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 후 조선 내 일본인들의 귀국과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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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류? 귀국? ==
== 잔류? 귀국? ==
1910년 혹은 그 전, 후부터 조선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조선을 떠나는 것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조선에서 일군 재산들을 일본으로 온전히 가저갈 수 없었고, 몇몇 일본인들은 일본에 일가친척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1945년 9월 12일 소공동의 경성 YMCA 청년회관 로비에서는 조선어 강습이 열렸다.<ref> 이이면식, 조선을 떠나며, 역사비평사,p.80 </ref> 오랜 시간 금지되었던 조선어를 일본인들이 앞다투어 "가갸거겨"를 배우는 것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함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이날 오후 4시 개강식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가사야 야스타로(笠谷保太郎)는 "상황은 다르지만 과거 경성YMCA가 막 조직되었을 때 시작한 사업이 바로 조선어 강습"이라고 말했다. 이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염원을 지닌 자들은 먼저 언어를 습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당시 조선어 강좌는 1945년 9월 12일부터 3개월 과정으로 화,목,토 오후 4시부터 90분간 진행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강사는 오쿠야마 센조(奥山千三)였다.<ref> 위의 책, pp.80~82</ref>
=== 인천 세화회 ===


== 남한의 경우 ==
== 남한의 경우 ==

2015년 7월 3일 (금) 23:42 판

개요

1945년 일본제국이 멸망함에 따라 일본인들은 조선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일본인들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일본으로 귀국하였을까? 이 문제는 국사책에서든, 근현대사 책이든 단순하게 한두 줄 정도로 끝났던 문제였지만 절대로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 문서에서는 일본인들이 패전 후 식민지에서 어떻게 일본으로 돌아갔는지, 그리고 그 심정은 어떠하였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문서이다.

패전 후 조선

틀:날짜/출력 정오, 경성부 내무부장 교스케는 직원들을 불러모았다.
"곧 본국 정부에서 중대선언이 있을 예정이다. 모두 라디오에 귀기울이기 바란다."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담담한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라디오에서 히로히토 천황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 라디오의 볼륨을 키웠다..[1]

모든 게 바뀌었다. 태평양 전쟁의 패전은 기존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던 일본 제국의 붕괴로 이어졌다. 패전 이후 일본 고위층의 자기 보신 행위는 민심 이반을 유발했다. 실제로 1945년 8월 15일 부산지방교통국장이었던 다나베 나몬은 항복에 대한 소식을 들은 후 바로 '조선 총독 부인 일행'이 돌아갈 배를 준비하라는 업무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배는 8월 17일 귀항해야했는데 이유인즉 배가 조선에서 수집한 귀중품의 무게를 이기질 못하고 기울어졌기 때문이었다.[2]

갑자기 제국이 무너진 상황은 조선 내 일본인 공동체를 해체시키고,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어떻게든 자기라도 살아야겠다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특히 식민지내에서 벌어들인 재산을 어떻게 일본으로 온전히 가져갈지, 어떻게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갈지, 조선에서 계속 살 수는 없는지에 대한 생각은 일본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한편 조선인들은 밖에서 만세를 부르며 독립을 자축하면서 일본인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일본인의 입장으로서는 굉장히 공포스러운 상황이 창문 바로 바깥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경성전기주식회사의 사장인 호즈미 신주쿠로(穂積真六郎; 1889~1970)는 항복을 듣자마자 현재 을지로 입구에 가서 "만약 단 1분이라도 정전 사태가 발생한다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만일 정전이 일어날 경우 조선인들에 대한 공포와 함께 어둠에 대한 공포를 일본인들이 느껴야 함을 상기시켰다.

그는 8월 16일 조선인들이 붉은 기를 들며 만세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곧 소련군이 온다는 소문을 상기했다. 그런 도중 회사에서 들려온 전화때문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회사로 가는 길에 광장에 많은 인파가 모인 것을 보았다. 그는 1919년의 만세 사태를 기억해냈다. [3]

조선인들의 분노는 신사, 경찰서, 지방행정기관 '불상사건(不祥事件'이 913건, 그리고 경찰관, 공무원, 학교 교원을 상대로 발생한 살상 및 폭행 사건이 267건[4]이 보고 된 것으로 보여졌다. 특히 신사는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재밌는 점은 일본인 보다 조선인의 피해가 더 많았다는 점이다.

문제는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과 분리되어 살았던터라 조선인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인들은 왜 조선을 떠나야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아래 이야기를 보자.

"일본에는 친척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데 그냥 조선에 계속 살면 안되요?"
"미군정은 모든 일본인의 퇴거를 명령했다. 이제 조선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이곳이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인데. 패전을 했다고 꼭 떠나야 했나요? (중략)

하지만 8월 15일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호즈미는 혼란스러웠다. 이곳이 자신이 살아온 조선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그는 이렇게 많은 조선인들이 모여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조선인들이 이토록 크게 소리내어 떠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가 다녔던 학교에는 조선인이 없었고 친구, 지인중에서도 조선인은 거의 없었다. 가끔씩 재래시장에 놀러가서 보았던 물건을 파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그가 아는 조선인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런 조선인들은 온순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5]

지금까지 보았다 싶이 일본인들은 패전 후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잔류와 귀국을 사이에 두고 갈등하였고, 또 앞으로 다가올 점령국의 정책에 따라 운명이 갈리게 되었다.


잔류? 귀국?

1910년 혹은 그 전, 후부터 조선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조선을 떠나는 것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조선에서 일군 재산들을 일본으로 온전히 가저갈 수 없었고, 몇몇 일본인들은 일본에 일가친척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1945년 9월 12일 소공동의 경성 YMCA 청년회관 로비에서는 조선어 강습이 열렸다.[6] 오랜 시간 금지되었던 조선어를 일본인들이 앞다투어 "가갸거겨"를 배우는 것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함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이날 오후 4시 개강식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가사야 야스타로(笠谷保太郎)는 "상황은 다르지만 과거 경성YMCA가 막 조직되었을 때 시작한 사업이 바로 조선어 강습"이라고 말했다. 이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염원을 지닌 자들은 먼저 언어를 습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당시 조선어 강좌는 1945년 9월 12일부터 3개월 과정으로 화,목,토 오후 4시부터 90분간 진행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강사는 오쿠야마 센조(奥山千三)였다.[7]

인천 세화회

남한의 경우

북한의 경우

조선 거주 일본인들 기준에서 남한의 미군정에게 겪은 시련이 커피였다면 북한의 소련군의 것은 TOP였다.

귀국 후 조선 거주 일본인들에 대한 대우

조선을 향한 그들의 시선

관련 항목

참고 문헌

  • 이정현, 소설스러운 역사이야기(8) 패전과 귀환, 조선땅의 일본인들, 새가정, 2014
  • 이면식, 조선을 떠나며, 역사비평사

각주

  1. 이정현, 소설스러운 역사이야기(8) 패전과 귀환, 조선땅의 일본인들, 새가정, 2014, p.83
  2. 이면식, 조선을 떠나며, 역사비평사, p.17
  3. 위의 책, p.24
  4. 위의 책, p.25
  5. 이정현, 소설스러운 역사이야기(8) 패전과 귀환, 조선땅의 일본인들, 새가정, 2014, pp.86~88
  6. 이이면식, 조선을 떠나며, 역사비평사,p.80
  7. 위의 책, pp.80~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