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순

윤희순.jpg

尹熙順.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의병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60년경 경기도 구리시에서 해주 윤씨 윤익상(尹翼商)과 평해 황씨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부친 윤익상은 인조반정에서 공을 세운 윤희평의 후손으로 유학자였다. 그녀는 어렸을 때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기개가 빼어났다고 하며, 16살 되던 해인 1876년에 춘천군 남면 발산리에 거주하는 고흥 유씨 집안의 유제원(柳濟遠)과 결혼하고 친정에서 살았다. 유제원은 춘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외당(畏堂) 유홍석(柳弘錫)의 장남이고 팔도창의대장 유인석의 조카다. 즉, 윤희순은 춘천의병장 유홍석의 며느리이자 팔도창의대장인 유인석의 조카며느리였다.

<외당(畏堂) 선생 3세록>에 따르면, 윤희순은 시부를 효성으로 모시고 아랫사람을 은애로 거느리며 집안일을 법도에 맞게 처리함으로써 집안이 화목하고 마을이 화평해져 시아버지 유홍석으로부터 효부라는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이 종조부인 유중교(柳重敎)를 찾아가 공부했고 시아버지는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각지를 전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홀로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갔다.

1896년, 시아버지 유홍석이 유중악, 유중락, 이진응, 민영문 등 춘천 유림과 함께 춘천 의병을 일으키고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이때 그녀는 여자들도 나라를 위해 일어나야 한다는 뜻을 밝히며 시아버지가 전쟁에 나설 때 자신도 따라 나서며 의병을 돕겠다고 간청했다. 이에 시아버지는 그녀를 한사코 만류했다.

의병을 하러 갈 것이니 너는 집안에 힘쓰도록 하라. 전쟁에 나가 소식이 없더라도 조상을 잘 모시도록 하라. (중략) 자손을 잘 길러 후대에 충성된 자손으로 길러 훌륭한 자손이 되도록 하며, 너희들은 이런 일이 없도록 해주길 바란다.

결국 집에 홀로 있게 된 윤희순은 뒷산 위로 올라가서 승리를 기원하는 단을 쌓고 시아버지가 무사히 귀가할 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삼경이 되면 목욕재계하고 정화수를 떠놓고 그 앞에서 지성을 다해 축원했다. 그녀는 <외당(畏堂) 선생 3세록>에 기재된 '일생록'에서 축원을 드린 지 10달만에 시아버지가 돌아왔을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열달이 되던 날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반가운 마음 이루다 하오리요. 고생하시던 말씀이 성공도 하였고 실패도 많았노라 하시며 네가 지극한 정성으로 빌었다하니 그 오래도록 그 고생을 하여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렇게 지성이 있었으니 효부 열녀로라 칭찬이 크게 하시나 대담하신 아버님이 더 불쌍하시더라. 겨우 하룻밤을 주무시고 나가시니 얼마나 애통하오리오.

시아버지가 불과 하룻밤만 지낸 후 다시 의병하러 나선 지 며칠 후, 마을에 의병대가 몰려와 밥을 지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윤희순은 식구들이 먹어야 할 쌀은 물론 마침 춘천 숯장수들이 숯을 사기 위해 갖다 놓은 곡식까지 몽땅 털어 저녁밥을 지어주고 군량으로 주어 보냈다. 그날 저녁, 그녀는 마을 안사람들을 모아 놓고 의병 돕기에 나서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교적 전통윤리에 따르는 가정에서 자란 여자들이 즐겨 나서지 않자, 그녀는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모든 여자들이 함께 부르게 했다.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도 뭉치면 왜놈 잡기 쉬울 새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소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없이 소용있나. 우리도 나가 의병하러 나가 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에게 붙잡히면 왜놈 시중 받들소냐. 우리 의병 도와주세 우리나라 성공하면 우리나라 만세로다. 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

이에 여자들이 모두 감동하여 자발적으로 함께 나서기로 했다. 얼마 후 숯장수가 와서 쌀을 내놓으라고 항의하자, 여러 집이 힘을 합쳐 쌀을 변상했다. 이후 윤희순은 비록 여자라도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고 하며 조선 선비의 아내 윤희순의 이름으로 <왜놈대장 보거라>를 지어 향리에 배포했다.

우리 조선사람 화가 나면 황소 호랑이니라. 우리가 너희 놈들 못 잡으면 후대에도 못 잡을 소냐. (중략) 이용도 그만하고 재주도 그만 부려라. 좋은 말로 달랠 때에 너희 나라로 가거라. 대장 놈들아 우리 조선 안사람이 경고한다.

그녀는 또 경고문 <오랑캐들아 경고한다>에서 남의 나라를 침범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고 "무슨 일로 심심하면 우리나라를 괴롭히냐"고 하여 일제의 침략을 조선 안사람의 대표로서 경고한다고 밝혔다. 반면 의병을 진압하는 관군에 대해서는 <애달픈 노래>를 지어 그들의 행동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뜻을 밝혔다.

애닯도다 애닯도다 형제간의 싸움이요. 부자간의 싸움이요. 이런 일이 어디있나. 우리 조선 백성들이 이렇듯이 어두운가. 제 인군을 버리고서 남의 인군 섬길소냐. 우리 조선 버리고서 남의 나라 섬길소냐. 애닯도다 애닯도다 우리 조선 애닯도다. 자기 처를 버리고사 남의 처를 사랑하니 분한 마음 볼 수 없어 내 가슴을 두드리니 내 가슴만 아플소라.

그녀는 또 나라를 구하려는 의병에 대한 관군의 탄압을 애석하게 생각한다는 내용의 <병정가>를 지었다.

우리나라 좀벌래 같은 놈들아, 어디 가서 살 수 없어 오랑캐가 좋단 말인가. 오랑캐를 잡자하니 내 사람을 잡겠구나. 죽더라도 서러워 하지 마라. 우리 의병들은 금수를 잡는 것이다.

또 그녀는 일본군의 부역배를 하는 밀고꾼들에게 경고문 <왜놈 앞잡이들아>를 지어 경고했다.

너희는 어느나라 사람인고. 너희들은 무슨 일로 그다지도 모르는가. 이 나라에서 태어나서 나라에 은혜는 갚지는 못할 망정 제 나라를 팔아먹고 자기 성, 자기 조상, 자기 식구, 자기 몸뚱아리를 팔아서 돈을 벌며 명예를 얻어 어느 곳에 쓴단 말인가. (중략) 후대에 너희 자식, 손자까지 대대로 무슨 낯으로 이 나라에서 산단 말이냐. 후대에 너희 자손이 원망 않도록 하여라.

한편, 그녀는 나라의 장래를 이끌어갈 젊은 청년들에게 의병에 가담하라는 내용의 <방어장>을 지었다.

우리 조선 청년들아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하여 나라 찾자. (중략) 우리 인군 세도 없어 왜놈들이 강성하니 빨리 나와 의병하여 애국하고 충신되자. (중략) 조선의기 청년들아 빨리나와 의병하여 보세. 아낙네도 나와 의병을 도우는데 하물며 우리 청년들이 나라를 잃고 가만히 있을 소냐. 너도 나가고 나도 나가자. 나라 없이 살 수 있나 죽더라도 나가보세. 왜놈들을 잡아다가 살을 갈고 뼈를 갈아도 한이 안 풀리는데 우리 청년들이 가만히 있을 소냐. 나가보세 의병하러 나가보세.

이렇듯 그녀가 여러 글과 노래를 짓자, 자식들은 물론 젊은 청년 새댁들도 불렀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몇몇 부인들과 의논하여 족모에게 집을 봐달라고 하고 자식들을 맡겨 놓은 뒤 남성 의복을 입고 의암댁, 최골댁과 함께 제천의 성재댁을 찾아가 유인석이 이끄는 의병대에 가담한 시아버지를 뒷바라지했다. 그러나 시아버지 유홍석이 유인석 의병부대가 관군에게 거듭 패한 끝에 간도로 후퇴할 때 따라갔고,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유홍석은 유인석의 곁에서 의병들과 함께 하다가 1897년 10월 고종의 칙서를 받고 귀국하는 유인석을 따라 향리인 가정리에 들어와서 후학 지도에 전념했다.

1907년 고종이 일제의 압력으로 퇴위하고 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었다. 이에 유홍석은 1907년 8월부터 유중악 등과 모의하고 가정리 향골에서 유영석, 유제곤, 박선명, 박화지, 유태석 등과 함께 의병 600여 명을 모아 춘천, 가평 등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이때 군자금과 탄약, 군량이 부족하자, 윤희순은 향민으로부터 모금한 자금으로 가정리 여의내골 주산에서 무기와 탄약을 제조 및 공급하는 병기화약 제조장을 설치했다.

이때 부인 30여 명도 자발적으로 참여해 함께 여의내골 주산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의병의 뒷바라지를 해주며 남성 의병들과 함께 훈련에 임했고, 의병의 식사, 빨래, 그 밖에 화약을 만드는 일까지 뒷바라지 했다. 또한 의병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69명의 부인들로부터 군자금 355냥을 거두었다. 그러나 가평 부근 수길리 전투에서 유영석이 패해 전사하면서 의병의 기세가 꺾이자, 유홍석은 잔여 의병을 정비하여 김노수 의병대에 맡기고, 자신은 홍천에서 재기한 박장호 의병대에 가담했다.

그러나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유홍석은 크게 낙담하여 가족 전체가 함께 순국할 뜻을 보였다. 이때 아들 유제원이 죽기보다 요동으로 건너가 후일을 기약하자고 권유하자, 유홍석은 이에 따르기로 하고 유제원과 함께 먼저 떠나고, 가족은 가산을 정리해서 뒤에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이튿날 일본군이 들이닥쳐서 유제원의 부인 윤희순과 아들 유돈상이 잡혔다. 일본 형사가 그녀를 고문하며 유홍석이 간 곳을 밝히라고 요구하자,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다.

나라와 겨레의 광복을 위하여 투쟁하시는 아버님의 가신 곳을 설혹 안다고 하더라도 원수인 네놈들에게 말할 듯 싶으냐!

이에 일본군이 아들 유돈상을 고문하면서 죽이겠다고 협박하자, 그녀는 오히려 웃으면서 대꾸헀다.

어린 자식을 죽인다고 내가 거룩하신 독립투사인 아버님과 자식을 바꿀 줄 아느냐?

이에 일본군이 감탄하여 돌아갔고, 그녀는 아들 돈상, 민상, 교상 등 온 가족을 데리고 그 길로 떠나 중국 요동으로 건너갔다. 1911년 요동에 도착한 윤희순은 요녕성 신빈현 평정산 난천자 고려구에 정착했다. 유홍석이 관전, 환인, 봉성 등지에서 의병을 모으고 유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아들 유제원과 함께 의병 조직에 전념하는 동안, 윤희순은 여성들을 동원해 산에 올라가 초근목피로 생계를 유지했고 중국인들에게도 찾아가 식량을 구걸하여 도움을 받았다. 그녀는 이렇듯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굴하지 않고 이웃 마을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에게 항일 선전을 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해 항일 운동단체에 전달했다.

1912년 초 환인현 팔리전자진 취리두 남산으로 이주한 윤희순은 산에 올라가 황무지를 개간하고 강무를 끌여들어 수전을 개발하여 식량을 조달했다. 그리고 시아버지의 지시를 받들여 이회영, 우병렬, 우병렬의 부인 채인산, 중국인 도원훈과 손홍령의 도움을 받으며 환인현 보락보진 남괴마자에 동창학교 분교인 노학당(老學堂)을 세우고 교장 직을 맡아 학생을 모집하여 인재를 양성했다. 교사는 동창학교의 이극로, 이영포, 이동하가 겸직했고, 교재는 동창학교 본교에서 가져왔다. 그녀는 매일 몇 십리 길을 걸어다니면서 학교 운영에 쓸 자금을 모금했고, 학생들에게 목숨 바쳐 항일운동에 앞장서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항일 애국 노래를 가르쳐 주어 힘과 용기를 불어넣었다.

노학당은 그녀의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1915년까지 김경도, 박종수, 이정헌, 마덕창 등 50여 명의 독립지사를 양성했다. 그러나 1915년 노학당이 폐교되면서 그녀의 노고는 중단되고 말았다. 여기에 사아버지 유홍석이 1913년 12월에 별세했고 1914년에는 남편 유제원의 동생 유제열이 사망했으며, 1915년 정월에는 유인석이 죽고, 그 해 말에는 남편 유제원 마저 병사했다. 이로 인해 윤희순은 이국 땅에서 홀로 남아 아이들을 키워야 했다.

하지만 윤희순은 이러한 시련에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식들을 데리고 환인현을 떠나 무순 포가둔으로 이주한 뒤 자식들을 독립의사로 키우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고, 일본군에게 끌려온 조선 병사를 몰래 빼내어 비밀리에 토굴에 숨겨놓고 식사를 대접한 뒤 독립단으로 보내주기도 했다. 그녀의 차남 유돈상은 조선독립단을 조직하고 중국인들을 끌여들었으며, 만주와 몽고에 흩어져 있는 유홍석의 문인, 친지, 항일운동가들을 찾아 다니며 180여 명의 중국인과 조선인들을 동지로 모집했다. 또한 항일운동가 양성을 위해 조선독립단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국권회복과 항일투쟁에 대해 강의를 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했을 때, 조선독립단은 홍경원 왕청문, 홍묘자, 영릉, 평정산, 석두성, 왕가촌 등지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이후 홍익단과 합세해 국내로 잠입할 준비를 했지만 사전에 비밀이 누설되어 일본군의 급습을 받았다. 조선독립단은 많은 희생자를 기록한 채 패퇴했고, 유돈상은 실의에 빠진 채 돌아왔다. 윤희순은 그런 아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며 다시 일어나려면 많은 애국지사들을 길려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유돈상은 1926년에 음성국, 음성진 형제와 함께 무순에 조선독립단 학교를 세우고 신빈 영릉에 분교를 두어 인재 양성에 진력했다. 윤희순과 음성국은 조선독립단 학생들에게 국권회복과 반일투쟁에 대한 강의를 했고, 유돈상은 군사훈련을 책임졌다. 또한 조선독립단의 김인수, 유석현, 윤병구, 신덕영[1], 이현인 등은 각 곳을 돌아다니며 군자금을 모금해 병기를 구입했다. 학생들은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뒷산에 올라가 군사 훈련을 했다. 당시 주민들은 이러한 그들의 활동을 보고 '가족부대'라 불렀다고 한다.

1930년대 초 어느날 남재구, 허영도가 와서 일본인들이 안 모양이니 이사를 가자고 하자, 윤희순은 이사할 준비를 하기 위해 여러 집 살림을 한 군데 모아 두고 남자들은 시장에 가고 여자들은 저녁 준비를 하게 했다. 이때 일본군과 부역배들이 집에 불을 질러서 모든 살림과 서적, 사당을 태웠다. 윤희순은 손자, 손녀들이 불 속에서 우는 것을 듣고 불 속에 뛰어들어 간신히 구해냈다.

그 후 조선독립단원들은 산속에 숨어지냈으며, 윤희순을 비롯한 여자들은 일본군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윤희순은 석방된 후 한 중국인의 주선으로 10여 명의 여자들과 함께 조그마한 집에서 얻어먹으며 살았다. 얼마 후 아들 유돈상과 유교상이 찾아와서 그녀를 친척 집으로 모셨다. 그러다 아들 유돈상이 다시 조선독립단으로 가고 다른 가족들 역시 각지로 흩어졌다. 윤희순은 이때 죽고 싶었지만 광복이 된 후 자손들이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 단념했다고 한다. 그녀는 <신세 타령>이라는 가사를 지어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슬프고도 슬프다, 이내신세 슬프도다, 이국만리 이내신세 슬프고도 슬프도다, 보이는 눈 쇠경이요 들리는 귀 막혔구나, 말하는 입 벙어리요 슬프고도 슬프도다, 이내신세 슬프도다 보이나니 까마기라, 우리조선 어디가고 왜놈들이 득실하나, 우리인군 어디가고 왜놈대장 활기치나, 우리의병 어디가고 왜놈군대 득실하니, 이내몸이 어이할고 어디간 들 반겨줄까, 어디간 들 반겨줄까,

그러던 1935년 6월, 아들 유돈상이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무순에서 장인 음성국과 함께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나 집에 돌아왔지만 1935년 7월 19일 어머니 윤희순의 품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시아버지와 남편을 여읜 데 이어 귀한 아들마저 잃어버린 그녀는 자손에게 훈계하는 글을 남겼다.

1. 조상님 성묘도 자주 다니며 충효정신을 잊어서는 아니 되느니라.


2. 사람이 해야 할 일 외에는 하지 마라.

3. 시국을 좇아 오륜을 알아야 하느니라.

4. 나 위에는 더 큰 분이 나를 보고 있으니 나만큼 아는 사람이 있을가하고 말을 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5. 누가 무엇을 부탁하거든 선뜻 대답을 삼가하거라.

6. 누가 무엇을 물어보거든 어림으로 대답하지 마라.

7. 마주 앉아 이야기할 때 눈동자를 자주 보지 마라.

8. 앞사람이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의 말이 끝날 때 하느니라.

9. 아랫사람이 인사한다고 앉아서 가만히 안 받느니라.

10. 천민이라도 내 집을 찾아오면 반가이 맞아 주고 반가이 보내 주느니라.

11. 남의 말을 입에도 담지 말며 나의 위치를 생각하고 남의 말을 해야 하느니라.

12. 성재 선생께서도 여순혼사편에 좋은 말씀이 많이 있느니라. 자주 읽어보아라.

13. 걸음을 걸어갈 때 발 밑을 보고 옮겨 디뎌야 하느니라.

14. 모든 정신은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조심이 있어야 하느니라.

15. 매사는 자신이 알아서 흐르는 시대를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살아가길 바란다.

16. 충효정신은 잊어서는 안되느니라.

윤씨 할미가 자손들에게 보내는 말이니라.

1935년 8월 1일, 윤희순은 아들 유돈상이 죽은 지 11일 후에 사망했다. 향년 75세. 그녀의 유해는 혜성현 묘관둔에 매장되었다가 1994년 조국으로 봉환되어 춘천시 남면 관천리 선영에 남편 유제원과 합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윤희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각주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신덕영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