것에 매우 실망했다. 김길창은 노회장이 된 뒤 고려신학교 인준을 취소하고 신사 참배 회개 움직임을 거부했다. 이에 분노한 최덕지는 기존노회와 기성 장로교회를 버리고 밖에서 교회재건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녀는 3년간 회개와 자숙의 기간으로 정하고, 그 동안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인사들을 규합했다. 1948년 2월 18일 동래군 기장면 대변리 대변교회에서 예수교장로회 재건교회 임시중앙위원회가 소집되어 30개 교회의 대표 50여 명이 참석했다. 중앙위원회 회장에 강상은 목사, 부회장에 최덕지 전도사가 선출되었고, 중앙위원회 규약과 재건운동의 목표인 3대 주의와 5대 강령이 채택되었다.

3대 주의


1. 여호와께만 충성하자.

2. 철두철미 회개하자.

3. 깨끗한 성전을 지어 바치자.

5대 강령


1. 한국교회는 완전 재건하자.

2. 마귀당은 일절 버리자.

3. 불의와 위선에는 절교하자.

4. 우상은 일절 타파하자.

5. 너도 나도 재건운동가가 되자.

재건교회 임시중앙위원회는 제1회 모임에서 명칭을 '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라고 했다가, 제2회 모임에서는 '예수교 재건교회'로 변경했다. 무슨 교단이나 별도의 조직체를 만드는 게 아니라 교파를 막론하고 회개하고 재건하는 것이 원칙인 만큼, 장로교, 감리교 등 교파를 따지지 말고 예수의 이름 아래 연합된 재건운동을 전개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기 때문이다.

이후 최덕지는 전국적 집회를 인도하며 교회 재건운동을 전개하였고, 1951년 4월 3일 부산교회당에서 소집된 제6차 중앙위원회에서 명예 목사에 추대되었다. 1952년 5월 13일 재건부산교회당에서 중앙위원회가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예수교재건교회 남한지방회가 발족되었다. 이후 최덕지는 1955년 5월 4일 제4회 남한 지방회 셋째 날에 강상은 목사에 의해 안수를 받고 명예 목사에서 안수 목사가 되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여자에게 목사직을 맡기느냐는 반발이 일자, 강상은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여자에게 목사를 주는 것이 아니라, 최덕지 선생에게 준다. 앞으로 50년 후, 1백년 후에 이런 인물이 나면 또 줄지도 모른다.

최덕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오늘 이 총회 석상에서 나 일개인 최덕지에게 목사 안수한다면 안 받겠습니다. 그러나 여자에게 성직을 줄 수 있는 것이 성경적으로 진리냐 아니냐, 줄 수 있느냐 줄 수 없느냐 하는 것을 분명히 결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후 찬반토론이 벌어졌고, 그 자리에서 헌법 기초위원으로 강상은, 최덕지, 김영숙 등을 위촉하여 목사, 장로, 집사 모두 남녀 모두에게 안수 가능하도록 헌법을 수정했다. 이리하여 같은 날 최덕지, 김영숙, 김소갑숙이 함께 목사 안숙을 받았는데, 이들 모두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 출신이었다. 이렇게 해서 재건교회는 한국장로교회 역사상 최초로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한 교회가 되었다.

당시 최덕지를 추종했던 구은순 교인은 그녀의 설교를 모아 1981년 서울 소재 출판사였던 소망사에서 <모든 것 다 버리고>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이 책은 재건교회에서 목사로 활동한 최덕지의 교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설교집 안에 포함된 설교 수는 모두 49편이고, 교장 훈사 1편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 날짜가 표기된 것은 21편이고, 나머지는 날짜가 누락되었다. 날짜 표기가 있는 설교의 연대는 1952년에서 1957년 3월 사이에 펼쳐져 있다. 다만 최덕지는 1956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1957년은 표기 실수로 보인다.

최덕지는 1952년 함안군 대산면 부목교회 부흥회에서 '예베소교회에 보낸 편지'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그녀는 이 설교에서, 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헀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신앙의 사람들이 모인 단체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그녀는 유형적 교회와 무영적 교회를 나누고, 유형적 교회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교회", 혹은 "형식만의 신자"를 의미하고, 무형적 교회는 "천국 교회", 혹은 "교회 안에 있는 참 신자"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재건 교인도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님의 뜻대로 성경대로 사는 진짜 재건교인과 소속만 재건에 속하고 진리대로 살지 않는 가짜 재건교인이 있다고 주장했다.

최덕지는 여러 설교에서 재건 제단과 마귀당을 구분했다. 재건 제단은 과거의 지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교회이나, 마귀당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을 갖지 못한 자들의 집단체요, 마귀신이 점령한 곳"이라 정의한다. 그녀는 한국 교회가 50년 동안 고이 자라났으나 하나님의 법대로 하지 않고 신사 참배하므로 일제에게 넘어져 버려서 마귀당이 되어 버렸다면서, "재건 제단을 통하여 한국에 무너진 제단을 수축해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편, 최덕지는 현실교회가 재건교회를 율법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을 언급하며, "재건교회는 게명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에 감격하여 기쁨을 계명을 지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극단의 길을 걸었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절교를 강조하는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1. 성경에 이르기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하였다.[3]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


2. 먹물을 가까이 하면 묻어 검어지기 쉽듯이, 자연히 남의 말을 들어서 다르고, 아니 들어 다르다.

3. 자극을 주어 상대를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듯 재건교회 목사로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던 최덕지는 부산재건교회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1956년 5월 13일 병세가 악화되면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55세.

최덕지 사후, 재건교회는 인맥과 기존 교회의 관게를 둘러싸고 여러 차례 분열되었고, 결국 일부는 기성교회로 편입되고 나머지는 1974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재건교회로 통합되었다. 통합 당시의 교세는 노회 2개(서울, 부산), 교역자 목사33명, 전도사 40명, 장로 70명, 교인 수 12,000명이었다. 이후 교세를 조금씩 확장하여, 현재 서울노회, 부산노회, 영남노회, 서부노회, 미주노회의 5개 노회가 결성되었고, 전국에 107개 교회, 목사 88명, 장로 119명을 갖추고 있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최덕지는 현재까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종교계에선 최덕지의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은 독립운동과 직결되므로 건국훈장을 서훈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2019년 3월 6일, 항일여성독립운동 신앙인 최덕지, 안이숙, 조수옥 재조명 학술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자유한국당 이주영 국회부의장과 더불어민주당 김진표 의원, 바른미래당 이혜훈 의원 등 정치인들과 사단법인 아침이 세미나를 주최했다.

세미나는 세 사람이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벌여 일제에 맞서다가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른 사실을 거론하며, 이들의 공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날 세미나 한쪽에서는 정부가 세 사람을 독립운동가로서 서훈하라고 촉구하기 위한 서명운동이 진행됐다.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국가보훈처,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고신, 재건 총회,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 등이 행사를 후원했다.[4]

각주

  1. 최종규의 <이 한목숨 주를 위해-최덕지 목사 전기>(대한예수교장로회재건교회)에는 '최익문'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통영 충무교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세례명부>에는 '최익겸'으로 기록되어 있다.
  2. <이용도 일기>, 1930년 2월 20일자.
  3. 데살로니가후서 3장 6절.
  4. “신사참배거부도 독립운동” 종교인들, 서훈 촉구 - 천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