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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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良弼. 이명은 정영필(鄭永弼).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정순만의 아들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3년 12월 1일 충청도 청주목 서강외이하면(현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에서 독립유공자 정순만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정순만은 개화파 인사로, 이승만, 박용만과 친분이 무척 두터워 의형제를 맺을 정도여서 세간으로부터 '삼만'이라고 불렸다. 그는 1905년 2월 박용만 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고, 1906년 박용만의 숙부 박장현(朴章鉉)을 비롯하여 유일한·정한경 등과 함께 미주 중서부지역인 네브라스카주 커니시에 취역하여 커니중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1909년 6월 박용만이 미국내 최초의 한인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를 설립하자, 이에 입교하여 동교 야구팀 및 육상팀 군사훈련부 등에서 활동하며 장차 독립전쟁 발발시 항일투쟁에 필요한 사관생도로서 전투훈련 수업을 받고 졸업하였다. 한인소년병학교 졸업 후 1913년 가을 네브라스카주립대학에 입학하여 농학특업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19년 4월 13일 대표들이 서울에서 비밀회의를 갖고 국민대표 25명과 함께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 각원을 발표할 때 평정관(評政官)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디트로이트에서 서울식당을 열었고, 1921년에는 라초이 회사에서 일한 뒤 1922년 안재창, 조오흥과 함께 청안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1925년에는 미시간주에 등록한 주식회사로 바꿔 사업을 크게 성공시켰다.

1942년 12월 당시 북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디트로이트 지방총회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42년 1월부터 6월까지 수차례에 걸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1974년경 디트로이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정양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