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진 (1921년)

朴永晉.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21년 3월 27일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백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나월환한국 광복군으로 모여드는 애국청년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개설한 한국청년간부훈련반에 입교하여 군사교육을 받은 뒤 졸업하였다. 이후 1942년 5월 광복군 제1, 2, 5지대를 합하여 개편한 제2지대의 제2구대 제3분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 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와 주중경(駐重慶) 영국대사관 부관측과의 여러 차례에 걸친 군사합작 교섭이 주효하여 1943년 6월 광복군의 지청천 총사령관과 주인도 영국군 동남아 전구 총사령부 대표 멕켄지(Mackenzie) 정보참모 사이에 한·영 상호협정이 정식 체결됨에 따라 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면전구(印緬戰區)에 출정하게 되었다. 이에 영국과의 상호 군사협정에 의거하여 주인도 영국군 동남아 전구 총사령부에 파견할 인원을 선발하였는데, 이때 그는 공작대 대원으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1943년 12월 전방지구인 임팔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 제15군단 사령부에 도착한 광복군 인면공작대는 세 곳으로 분산 배치되었는데, 그는 제201부대 본부와 같이 활동하였다. 그 후 임팔 작전에서 승리한 공작대는 이곳에서 철수하였고, 1945년 연합군이 버마 지구의 일본군에 대한 총반격을 개시하자 공작대도 3개반으로 나뉘어 각 부대에 배치되었다. 그는 버마 중북부 지역으로 배치되어 버마 수도 랭군을 목표로 진격하는 상륙작전에 참전, 전과를 올리면서 동년 7월초까지 연합군의 승리에 공헌하였다.

8.15 광복 후 귀국한 그는 1948년 국군이 창설되자 가담하여 육군사관학교 특7기로 졸업하였고, 1950년 제6보병사단 8연대 대위로 복무하던 중 6.25 전쟁이 벌어지자 조선인민군과 맞서다 전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박영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고,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또한 국립신암선열공원 제1묘역에 유해가 안장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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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