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백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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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栢枰.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그러나 나치 독일에 협력하여 생체실험에 가담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건국훈장 서훈을 취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0년 8월 20일 전라남도 여수군 여수면 서정 72번지에서 출생했다. 1919년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하던 중 강기덕의 지휘 아래 각 학교에 기미독립선언서가 교부되면서 경성고등보통학교 대표자의 자격으로 선언서 2백매를 받았다. 이후 비밀리에 학생들에게 나눠주면서, 3월 1일 오후 2시 탑동공원에서 대한독립을 선언한다는 것을 알렸다.

이후 1919년 3월 1일부터 3월 5일까지 경성에서 3.1 운동이 전개될 때 함께하여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거리를 행진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미결구류일수 12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고[1],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2]

출옥 후 여수에서 '맞돕회장'을 지내며 청년회관을 지어 계몽 활동을 수행하다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 생활을 하면서 결혼하였고, 다시 독일로 떠나 베를린대학에서 생물학과 의학을 익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때 그의 담임 교수가 되어준 이는 우생학 권위자인 오이겐 피셔 교수였다. 피셔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에서 받은 혈액이나 신체 일부로 생체실험을 한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이사였다.

독일계 미국인이자 한국한 연구자인 프랑크 호프만은 저서 '베를린의 한국인, 독일인이 본 한국인'에서 김백평이 피셔의 추종자이자 두개골 전문가였으며,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 들어가 배아 연구를 수행했다고 주장했다. 호프만은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되고 일본이 만주를 병합한 이래로, 베를린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독립운동 열기는 완전히 죽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백평은 나치 치하 의학계에서 성공가도를 달렸으며, 나치에 적극 협력했다고 밝혔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인 1947년, 오이겐 피셔 교수는 우생학을 함께 연구했던 동료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김백평의 협력을 받아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는 김백평이 피셔의 핵심 심복 중 하나였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다만 김백평이 전후에도 피셔에게 협력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전후 미국으로 건너간 김백평은 1960년경 매사추세츠 주의 벨처타운 주립병원에서 일하는 등 의사로 활동하다 1990년 12월 1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김백평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고, 2009년 송석준, 최능익, 이정호, 정명, 장용호의 유해와 함께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그러나 이후 김백평의 나치 협력 및 생체 실험 참여 정황이 드러나면서,건국훈장 서훈을 취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었다.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는 친나치 행적은 서훈에 흠이 될 수 있다며 관련 의혹을 우선 확인하겠다고 밝혔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