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5월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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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결과  ==
== 진행/결과  ==
처음에는 프랑스 낭테르 대학의 학장이 대학을 점거했던 학생 8명을 징계하고자 그들에게 징계위원회에 출석할 것을 협박하면서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시작된다. 이 때 [[신좌파]]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후 여성,소수민족, 등과 같은 소수자 운동과 결합해 시위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68년 1월8일 낭테르 대학 수영장 개장식 때 다니엘 콘 방디는 행사장을 방문한 체육청소년부 장관에게 “체육청소년부의 올해 백서를 읽어 보았다. 6백 쪽이나 되지만 청소년의 성 문제는 어느 구석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라고 제기했다.
그러나 장관은 이를 무시하고 딴청을 피웠다.
그러자 학생들은 “만약 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여기 풀 안에나 들어가시지”라며 장관을 행사장에서 쫓아냈다. 그 결과 학생들은 여학생 기숙사에 남학생이 출입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ref>[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88157# 프랑스 68 혁명 30돌 맞아 재평가 활발], 시사저널, 1998. 05. 28</ref>
그러자 프랑스 낭테르 대학의 학장이 대학을 점거했던 학생 8명을 징계하고자 그들에게 징계위원회에 출석할 것을 협박했다. 이 때 [[신좌파]]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후 여성,소수민족, 등과 같은 소수자 운동과 결합해 시위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그러나 경찰은 폭력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려 했고, 이 무력 진압으로 인해 시민들이 다치고 체포되는 일이 생겼다.  
그러나 경찰은 폭력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려 했고, 이 무력 진압으로 인해 시민들이 다치고 체포되는 일이 생겼다.  
이후 총선거에서 보수파의 결집으로 드골 우파가 승리하였지만 이와 별도로 드골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낙향했다.
이후 총선거에서 보수파의 결집으로 드골 우파가 승리하였지만 이와 별도로 드골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낙향했다.

2018년 10월 26일 (금) 22:16 판

개요

68운동, 68혁명이라고도 한다. 1968년 파리 낭테르대학[1]의 학내분규로 시작했으나 프랑스 전체를 뒤흔든 저항운동으로 이후 서독, 미국, 이탈리아등 서구 국가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5월 혁명은 체제변혁이나 국가권력의 교체를 가져오지는 않았으며 주로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변화를 가져왔다.

배경

  • 음모: 5월 혁명이 어떤 조직의 음모에 의해 일어났다는 가설이다. 주로 드골주의자와 공산당이 주장했다. 물론 이들은 서로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드골주의자들은 5월 혁명을 공산주의자들이 드골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로 보았고, 공산당은 5월 혁명을 혁명적 노동자 조직을 와해시키려는 드골주의자의 음모로 생각했다. 심지어 한 학자는 5월 혁명이 동독의 음모에 의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 대학의 위기: 미셸 크로지어는 5월 혁명이 대학 관료제가 대학의 변화에 저항함에 따라 일어났다고 보았다.
  • 젊음의 열기: 에드가 모랭과 레이몬드 아롱은 5월 혁명이 단지 젊음의 열기에 의해 일어난 사태라고 보았다. 다만 모랭은 이를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아롱은 혁명을 흉내낸 치기어린 희극일 뿐이라고 비난했다.
  • 문명사의 위기: 도메낙은 5월 혁명을 소비사회를 규탄하는 문명사적 사건으로 파악했다.
  • 새로운 계급투쟁: 알랭 투렌느는 5월 혁명을 테크노크라트 지배에 저항하는 새로운 계급운동으로 보았다.
  • 전통적 계급투쟁: 앙드리외는 거시적 경제변수를 분석하여 학생집단의 시위는 단지 촉매에 불과하였고 투쟁의 본질은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이었다고 본다.
  • 5공화국의 정치적 위기: 피에르 아브릴은 드골의 장기집권에 의한 인기하락과 정권교체를 어렵게하는 1958년 헌법이 5월 혁명을 일어나게 만들었다고 파악했다.
  • 상황연계론: 이를 정리한 베네통과 투사르는 다양한 요소가 혁명이 전개되는데 기여했고 우연적 요소의 연계 속에 혁명이 일어났다고 본다.
  • 후기산업사회로의 이행 : 이 시각은 서구가 1950년대 후반부터 후기산업사회(Post-industrial society)로 진입하면서 자아실현의 욕구가 강화되었으나 현실정치가 이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고 보고, 현실과 욕구의 불일치가 혁명을 발생시켰다고 본다. 이들은 5월 혁명의 구호는 기존의 생존권(의식주)이나 계급, 체제비판에 있지 않고 환경, 생태, 여성, 반전, 반핵 등에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진행/결과

68년 1월8일 낭테르 대학 수영장 개장식 때 다니엘 콘 방디는 행사장을 방문한 체육청소년부 장관에게 “체육청소년부의 올해 백서를 읽어 보았다. 6백 쪽이나 되지만 청소년의 성 문제는 어느 구석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라고 제기했다. 그러나 장관은 이를 무시하고 딴청을 피웠다. 그러자 학생들은 “만약 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여기 풀 안에나 들어가시지”라며 장관을 행사장에서 쫓아냈다. 그 결과 학생들은 여학생 기숙사에 남학생이 출입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2] 그러자 프랑스 낭테르 대학의 학장이 대학을 점거했던 학생 8명을 징계하고자 그들에게 징계위원회에 출석할 것을 협박했다. 이 때 신좌파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후 여성,소수민족, 등과 같은 소수자 운동과 결합해 시위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그러나 경찰은 폭력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려 했고, 이 무력 진압으로 인해 시민들이 다치고 체포되는 일이 생겼다. 이후 총선거에서 보수파의 결집으로 드골 우파가 승리하였지만 이와 별도로 드골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낙향했다. 그러나 당시 외무부 장관이던 조르주 퐁피두가 집권함으로써 결국 신좌파 세력은 정권 획득에 실패하고 말았다.[3]

영향

68혁명은 비록 실패했지만 서독, 미국, 이탈리아 등 다른 서구 국가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