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시프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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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
Иосиф Сталин
Stalin.png
초상화
인물 정보
본명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출생 1878년 12월 16일
러시아 제국 그루지야 고리시
사망 1953년 3월 5일 (75세)
소련 모스크바
국적 러시아 제국소련
학력 트빌리시 신학교 중퇴
종교 없음(무신론자)
배우자 에카테리네 스바니제,나데즈다 알릴루예바

이오시프 스탈린(Иосиф Сталин)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의 인간백정 초대 서기장이다. 러시아의 은행 강도 공산주의자에서 전세계 권력의 정점에 오르고 강철의 연방 소련을 세운 인물. 하지만 이를 위해 수없이 많은 인민이 피를 흘렸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권력을 가지기 전[편집 | 원본 편집]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Joseph Stalin, Ioseb Besarionis dze Jughashvili)[1]은1879년 12월 18일, 조지아의 시골 마을인 고리에서 구두직공인 비사리온 주가시빌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지극정성을 다해 그를 키웠지만 막장 부모인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여서 스탈린에게 가정폭력을 일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곧 사망한다. 이후 어머니의 권유로 신학교에 입학한 스탈린은 성적은 매우 우수했으나 동창생들의 발언에 의하면 그는 다른 친구들의 감정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어떤 이유에선지 신학교에서 퇴학당한다. 이에 관해 어떤 비밀결사에 가입하여 혁명운동을 하다가 퇴학당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있으나 다른 자료에 따르면 신학교에서 금지한 책을 읽은 것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찌됐든 그 뒤부터 본격적으로 직업적 혁명가가 된 스탈린은, 블라디미르 레닌을 지지하는 논문을 쓴 것이 레닌의 눈에 들어가 그와 만나게 되었으며, 러시아 혁명으로 황실이 전복되기 전까지 무려 10차례가 넘는 체포와 도주를 반복했다. 이때 스탈린이 받은 형량이 비교적 적은 편에 속해 그가 러시아 제국 황실의 스파이라는 설도 나돌았다.

스탈린은 친구의 동생 예카테리나 스바드니제와 결혼했고[2],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야코프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아내 예카테리나 스바드니제가 사망한다. 이때 스탈린은 아내의 죽음에 매우 인간적으로 슬퍼하여 주변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진다. 동료에게는 아내의 죽음으로 자신의 인간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했다고도 하는데, 아내의 사망을 기점으로 스탈린의 성격이 확 변했다.

이후 스탈린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그림자로 불릴 정도로 볼셰비키 내에서의 위상을 높여갔다. 그러나 사실 이때까지 스탈린의 위상은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니었고 다른 실권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정도에 그쳤다. 그 뒤에도 몇 번의 체포를 겪은 스탈린은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이 건국되자 정치장교로 입대하여 직업군인들을 관리, 감시하는 역할을 맞게 되고 레닌의 신임에 힘입어(본인이 소수민족이란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소련 소수민족 문제의 책임자 자리에도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이때도 스탈린은 레프 트로츠키에게 밀리고 있었다.

하여튼 이러한 공 때문인지 레닌에 의해 소련의 초대 당 서기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스탈린은 과거와는 달리 강경한 자세로 당 서기장의 직책을 이용하여 당을 장악해 나갔고, 그런 스탈린의 모습을 지켜본 레닌은 저 새X 죽여야 된다고 유서에 적어놓았는데 스탈린이 먼저 스틸하여 무산되었다.[3]

인간백정이 되다[편집 | 원본 편집]

레닌이 사망한 이후 집권한 스탈린은 자신의 정적들에게 피의 숙청을 감행했으며 정확한 사망자가 통계되지 않을정도의 대숙청을 일으켰다. 그러나 정작 최대의 정적이자 공산주의 혁명의 영웅인 트로츠키는 죽이지 못하고 소련에서 쫓아내는 것으로 끝난다.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은 당시 자본주의 진영의 서방 세력에게 따돌림을 당했으나 경제 정책과 함께 2차 세계 대전 때 아돌프 히틀러의 침략전쟁에 맞서느라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았다. 나치 독일의 패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소련의 입지는 순식간에 어마어마하게 올라갔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전 세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그 정점에 서있는 미국과 소련으로 나뉘게 된다. 냉전의 시작이다. 이 시점에서 스탈린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단신으로 전 지구의 절반을 손에 넣은 것이다. 스탈린의 대칭점에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있었지만 상징적인 의미일 뿐, 트루먼의 실제 권력은 소련 전체를 제 맘대로 다루는 스탈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후 한국전쟁 도중인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은 사망한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스탈린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는 현재 딱 두 가지로 나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그리고 경제성장이다. 차차 설명하겠지만 이 두 가지는 전부 현대 들어서 과대평가된 것이며, 스탈린 본인이 이렇다할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도 아니었고 이러한 결과를 이륙하는데에는 수백만명의 고통과 죽음이 있었다. 게다가 이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국내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온갖 만행과 분쟁을 이르킨 것이 실상이다. 자세한 내용은 스탈린의 정책들을 통해 알아본다.

스탈린 치하 소련의 온갖 국내외 선전과 2차대전 당시 서방의 우호적인 시선 덕에 스탈린에 대해서는 아직도 "강인하고 비록 잔혹하지만 그만큼 냉철한 인물"이라는 인상이 존재하지만, 사실 스탈린은 편집증적으로 공포와 의심에 시달렸던 사실상의 미치광이였다. 스탈린 특유의 폐쇄주의 정책 때문에 소련은 대공황은 겪지 않았을지언정 대신 대숙청이라는 끔찍한 피바람에 8년동안 시달려야했다. 수많은 소련의 유능한 관리, 군인들이 스탈린 때문에 거의 학살당했고 이 때문에 겨울 전쟁 당시 소련군은 패전을 면치 못했었다. 대숙청 때 죽이지는 않은 인물들은 국외추방이 아니면 굴라그라는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평생 강제노동을 해야했다. 대숙청 때 고려인을 비롯한 온갖 소수민족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동돼 비참한 삶을 살았으며, 이동 도중 사망한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다. 이것 뿐만 아니라 소련을 구성하는 민족국가들의 국경선을 제멋대로 그어 현재까지도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상호 간의 국경분쟁에 시달리고 있다. 대숙청 때 찍히지 않았더라도 종교탄압, 감시와 도청, 고문과 재판없는 처형은 일상이 되었고 러시아의 인권 수준은 10월 혁명 이전, 아니 2월 혁명 이전의 러시아 제국 이하 수준으로 떨어졌다. 경제가 아무리 좋다한들 지금 당장 죽을지도 모르면서 산다면 진정으로 살기 좋았을까? 게다가 스탈린 죽음 이후의 일이지만 소련이 해체되면서 러시아 경제가 물거품이 되어서 경제성장도 부질없는 일이 됐다.

스탈린은 초기에는 일국사회주의를 겉으로나마 지향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세계가 혼란에 빠지자 금방 제국주의적 침략을 개시했다. 스탈린은 나치와 사실상의 동맹을 맺고 폴란드를 분할하고는 핀란드를 침략했고, 발트 3국과 몰도바 지역을 강제병합했다. 이렇게 사방을 침략하고 다녔던 소련이지만 하필이면 석유를 노리던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게되었고 얼떨결에 연합국에 편승하게됐다. 그저 추측일뿐이지만, 독소전쟁 이전까지 독일과 소련은 알게 모르게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기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 안했으면 소련이 독일을 침공했을 것이다. 하여간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눈 앞에 두자 스탈린은 각지에서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징병해 사실상의 고기방패로 삼았고, 또 이게 아예 효과가 없는 건 아니어서 대치상황이 계속됐고, 결과적으로 심하면 하루에 수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태가 2년 가까이 지속됐다. 지금 나라가 멸망위기에 처했는데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고 물을 수 있는데, 전에 설명했지만 이게 스탈린이 유능한 군인들을 전부 숙청해서 발생한 사태라는 걸 상기해야할 것이다. 하여간 스탈린이 전쟁에서 어느 정도 승기를 잡자 스탈린은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에도 초청되는 등 아직 순진하게 스탈린을 믿고 있던 서방 국가들의 신임을 받았었다.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은 독일 항복 후 2~3 개월 안에 대일전에 참전해야된다는 협정에 동의했지만 실제로는 지키지 않았었는데, 왜냐하면 1941년 스탈린은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국이 사실상 혼자 피땀흘려 일본을 굴복시켜가고 첫번째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하자 스탈린은 늦기 전에 빨리 숟가락 얹기 위해 일본에 선전포고하고는 만주국을 침공했다.

얼마 안되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스탈린은 자신을 믿고 있던 연합국들을 전부 배신하고 팽창을 지속했다. 스탈린은 얄타 회담에서 합의했던 자유선거와 민주주의 정부 구성을 무시하고 점령했던 동유럽 국가들에 모조리 공산주의 독재정권을 세웠다. 이 뿐만 아니라 이란 주둔 소련군을 계속 주둔시키려고 했고, 그리스 내전에서 공산주의자를 지원해 막 전쟁에서 벗어난 그리스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고, 북한에 사실상의 괴뢰정권을 세우고 만주를 거점으로 중국 공산당을 지원했다. 비록 그리스와 이란에서의 만행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나머지는 안타깝게도 전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소련의 지원에 힘입어 만주를 점령한 중국 공산당은 국공내전에서 승전해 대만을 제외한 중국 전역을 지배하게 됐고, 이후 이들은 6.25 전쟁에서 북한을 지원하고 티베트를 침공했으며,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라는 중국 양대 참사를 이르켰다. 이후의 중국 공산당의 만행은 현재까지도 진행중이다. 이것 말고도 스탈린은 결국에는 북한의 남한 침략을 승인했고 이는 6.25 전쟁이라는 한국사의 끔찍한 비극을 낳았다. 스탈린의 끊임없는 국제적 만행에 서방 국가들이 마침내 소련을 견제하기 시작하자 스탈린은 핵무기 개발에 착수해 결국 핵전쟁 가능성과 냉전이라는,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국제적 위기를 이르켰다.

이것 외에도 소련군의 전쟁범죄를 직접 두둔하는 등 별의 별 문제점이 있지만 문서 분량상 생략하도록 한다. 종합하자면, 스탈린은 소련의 시작을 처참하게 망쳐놓았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멸망을 결정지은 인물이자 전세계에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온갖 갈등과 분쟁을 야기한 최악의 독재자였다. 특히 스탈린이 확립한 독재정치는 스탈린 사후에도 계속되어 소련이 쇠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괜히 레닌이 너무 늦긴 했다만 죽기 전에 스탈린을 공직에서 끌어내리려 했던게 아니다. 왜 스탈린이 히틀러와 더불어 20세기 최악의 독재자로 불리는지 다시 한 번 상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 공산주의 밈에서 자주 등장한다. 스탈린 동지

    스탈린 숙청 피하기 게임

각주

  1. 그루지아어 : იოსებ 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2. 실제 시기에 대해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고, 1903년에서 1905년 사이로 추측된다.
  3. 정확히는 스탈린을 경질하라고 적어놓았다. 문제는 이 유서가 진위여부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참고로 레닌의 유서는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스탈린의 후임자이자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인 니키타 흐루쇼프 시절에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