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호 (1981년)

이승호
이승호SK.jpg
인물 정보
출생 1981년 9월 9일 (42세)
대한민국 전라북도 군산시
국적 대한민국
프로선수 경력
종목 야구
포지션 투수
소속팀 SK 와이번스 (2000~2011)
롯데 자이언츠 (2012)
NC 다이노스 (2013~2015)
SK 와이번스 (2016)

이승호(1981년 9월 9일~ )는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이자 야구 코치다. SK 와이번스의 초대 에이스 투수로, 등번호는 쌍방울에 잠깐 입었던 등번호를 제외하면 20번을 달았다.

SK 와이번스의 창단부터 홀로 마운드를 책임진 에이스. 이 때문에 별명이 원조 에이스다.

경력[편집 | 원본 편집]

SK 와이번스 시절[편집 | 원본 편집]

군산시 출신으로 쌍방울의 최후의 지명자이다. 그 외 선수들은 대학교를 갖다오거나 SK 소속으로 입단하게 된다.

SK 팀 창단 멤버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송지만의 부상으로 대타로 출장하여 병역 특례를 받는다.

2000년도에는 팀 사정상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10승 12패를 기록했다.[1] 평균자책점은 4.51을 기록했고 신인왕을 수상했다.

그 다음 해인 2001년에는 220⅔이닝을 던져 14승 14패 2세이브를 기록했다. 평균자책점은 3점대로 마무리했다.[2]

2002년은 평균자책점이 작년과 비슷하게 3점대를 비슷했으나 타자들의 처참한 부진으로 6승밖에 기록을 못하고 12패를 기록했다.

그 이후 2004년까지는 매년 팀의 중심 투수로 활약했으나 2004년 15승을 기록한 이후 2005년 팔꿈치 부상을 당해 임의탈퇴가 되면서 우승을 밖에서 지켜보게 되었다.[3]

2008년[편집 | 원본 편집]

팔꿈치 부상을 회복하고 5월달에 1군에 복귀해서 시즌이 끝날때까지 1군에서 활약했다.

전년도에서 활약했던 선발투수를 하지 못하고 주로 중간계투나 마무리로 등판하여 팀의 핵심 불펜이 됐다!

이 당시 한국시리즈에서는 4홀드를 기록하고 평균자책점도 1.59를 기록해 팀의 두번째 우승을 맛보게 되었다.

2009년[편집 | 원본 편집]

팀의 핵심불펜으로 활약해 106이닝을 기록하며 6세이브 7홀드를 기록했다.

다만 중요한 순간때 실점을 해 조금 팬들에겐 실망감을 주었다.

이 당시 2009 WBC에서 나와서 느린 커브로 상대 타선을 압도했지만 팀은 준우승에 머무르고 말았다.

2010년[편집 | 원본 편집]

초반에는 정대현이 부상에서 회복이 안되자 마무리로 시작했지만 사실상 올포지션으로 활약했다. 20세이브를 기록했지만 89⅔을 던졌다.

이 당시 구원 1위는 손승락의 63이닝밖에 안 됐다. 이 당시에 보기 힘든 4이닝 마무리를 하면서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3차전에 등판해 팀의 위기에서 범타로 처리해 세이브를 따냈다. 참고로 이 당시 승리 투수는 이적생인 이승호가 따냈다.

2011년[편집 | 원본 편집]

4월 LG전에서는 6회에 지고있는 상황에서 구원투수로 등판해 무실점으로 호투했는데 그 다음 타선의 폭발로 승리투수가 되어버렸다.

4월 9일 한화전에서 마무리로 등판했지만 2실점을 했지만 3아웃을 잡으면서 게임을 승리했다

새로운 불펜 에이스인 박희수가 나타면서 이승호는 주로 관리를 할 예정이라 한다.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무실점 호투를 하면서 팀의 한국시리즈에 가는 영광을 토했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1실점을 기록했지만 팀은 준우승으로 마감했다.

시즌을 끝나고 FA를 선언하고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롯데 자이언츠 시절[편집 | 원본 편집]

뜬금없이 4년에 24억원에 롯데 자이언츠에 FA로 떠나버렸다. 보상 선수는 허준혁

하지만 그 당시 너무 굴린 나머지 몸상태가 예전하지가 않았고 딱 저렴한 가격에 잡을러 그랬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FA로 나온 임경완이 SK로 이적하면서 이승호-임경완 트레이드라고 말이 나올 정도였지만 정대현이 롯데로 이적했다.

2012년[편집 | 원본 편집]

스프링캠프에서는 선발투수로 등판할 예정이였고 시범경기에서 주로 선발로 등판했지만 결과는 망해버렸다.

결국 엔트리에도 빠지면서 2군에서 지냈지만 2군에서도 너무 털리면서 FA 실패작을 예상했으나 6월달에 구위를 회복해 1군 엔트리에 들어버렸다.

그 이후 팀의 중요한 상황에 등판하여 무실점 호투를 하면서 FA 모범 사례로 뽑혔다. 같이 이적했던 정대현은 거의 후반기에 올라오고 말았다.

준플레이오프전에서는 위기 상황에서 무실점 호투를 하면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 MVP라고 보면 된다.

친정 SK와 플레이오프전에서 SK를 상대로 섭섭한 발언을 했지만 엔트리 제외로 팀은 패배하고 말았다.

NC 다이노스 시절[편집 | 원본 편집]

NC 다이노스에 특별보호 20인 보호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결국 NC 다이노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이로써 롯데 자이언츠는 1시즌밖에 뛰지못하고 이적하고 말았다.

2013년[편집 | 원본 편집]

초반에도 역시 부진으로 2군에서 뛰었고 NC에서 최초로 먹튀를 전략해 버렸다.

팀의 고참으로써 분위기를 잡아달라고 했으나 부진으로써 2군에만 등판하고 있다.

시즌 마지막 경기 뜬금없이 선발로 등판했지만 3이닝 2자책으로 강판되었고 팀은 5:6으로 승리했다.

최종 성적은 9이닝 11실점 평균자책점이 무려 9.64를 기록하고 말았다. 결국 NC는 땅을 치고 후회할 만하다.

2014년[편집 | 원본 편집]

초반에는 부활에 성공한다는 기사가 떴지만 결국 망해버렸다. 2군에서도 9점대를 기록하면서 은퇴를 바라볼 나이가 됐다.

1군에 콜업이 되지 못하고 퓨처스리그에서도 무려 8점대로 시즌을 마감하면서 방출을 당하게 생겼다.

2015년[편집 | 원본 편집]

초반에는 그냥 몇 경기에 등판했지만 좋은 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방출이라도 해도 말 없을 수준이였지만

2군에서 갑자기 회복하면서 7월에 1군 엔트리에 콜업됐지만 7월 삼성전에서 선발 등판해서 무려 평균자책점이 36점대를 기록하면서

NC 다이노스에 방출당하고 말았다.

2016년 시즌[편집 | 원본 편집]

결국 친정팀인 SK에서 영입하고 말았다.

평가는 대체로 엇갈린데 팀의 원조 에이스이자 홀로 짊어내했지만 롯데로 이적하고 SK에게 까는 인터뷰를 올리면서 평가가 엇갈리다.

2016년에는 1군 등판을 못했는데 전병두의 은퇴식에서 뜬금없이 1군에 콜업됐다. 그러나 팀이 박빙으로 경기가 진행되면서 등판되지는 못했고 은퇴를 하고 말았다.

코치 시절[편집 | 원본 편집]

2017년 현재는 상무 야구단의 투수 코치를 맡고 있다.

갤러리[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그 당시 중심타자는 브리또밖에 위협적이였고 나머지는 그냥 미미한 선수였다.
  2. 그 당시 200이닝을 넘긴 또 다른 선수는 에르난데스
  3. 진짜 임의탈퇴 보다는 서류상으로만 쓴것이다.
  4. 1차 지명을 받은 이후 쌍방울은 해체되고 SK로 넘어갔다. 쌍방울 소속으로 뛴 현역 선수는 이진영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