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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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容羲. 호는 동송(東松).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3년 12월 11일 한성부 안암동에서 금군(禁軍) 출신 박홍근(朴弘根)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9살 때 부친이 돌아가신 뒤 동숭동으로 이사했고, 1907년 집에서 가까운 연동교회에서 온 가족이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1908년 겨울에는 성결교 무교정교회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큰 감명을 받기도 했다.

1910년 외국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평양에 위치한 장로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2년간 신학공부를 하던 중 일본에 유학하여 1912년 일본 도쿄에서 성결교 계통의 성서학원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건강악화로 2년 만에 국내로 돌아와야만 했다. 곧 건강을 회복한 그는 교역자 순회전도 활동에 나섰다. 그는 1910년대 후반 서울 묘동교회를 비롯하여 강화, 김포 등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농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1919년 2월, 박용희는 이승훈, 함태영, 이규갑 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선언에 대해 논의하고 경기도 및 충청지구 연락책임자를 맡았다. 또한 그는 민족대표 33인이 체포된 이후의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2진'을 맡았고, 3월 8일 서울 종각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한 뒤 3월 22일 월곶 군하리에서 수백명의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일제 경찰은 3.1 운동의 기독교 측 총책이 박용희라는 걸 파악하고 검거에 나섰다. 박용희는 동지들이 자신 때문에 숱한 고문을 받으며 자신의 위치를 발설할 것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수하려 했다. 그러자 이상재가 그를 만류했다.

자진 입옥한다는 말은 막막불가하오. 그러니 즉시 국외로 탈출하시오. 그래야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 아니오.

결국 그는 이상재의 뜻에 따라 소금장수로 위장해 압록강을 건너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상하이에서 민족운동에 참여하던 그는 일제의 문화통치를 전해듣고 이에 맞설 방안을 모색하다가 오직 '민족복음화'만이 해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그는 1921년 초 귀국하여 장로교 교역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1921년 9월부터는 경기도 안성읍교회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하였고, 1925년에는 장로교 목사안수를 받았다.

1928년 9월에는 서울지역 대표적 장로교회인 승동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935년경까지 목회활동을 하였다. 또한 1927~28년에는 경기노회장을 역임하는 등 대표적인 기호 지방의 기독교 지도자로 자리매김하였다. 1930년대 전반 승동교회를 담임하며 평민목회를 추구하던 그는 교회 내 왕족 출신 명예목사 이재형 목사와 대립하기도 하였고, 지역적 당파성을 강하게 드러내던 서북기독교계 지도자들과 갈등 및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또한 함태영, 전필순 목사 등과 함께 장로교 경성노회에서 분리하여 경중노회(京中老會)를 새로 조직했다.

한편, 박용희는 기독교가 사회개혁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교회가 개인과 사회를 구원하고 각 민족 각 나라를 구원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완성시키는 곳으로 인식하였고, 이 일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사명이라고 보았다. 1927년 11월 신간회 안성지회를 설립하고 초대 지회장에 취임했고, 1929년에는 장감연합기관인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회장이 되었으며, 교회 내부의 학교 및 기관 운영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문제해결을 위해 장로교단의 화해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1930년대 전반 한국교회 신앙 형식화와 현실유리 현상, 이를 유지하려는 보수적 선교사들의 고압적 자세를 비판하며 ‘사회복음(社會福音)’을 주장하는 적극신앙단(積極信仰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31년 만보산 사건으로 한국인의 중국인에 대한 배척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의 갈등과 충돌을 해결하는 중재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1930년대 말에는 전남 순천교회 담임을 하면서 순천노회장을 역임하였는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선 거부투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에 일제 경찰은 1940년 10월 박용희를 체포해 모진 고문을 가했고, 박용희는 1942년 9월 3년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8.15 광복 직후 출옥했다.

박용희는 1945년 9월 5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기독교계 인사들과 함께 ‘민주국가 건설’을 표방하면서 사회민주당(社會民主黨)을 조직하였다. 이 정당은 위원장 박용희, 총무부장 강준표, 재무부장 박용래, 선전부장 최동 등 기독교계 인물들의 주도로 결성되었다. 하지만 강령은 기독교적 색채가 옅었고,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 인권을 존중하며 국민의 기회를 균등하게 하여 민주국가의 건전한 발전을 기한다.


2. 정치경제문화상 발전을 발양하여 국민생활의 양성을 기한다

3. 산업의 다각적 급속 발전을 도모하여 국민생활의 향상을 기한다.

- 사회민주당 강령

이후 그는 한국민주당 창당에도 관여해 조사부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민당은 민족적 대동단결을 목표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절대로 지지한다는 결의를 선언했다. 그 뒤 우익계열 정당들을 통합시키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고, 9월 24일 안재홍의 조선국민당, 명제세의 공화당, 그리고 자유당, 동지회, 근우 동맹 등 6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 39명과 더불어 국민당을 창립했다. 9월 29일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한 국민당은 103명의 집행위원을 선정하고 부서를 정하며 선언문과 정강 정책을 발표하였다. 박용희는 명제세와 함께 부집행위원장에, 집행위원장에는 안재홍이 선임되었다.

이후 박용희는 한민당과는 거리를 두고 국민당에서 주로 활동했다. 국민당은 정권쟁취를 목적으로 하는 정당과 달리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투쟁단체임을 밝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하며,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정치사상에 기초한 민족통일 독립국가 건설을 선언하였다. 이를 위한 정치세력의 대동단결을 주장하며 국력을 통합하여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을 강조하였다.

10월 23일 50여 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 200여 명이 독촉중앙협회를 창립했다. 이때 박용희는 국민당의 대표로서 이 협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1945년 11월 9일 임시정부 환국 전국환영회가 개최되었을 때 연락부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또한 1945년 12월 1일, 박용희는 기독신민회(基督新民會)를 설립했다. 기독신민회는 기독교를 표방한 단체라는 점에서 직접적인 정치행동과 구별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김구를 지도자로 하는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하며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대업을 기독교적 가치를 기초로 실현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박용희는 박용희는 기독신민회를 통해 해방정국 한국교회의 분열상을 하나로 결집하고, 그 모아진 역량으로 그리스도의 정신을 정치사회적으로 구현하여, 십자가의 건국이념을 현실 정책에 반영시키려는 목표를 추구했다.

박용희가 이끄는 기독신민회는 첫번째로 협동조합 창립을 추진했다. 박용희는 '기독신민회에 대하야 동지 제위께 고함' 이라는 글에서 “현재와 같은 경제적으로 혼란한 시대에 기독적 양심에서 출발한 기독교 경제윤리의 확립을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제생활에서 구현해 보자는 것이 협동조합운동의 출발점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12월 26일 새문안교회에서 조직국장 유재기를 중심으로 우리 생활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협동조합을 창립하는 한편, 경기도 경상남 북도 전라남북도 등지에 단체 지부를 조직했다. 한편 12월 30일에는 대종교, 불교, 천도교, 유교, 천주교 등 종교단체를 결집시켜 조선독립촉성 종교단체연합대회 등을 주도적으로 개최하기도 하였다.

1945년 12월 31일 임시정부가 반탁총동원 위원회를 조직했을 때, 박용희는 상임위원회 총무부장으로 선임되었다. 반탁총동원 위원회는 승리를 거둘 때까지 파업을 계속하자는 강경론자들의 요구를 누그러뜨리려 노력했고, 지방과 해외, 그리고 일본에 대표들을 파견하여 상호연락을 통해 신탁통치 반대 공동전선을 펴기로 합의했다.

이후 1946년 초부터 국내 정치세력권에서는 정당 협동을 통해 과도정부수립방안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좌우합작의 필요성을 갖고 있던 미군정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국민당의 안재홍은 김구의 임시정부에 이승만의 독촉중앙협의회를 중심으로 각 정당의 당세를 고려해 위원을 인선하고 과도정권 수립을 위한 비상국민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호응한 임시정부가 1945년 1월 21일 18개 단체 대표를 중심으로 비상정치회의 준비회의를 조직했다. 국민당의 안재홍은 이 회의에 참여하여 전형위원 및 정무위원에 선임되었고, 박용희는 청원징계위원에 선정되었다.

얼마 후 이승만, 김구가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최고정무위원 28명의 명단을 발표하였는데, 국민당에서는 이의식, 박용희, 안재홍이 선임되었다. 이들은 비상국민회의를 의회기관으로 만들고, 최고정무위원회를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기관 등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한국인의 독립적 정치기구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미군정과 갈등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이승만이 당초 발표와는 달리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으로 개칭했다. 민주의원으로 개편된 이 조직은 당초 의도와 다르게 군정청 법령에 규정되지 않은 미군정 자문기관이 되었다.

이에 반발한 안재홍과 박용희는 민주의원이 단순한 자문위원이 아니라 미군정과 ‘합작’하는 대등한 ‘주체’이며, 과도정부 수립의 주체가 ‘민주의원’임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의도에 따라 민주의원이 자문기구화가 된 상황에서 더 이상 이를 통해 임시정부를 과도정부로 수립하려는 활동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박용희는 안재홍ㆍ이의식 등과 더불어 이 운동을 정당운동의 형태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임시정부 역시 자신들이 주도할 수 있는 의회기관 조직에 실패하 자, 한독당을 강화하면서 반탁운동을 전개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려고 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안재홍ㆍ박용희가 이끌던 국민당과 함께 한독당, 신한민족당 3당 등이 모여 우익정당 통합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국민당은 1946년 3월 20일 한독당과의 합당을 위해 발전적 해소를 단행하다는 결의문을 발표하였고, 22일에는 한독당과 국민당의 합당선 언문이 발표되었다. 한독당과 국민당이 우익정당 통합을 전제로 합당을 선언하자, 한민당도 우익정당 통합에 참여 의사를 보였다. 이후 1946년 4월 20일 국민당과 신한민족당이 한국독립당에 합당하는 형태로 3당 통합이 이루어졌다. 통합ㆍ확대된 한독당에는 중앙집행위원장 김구, 부위원장 조소앙, 중앙상무위원과 훈련부장 안재홍, 중앙상무위원과 미곡대책위원장 명제세가 선임되었고, 박용희는 중앙상무위원 및 문화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박용희는 안재홍과 더불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주의깊게 살펴본 뒤 이것이 한반도의 정치환경을 고려해볼 때 한민족만의 통일 국가 수립에 필수불가결한 선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두 사람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사항 수용이 곧 신탁통치 허용이 아니며, 좌우합작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난 뒤에 한민족의 신탁통치 반대 의지를 충분히 관철시킬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파악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제1차 미소공동위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결렬되자, 그는 기독교계 조직 기반 확대에 나섰으며, 1946년 10월 결성된 흥국형제단에 참여하여 기독교 정신으로 국가 건설과 부흥을 목표로 삼았다.

1947년 1월 24일, 임시정부의 김구는 반탁을 추진하기 위한 통일기관으로 우익 42개 단체를 망라한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위원장은 김구였고, 부위원장은 조소앙ㆍ김성수였다. 박용희는 지도위원에 선임되었다. 반탁투위는 3.1절 기간을 계기로 반탁주간을 정하여 대대적인 반탁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박용희는 반탁투위에 임원으로 참가했으나, 당시 상황을 관망하며 대대적인 반탁노선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신탁통치를 거부해야 한다는 입장엔 동의했지만, 미군정과 소련을 상대로 맞서 싸우기보다는 미소공위에 참여해 통일국가 수립에 정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47년 2월 15일 과도입법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과도입법의원이 된 그는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처단에 관한 특별조례수정안 심의 과정에 참여해 법안 내용이 너무 가혹하므로 다시 수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감정에 치우친 처단 만이 능사가 아님을 강조했고, 법령 내용이 너무 가혹하여 민심 이반사태가 일어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이 특별조례는 논란 끝에 통과되었지만 미군정의 불허로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이에 박용희는 안재홍 등과 함께 미소공위에 참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김구를 위시로 한 임시정부 계열이 이를 거부하자, 박용희 등 89명은 “국제협의의 전위적인 진지한 건설과업만이 참으로 해방과 독립완수의 대업을 신속히 쟁취하고 민족파멸의 위난을 구급하며, 독립쟁취를 목표로 한 국제협의 때문에 미소공위에의 협의와 지지는 결정적으로 필요한 조건이 된다”고 주장하며, 미소공위의 참가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자 한독당 중앙상무위원회에서는 이들 중 55명을 제명 처분하고 이들을 감찰위원회에 회부하였고, 6월 19일에는 안재홍ㆍ박용희 등 국민당계열 37명과 신한민족당계 9명을 제명, 처분하였다.

이렇게 당에서 쫓겨난 박용희 등 국민당계열은 신한국민당으로 새롭게 발족하였고, 신한민족당계 민주파는 민주한독당 등으로 발족하여, 양 당이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한국인들이 원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미소공위는 임시정부 수립을 협의할 정당과 사회단체의 자격문제로 더 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제2차 미소공동위는 7월 들어 교착상태에 빠졌고, 8월 들어 균열을 보이더니 9월 17일 미국이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넘긴 뒤, 10월 21일 완전히 결렬되고 말았다.

이에 박용희는 민족국가의 독립을 목표로 자주적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정당통합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좌우합작에 참여한 중도파들이 정당통합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제2차 미소공동위가 침체될 조짐을 보이자, 박용희는 안재홍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의 우익세력을 정치세력화하기 위해 활동하였다. 1947년 9월 안재홍, 홍명희, 김병로, 김호 등과 함께 모여 중도세력의 결집하여 새로운 정당을 결성하자는 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9월 7일 홍명희 등과 함께 ‘우리 민족의 유일한 목표가 민족국가 독립이며, 그 절대적 사명을 위해 소이(小異)를 버리고 대동(大同)을 취하여, 민족독립을 위해 함께 나아가자’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47년 10월 20일 민주통일당ㆍ신한국민당ㆍ민중동맹ㆍ신진당 등 5개 정당이 통합하여 중도파 세력의 결집체로서 민주독립당(民主獨立黨)이 창당되었다. 박용희는 이극로 등과 더불어 의장에 선출되었고, 10월 31에는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상무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민주독립당은 선거권 만 20세 이상, 피선거권 만25세 이상(남녀동등), 언론 집회 등 모든 자유권 확립, 토지개혁, 근대산업의 확립, 중요경제기관의 국가경영 및 국가관리 등의 정책 초안을 발표하였다.

또한 민주독립당은 유엔의 남북한 전국 총선거를 환영하며,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파견에 대비하여 ‘각정당협의회(各政黨協議會)’를 주도적으로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한독당, 근로인민당, 인민공화당, 민주한독당, 민중동맹, 신진당, 조선공화당, 보국당, 조선민주당, 민주독립당, 사회인민당 등의 정당이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유엔에서 미국과 소련의 의견대립으로 독립실현이 우려되는 가운데 곧 방문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대해 협조적 자세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남북정계요인의 회담ㆍ미소양군철퇴촉진ㆍ독립을 위한 남북 총선거실시 등을 주장하기 위해서 결성되었다.

그러나 유엔위원단이 입북을 거부당하면서 전체 남북선거가 좌절되자, 1948년 2월 23일 과도입법의원 서상일 의원 외 관민 양선거의원 43명이 서명하여 유엔에 ‘우선’ 가능한 지역에서 유엔 감시 아래 에 선거를 치룰 수 있게 해달라는 ‘촉진결의안’을 본회의에 상정하여 통과시켰다. 이에 박용희 등 24명의 관선 의원들은 “이 안의 통과는 남북분할과 민족분열을 항구화하여 천추만대에 한을 남길 것”이라고 비판한 뒤 의원 직을 사퇴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8월 25일, 박용희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민주독립당과 기독신민회 등이 포함된 통일독립촉진회의 25개 단체는 북한 공산세력이 일방적으로 선포한 제2차 남북협상에 자신들의 대표를 파견한 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이와 함께 박용회와 안재홍은 374명의 민주독립당원의 이름으로 ‘민주독립당’ 창당이념이 진보 민족주의자들을 총집결하는데 있었다는 점을 상기키면서, “일부 당 간부가 북조선 선거를 계기로 당 노선과 배치되는 길을 걷고 있으므로 (중략) 부득이 민주독립당으로부터 이탈할 것을 결정”하였다고 발표하고 탈당하였다. 그렇게 박용희는 안재홍과 함께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를 적법한 정부로 인정했다.

이후 그는 안재홍과 함께 새로운 정치단체 수립을 준비했다. 그들은 1948년 11월 12일 구락부 형태의 신생회(新生會) 준비 발기회를 개최하였다. 신생회는 신생활 구국을 표방하는 신생운동을 전개하였다. 1949년 1월 5일에는 신생회의 전라북도지부 및 전주지부 결성준비위원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또한 박용희는 1950년 제2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그 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부산으로 피신한 뒤 정치와는 인연을 끊고 목회 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진보적 기독교 신학을 지향하던 김재준 목사를 지지하는 기독교장로회 측을 직접 지원하였다.

전쟁 종결 후 서울로 귀환한 박용희는 1953년부터 1956년까지 한국신학대학교 이사장 및 대한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다 1959년 5월 16일 서울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용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1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