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드 스털링

개요[편집 | 원본 편집]

파운드 스털링은 그레이트 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과 일부 해외령에서 사용하는 파운드화 전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잉글랜드 파운드가 대표로 위치하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은 잉글리시 파운드와 동급의 어휘로 취급하고 있지만 엄밀히는 다른 개념이다.

잉글랜드 파운드와 그 외 스털링 파운드는 모두 같은 화폐제도에 속하지만 디자인은 별개의 것을 쓴다. 일단 잉글랜드 파운드의 주요 사용처는 잉글랜드 지방과 웨일스 지방이다. 여담으로 '웨일스 파운드(웰시 파운드)'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데, 정작 영란은행에 '잉글리시 파운드'를 공급하는 조폐국은 남부 웨일스에 있다(...)

상세[편집 | 원본 편집]

영국은 19세기 말엽까진 지역마다 은행마다, 제각기 고유의 파운드화를 발행하였었는데, 지폐의 발전사를 따라, 각 은행이 보유하는 재산(주로 귀금속)을 담보로 하는 은행권을 찍어냈었다. 그러나 경제규모가 커져서 더 이상 정화(正貨) 및 태환(兌換)체제로는 버틸 수가 없었으며, 몇몇 발권은행들이 버티지 못하고 도산하면서 그간 발행한 지폐들이 휴지조각이 되거나 불법유통될 조짐이 보이자, 영국 정부는 부랴부랴 중앙집권화 작업에 착수하여 1844년 금융헌장법(Bank Charter Act 1844)을 발표해 영국 내 법정통화를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이 발행하는 파운드 스털링(Pound Sterling)'으로 제한하였다.

혼란스러웠던 잉글랜드(+웨일스)와는 달리,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는 딱히 들썩일 정도의 큰일이 없었고 토착 의식도 강해서, 지역 주민의 지지 기반을 토대로 안정적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잉글랜드가 이 두 지역에도 동일한 정책을 적용하려 하자, 지역 문인(文人)으로 활동하던 월터 스코트(Walter Scott)가 사설을 기고하여 멀쩡한 은행 부수지 말라고 정면으로 반발하였고, 잉글랜드가 그 의견을 수용하면서 파운드 스털링 특유의 천하삼분지계 체계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훗날 스코틀랜드 은행(Bank of Scotland)은 월터의 업적을 기리려 하는지 1962년부터 줄곧, 월터 스코트를 앞면 인물로 도입하고 있다.

다만 서로 덮어놓고 찍어내면 통화량이 과도하게 팽창할 우려가 있었으므로, 영란은행은 각 지역 은행에 영란은행 예치 형태로의 잉글랜드 파운드(영란은행권)를 기반으로 하는 태환권으로 발행할 것을 요구하였고[1], 각 은행이 그 요구에 응하면서 갈등이 해결되었다. 다만 이 조치로 인해 영란은행은 영국 각지에서 몰려온 파운드 더미에 파묻히게 되어, 그걸 정리하느라 1백만 파운드(자이언트 노트)나 1억 파운드(타이탄 노트) 같은 현행권 지폐[2]를 발행하여 대처하고 있다.

구분[편집 | 원본 편집]

Pound sterling map.jpg
  • 파운드 스털링에서 탈퇴 : 다음은 파운드 스털링에 속하지 않는다.

넓은 의미의 스털링 소속 통화는 잉글랜드 파운드를 매개로하여 은행에서 별다른 제약없이 사실상 무제한 교환이 가능하다. 이는 영국 본토에서도 마찬가지.

각주

  1. 설령 은행 하나가 도산하여 실효권이 되어도, 돈의 실체 자체는 영란은행에 있었으므로 그냥 증서(은행권)만 교환해주면 해결된다. 실질적인 권한은 새로 만든 법대로 영란은행이 가져가겠지만, 정체성은 보장해주겠다라는 의도인 셈.
  2. 수표나 어음이 아니고 진짜 은행권(지폐)로 발행한다. 다만 시중유통이 아닌 특수 목적 발행이라서 크기가 매우 크고(대략 A4용지 절반 정도), 찍어낼 때도 현직 총재가 직접 하나하나 서명을 넣어가며 발행해야 한다. 은행 내부로만 유통되므로 시중에서 볼 일은 사실상 없겠으나, 1990년에 그 자이언트 노트를 운반하던 도중 무장 갱단을 만나 301장이 시중으로 유출된 일이 있었다. 이듬해까지 어찌저찌 대부분 회수했으나, 딱 2장은 찾아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