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 후 조선 내 일본인들의 귀국과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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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본국 정부에서 중대선언이 있을 예정이다. 모두 라디오에 귀기울이기 바란다."
"곧 본국 정부에서 중대선언이 있을 예정이다. 모두 라디오에 귀기울이기 바란다."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담담한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갔따. 라디오에서 히로히토 천황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 라디오의 볼륨을 키웠다..<ref>이정현, 소설스러운 역사이야기(8) 패전과 귀환, 조선땅의 일본인들, 새가정, 2014, p.83</ref>}}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담담한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갔따. 라디오에서 히로히토 천황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 라디오의 볼륨을 키웠다..<ref>이정현, 소설스러운 역사이야기(8) 패전과 귀환, 조선땅의 일본인들, 새가정, 2014, p.83</ref>}}
'''모든 게 바뀌었다.'' [[태평양 전쟁]]의 패전은 기존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던 [[일본 제국]]의 붕괴로 이어졌다. 패전 이후 일본 고위층의 자기 보신 행위는 민심 이반을 유발했다. 실제로 [[1945년]] [[8월 15일]] 부산지방교통국장이었던 다나베 나몬은 항복에 대한 소식을 들은 후 바로 '[[조선 총독]] 부인 일행'이 돌아갈 배를 준비하라는 업무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배는 [[8월 17일]] 귀항해야했는데 이유인즉 배가 [[조선]]에서 수집한 귀중품의 무게를 이기질 못하고 기울어졌기 때문이었다.<ref>이면식, 조선을 떠나며, 역사비평사, p.17</ref>
'''모든 게 바뀌었다.''' [[태평양 전쟁]]의 패전은 기존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던 [[일본 제국]]의 붕괴로 이어졌다. 패전 이후 일본 고위층의 자기 보신 행위는 민심 이반을 유발했다. 실제로 [[1945년]] [[8월 15일]] 부산지방교통국장이었던 다나베 나몬은 항복에 대한 소식을 들은 후 바로 '[[조선 총독]] 부인 일행'이 돌아갈 배를 준비하라는 업무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배는 [[8월 17일]] 귀항해야했는데 이유인즉 배가 [[조선]]에서 수집한 귀중품의 무게를 이기질 못하고 기울어졌기 때문이었다.<ref>이면식, 조선을 떠나며, 역사비평사, p.17</ref>


갑자기 제국이 무너진 상황은 [[조선]] 내 일본인 공동체를 해체시키고,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어떻게든 자기라도 살아야겠다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특히 식민지내에서 벌어들인 재산을 어떻게 [[일본]]으로 온전히 가져갈지, 어떻게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갈지, [[조선]]에서 계속 살 수는 없는지에 대한 생각은 일본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갑자기 제국이 무너진 상황은 [[조선]] 내 일본인 공동체를 해체시키고,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어떻게든 자기라도 살아야겠다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특히 식민지내에서 벌어들인 재산을 어떻게 [[일본]]으로 온전히 가져갈지, 어떻게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갈지, [[조선]]에서 계속 살 수는 없는지에 대한 생각은 일본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2015년 5월 31일 (일) 13:15 판

개요

1945년 일본제국이 멸망함에 따라 일본인들은 조선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일본인들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일본으로 귀국하였을까? 이 문제는 국사책에서든, 근현대사 책이든 단순하게 한두 줄 정도로 끝났던 문제였지만 절대로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 문서에서는 일본인들이 패전 후 식민지에서 어떻게 일본으로 돌아갔는지, 그리고 그 심정은 어떠하였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문서이다.

패전 후 조선

1945년 8월 15일 정오, 경성부 내무부장 교스케는 직원들을 불러모았다. "곧 본국 정부에서 중대선언이 있을 예정이다. 모두 라디오에 귀기울이기 바란다."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담담한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갔따. 라디오에서 히로히토 천황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 라디오의 볼륨을 키웠다..[1]

모든 게 바뀌었다. 태평양 전쟁의 패전은 기존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던 일본 제국의 붕괴로 이어졌다. 패전 이후 일본 고위층의 자기 보신 행위는 민심 이반을 유발했다. 실제로 1945년 8월 15일 부산지방교통국장이었던 다나베 나몬은 항복에 대한 소식을 들은 후 바로 '조선 총독 부인 일행'이 돌아갈 배를 준비하라는 업무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배는 8월 17일 귀항해야했는데 이유인즉 배가 조선에서 수집한 귀중품의 무게를 이기질 못하고 기울어졌기 때문이었다.[2]

갑자기 제국이 무너진 상황은 조선 내 일본인 공동체를 해체시키고,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어떻게든 자기라도 살아야겠다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특히 식민지내에서 벌어들인 재산을 어떻게 일본으로 온전히 가져갈지, 어떻게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갈지, 조선에서 계속 살 수는 없는지에 대한 생각은 일본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한편 조선인들은 밖에서 만세를 부르며 독립을 자축하면서 일본인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일본인의 입장으로서는 굉장히 공포스러운 상황이 창문 바로 바깥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경성전기주식회사의 사장인 호즈미 신주쿠로(穂積真六郎; 1889~1970)는 항복을 듣자마자 현재 을지로 입구에 가서 "만약 단 1분이라도 정전 사태가 발생한다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만일 정전이 일어날 경우 조선인들에 대한 공포와 함께 어둠에 대한 공포를 일본인들이 느껴야 함을 상기시켰다.

그는 8월 16일 조선인들이 붉은 기를 들며 만세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곧 소련군이 온다는 소문을 상기했다. 그런 도중 회사에서 들려온 전화때문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회사로 가는 길에 광장에 많은 인파가 모인 것을 보았다. 그는 1919년의 만세 사태를 기억해냈다. [3]

조선인들의 분노는 신사, 경찰서, 지방행정기관 '불상사건(不祥事件'이 913건, 그리고 경찰관, 공무원, 학교 교원을 상대로 발생한 살상 및 폭행 사건이 267건[4]이 보고 된 것으로 보여졌다. 특히 신사는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재밌는 점은 일본인 보다 조선인의 피해가 더 많았다는 점이다.

남한의 경우

북한의 경우

귀국 후 조선 거주 일본인들에 대한 대우

조선을 향한 그들의 시선

관련 항목

각주

  1. 이정현, 소설스러운 역사이야기(8) 패전과 귀환, 조선땅의 일본인들, 새가정, 2014, p.83
  2. 이면식, 조선을 떠나며, 역사비평사, p.17
  3. 위의 책, p.24
  4. 위의 책, p.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