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진 (19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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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宗鎭. 호는 시야(是也), 이명은 김심웅(金沈雄).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1년 12월 26일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에서 부친 김영규(金泳圭)와 청송 심씨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김상용의 11대손이며, 김좌진의 6촌 동생이다. 8살 때 서당에 입학하여 학문을 배웠고, 10살 때 재당숙 김학규(金學圭)[1]에게 입양되었다. 13세 때인 1913년 봄에는 마양홍씨 홍순극(洪淳競)의 차녀인 16살의 홍종표(洪宗杓)와 결혼하였다.

1919년 3월 3.1 운동이 발발했을 때, 그는 홍성군내 시위대의 선봉에 서다가 체포되어 옥중에서 갖은 고난을 겪었지만 6월 말 미성년이란 이유로 석방되었다. 이후 서울 중등학교 중학속성과에 입학한 그는 지하운동에 전념하다가 1920년 4월 봉천(奉天)으로 망명하여 형인 김연진(金淵鎭)과 같이 내외연락을 하던 중 국내로 무기를 반입하다가 홍경식이 체포되자 동년 가을 다시 베이징으로 피신하였다.

그는 베이징에서 홍성 의병이었던 이세영(李世永)과 북로군정서 대표 조성환, 그리고 이회영 등 다수의 동지들과 접촉하면서 내외정세를 관망하다가 독립운동가로서의 자신의 교육과 훈련의 필요성을 깨닫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총장(法務總長) 신규식을 찾아 그의 소개로 운남성 군관학교교도대(雲南省軍官學校敎導隊)에 입대하였다.

그후 교도대 2년, 군관학교 2년반의 교육과정을 밟고 1925년 9월에 졸업한 그는 곧 상하이로 돌아왔는데 이때 독립운동진영은 급변하여 민족주의·공산주의·아나키즘 등 3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는 그중 아나키스트들과 의기가 상통하였으며, 실제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북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1926년 봄에 난징·한커우·우창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동지규합에 나섰다. 1927년 10월에 북만주로 가 신민부(新民府)의 지도자이며 족형(族兄)인 김좌진을 방문하였다.

이후 김좌진으로부터 북만주의 제반사정을 들은 그는 각 지방의 실정과 적정(賊情)을 살피기 위하여 중동길돈연선(中東吉敦沿線)과 장백(長白)·무송(撫松) 등 일대를 시찰한 뒤 1928년 8월 김좌진에게 전운동조직의 개편과 재훈련, 교민에게 항일반공계몽운동을 전개할 필요성과 아울러 교포와 독립군과의 단결이 긴요함을 건의하였다. 1929년 7월에는 사상계몽단체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고 그 대표가 되었으며, 김좌진의 위탁으로 신민부의 개편정비작업에 착수하였다.

동년 8월에는 교민의 자치단체로서 재만한족총연합회(在滿韓族總聯合會)를 결성하고 일체 조직을 일원화하여 그 조직부 위원장 겸 농무부 위원장에 취임한 후 사상계몽과 적색분자제거, 농민의 집단정착 및 민심의 안정에 주력하였으며, 동년 12월 10일에는 북만 해림에서 교포자제의 자주 자립정신을 배양하기 위한 민립중학기성회(民立中學期成會)를 전명원(全明源)·김야운(金野雲)·이강훈 등과 함께 창설하였는데 그 집행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930년 봄에는 북경에서 개최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대표대회에 북만대표로 참석하여 북만한족총연합회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의케 하였으며, 그 결과 동년 말에 다수 동지가 입단하면서 민중운동이 크게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에 공산주의자들은 크게 위협을 느낀 나머지 1931년 7월 11일 중동선 해림역교외로 그를 납치하여 살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종진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8년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

  1. 독립유공자 김학규와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