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1862년 7월 14일 - 1918년 2월 6일

구스타프 클림트는 오스트리아화가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그는 금세공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876년에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한 이후 공방을 세웠다

당시 오스트리아 미술 경향의 보수성에 대해 반발 하여 1897년 칼 몰(Carl Moll), 모저(Koloman Moser), 호프만(Joseph Hoffmann)과 함께 기존의 빈 예술 동맹으로부터 탈퇴 ‘빈 분리파’를 결성했다. 그들은 기존의 빈 예술동맹으로부터 탈퇴한다는 명분으로 분리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1898년 제1회 분리파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1905년 각자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1906년에는 ‘오스트리아 화가 연맹’을 결성하여 전시 활동을 시작하였다.

개인 생활[편집 | 원본 편집]

그는 죽을 때까지 결혼을 안하고 평생 어머니를 아끼고 살았다. 그 대신 여성 모델들 사이에서 14명이나 되는 사생아들이 있었다. 가장 잘 알려진 여인은 플뢰게. 클림트는 여성 모델로부터 끊임없이 영감을 얻고자 했고, 일부는 클림트가 직접 디자인한 의상을 입기도 했다.[1]

그러나 클림트 자신은 수수한 성격으로, 평상시 작업 할 때 샌달을 신고 긴 잠옷을 입었다한다. 예술활동을 하는 사람이지만 본인의 의상에 신경을 거의 쓰지 않았고, 당대 예술가들의 마당이었던 카페 생활도 즐겨하지 않았다. 당시 웬만한 예술가들은 카페에서 엉덩이를 붙이고 거의 살다시피 했던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경우.

클림트는 생전에 자신의 작품을 인정받은 몇 안 되는 화가 중 한명으로, 그의 독특한 화풍에 매료된 후원자(Pattron)들이 많았다 한다. 화가가 후원자를 찾으러 발품을 파는것이 아니라, 후원자들이 클림트를 직접 찾아왔다. 그러나 클림트는 그림을 그릴때 다른 일을 제쳐두고 매우 집중하는 스타일로, 그의 선택(?)을 받은 후원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다.

대표작품[편집 | 원본 편집]

  • 키스(1907~1908). 캔버스에 유채

Klimt Kiss.jpeg

  • 다나에(1907~1908). 캔버스에 유채

Klimt Danae.jpg

모델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다나에(Danae)다.

당시 다나에는 신탁의 경고를 받은 아버지에 의해 탑 위에 감금되어 있었는데, 제우스는 황금빛 비로 변신해서 다나에와 정을 통하는데 성공했다 한다. 노골적인 포즈(...)와 주제로 클림트의 이름을 올려준 작품이다. 다나에와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자가 바로 영웅 페르세우스.

영향/평가[편집 | 원본 편집]

클림트의 작품은 우아한 황금색을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색깔의 조화가 특징으로 남성을 상징하는 표현을 은유적으로 삽입하고, 에로틱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유디트', '키스', '다나에'에서 두드러진다. 그림의 공통적인 테마는 남성보다 우위에 있는 여성, 즉 요부스타일의 여성이다.

그러나 클림트의 작품은 어느 딱 하나의 경향성을 가지지 않으며, 여러 가지 폭넓은 시도를 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이집트 미술, 고대 크레타의 문양, 비잔틴 양식 등에서 복합적으로 영향을 받았으며, 있는 그대로의 자연주의적 스타일을 거부하고, 상징주의 또는 상징적 요소를 사용하여 심리학적 아이디어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의 작품은 에곤 실레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 1960년대 성 해방담론이 대두되자 화가의 작품이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클림트는 특히 모피의상을 좋아했다 한다. 동거녀였던 플뢰레의 사진을 보면 클림트가 디자인한 의상을 입고 모델로 찍은 사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