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해빌랜드 마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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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ley Haviland Martin. 캐나다 출신의 장로회 선교사이자 의사.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0년 7월 23일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뉴펀들랜드 세인트 존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6년 캐나다 장로회로부터 선교사의 직임을 부여받고 한국으로 파송되었다. 이후 용정으로 이동하여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의 선교병원인 제창병원에서 병원장을 맡았다. 그러던 1919년 3월 13일 용정에서 한인들이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중국군이 출동하여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이로 인해 수십명의 부상자들이 제창병원으로 옮겨졌다.

마틴은 사망자들의 시체를 병원 지하실에 안치하게 했고, 의료진과 함께 부상자들을 정성껏 치료해줬으며, 사망자들을 위한 합동 장례를 치러줬다. 이후 그는 제창병원과 그 부속건물들을 자주 독립운동을 모의하기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집회장소와 숙박소로 제공해 주었다. 여기서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각종 문서들이 등사판으로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이에 간도 대한국민회는 그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1920년 2월 기념패를 제작해 마틴에게 수여했다.

1920년 10월 일본군간도참변을 자행하자, 마틴은 간호사들과 함께 일본군의 방화 및 학살 현장을 방문해 사진을 촬영했다. 그는 이러한 자료를 기반으로 '노루바위(장암동) 학살 사건' 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일본군의 학살 만행의 진상을 해외에 폭로했다. 이후 1927년까지 제창병원 원장으로 일하던 그는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겸 부속병원 의사로 임명되어 서울로 이동했다. 그는 서울에서도 흉부외과 과장과 세브란스결핵병방지회장을 맡아 한국인 특히 청년층의 고질병인 폐결핵의 퇴치에 힘썼다.

그후 세브란스병원에서 일하던 그는, 미국일본의 전운이 감돌던 1940년 11월 16일 미국인 아내와 함께 마리포사호를 타고 한국을 떠났다. 이후 1941년경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스탠리 해빌랜드 마틴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