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후원

< 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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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후원.jpg
창덕궁을 세계에 알린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대, 최고의 원림.
창덕궁의 궁중 원림으로 조선 시대 임금의 산책로로 지어진 후원이다. 원래는 1405년 10월태종 때 별궁으로 지은 것인데, 이후 1592년에 임진왜란 때에 불타 없어지고, 1609년 광해군 때 중수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이 후원을 보고 후원의 아름다움에 핡핡대며(...) 창덕궁 후원이라는 엄밀한 이름이 존재함에도 비밀 속의 정원이라는 오그라드는 뜻인 비원(祕苑)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외국에는 이 이름을 영어로 직역한 시크릿 가든(Secret Garden)응?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다. 이 이름은 광복한 후에도 유지되었으며, 이후 일제의 잔재를 없애자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원래의 이름인 창덕궁 후원이라는 명칭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참고로 이 후원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예약을 하여야만 한다. 창덕궁 자유관람은 별도 예약이 필요없으나 문화재 보호 및 후원 일대의 생태계 보호를 위해 일일 출입인원을 철저하게 제한하고 있는 것. 참고로 문화재 해설사가 동행하며 관람 소요 시간은 1시간 30분 가량 소요된다.

후원 관람을 예약하고 해설사의 해설 하에 이동하기 시작하면 본격적으로 후원 답사 코스의 시작이다. 우선 예약하는 장소에서 후원까지 가려면 꽤 걸어야 하는데 이때 양옆의 흙담이 눈을 끈다. 특이하게 양쪽 흙담을 장식하는 타일이 무늬가 다른데 왼쪽은 마름모무늬, 오른쪽은 정사각형무늬로 덮여있다. 원래부터 있던 길은 아니고 원래 여긴 세자가 거처하던 동궁인 중희당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1]

부용지 (芙蓉池)

부용정.jpg
창덕궁 후원이라고 하면 대부분 생각하는 이미지.

창덕궁 후원에 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연못. 주변엔 다양한 활엽수들이 절묘한 모양으로 자라있어 가을에 단풍이 들면 주변을 오색 찬란하게 물들인다.

천원지방 사상에 입각해서 부용지 연못의 전체 형태는 네모난 형태이고 연못 중앙의 섬(?)은 동그란 모양이다.

실제로 가보면 의외로 말로만 듣던 그런 엄청난(...) 이미지에 비하면 비교적 초라한 편이라 거대한 중국식 원림이나 유럽식 정원에 익숙한 사람들은 실망할 수도 있지만 사진을 찍으면 정말 신기하게 예쁘게 찍힌다. 컴퓨터 바탕화면용으로 소장하고 싶을 정도. 물론 이 정도로 찍으려면 아마추어 사진작가급은 되어야겠지만...

직접 가보면 재밌는 광경을 볼 수 있는데 외국인 관광객들이 죄다 딱 봐도 가격이 장난 아닐 것 같은 카메라를 하나씩 들고 각자의 사진 좀 찍어본 솜씨를 뽐내는데(...)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하나같이 부용지의 네모난 곳의 꼭짓점 부분에 위치한 건물 바로 앞에서 다닥다닥 붙어서 하나같이 절묘한 자세로 찍어대는데 이게 관광객인지 사진작가인지... 참고로 이들이 서 있는 위치가 부용정을 가장 예쁘게 찍을 수 있는 최고의 위치이다. 오랜 경험을 통해 감으로 어디에서 찍어야 하는지 대충 아는 듯.

부용지.jpg
특히 가을에 진짜 끝내주는 각도에서 찍힌 사진.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창덕궁 후원의 야간 모습.

심지어 야간에도 경치가 끝내준다. 현대에 조명을 설치했는데 후원의 변화무쌍한 식물들과 아름다운 경관을 아래에서 비추며 절경을 만든다.

첫번째 사진 기준 왼쪽에는 부용정이, 오른쪽에는 주합루가 있고 그 앞에 어수문이 주합루를 지키고 있으며 사진 찍은 사람 뒤에는(...) 영화당이 있고 영화당에서는 춘당대를 내려다보고 있다.

부용(芙蓉)이란 연꽃을 뜻하는 한자어이다.[2]

부용정 (芙蓉亭)

부용정2.jpg
부용지에 위치한 정자.

다른 정자들의 형태와는 차별성을 추구해 한국 정자치곤 가장 화려한 편이지만 최대한 자연 속에 묻혀놓아 주변 경관과의 괴리가 느껴지지 않고 자연스럽다.

굉장히 심플하면서도 수수하지 않고 화려한 디자인이라 자연 경관에 비해 지나치게 튀지도, 너무 묻히지도 않게 딱 적당히 자연 경관에 어울린다. 마치 원래 자연에 있었던 나무나 바위같이 자연스러운 느낌. 정조가 여기서 낚시를 즐겼다는 일화가 전해져온다.

영화당 (暎花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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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친히 과거시험을 감시하던 곳이다. 영화당에선 춘당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데 여기서 과거 시험을 주관했던 것.

참고로 영화당에 신발을 벗고 들어갈 수 있는데 여기서 춘당대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뒷쪽의 부용지도 훤히 내려다보이기 때문에 여기서 사진 찍어도 정말 잘 나온다.

춘당대 (春塘臺)

춘당대.jpg
과거시험을 보던 뜰이다. 문과 시험을 치르러 온 사람들은 여기 앉아서 문과 시험을 치렀으며 무과 시험을 치르러 온 사람들은 여기서 저 멀리 담장 너머 창경궁으로 이어지는 곳까지 활을 쏘는 활쏘기 대회를 열었다.

활쏘기장에 왜 담장이 가리고 있는지 의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원래는 저 담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원래 창덕궁과 춘당대와 창경궁의 춘당지는 하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춘당지를 파내어 연못을 만들고 담장을 쌓아 격리시켜버린 것.

주합루 (宙合樓)

주합루.jpg
주합루는 창덕궁의 규장각이 위치했던 곳으로 왕실 도서관으로 쓰였다.

참고로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서향각(書香閣)이라는 건물로, 왕비가 손수 누에를 치면서 백성들에게 양잠 산업을 장려했다고 한다.[3] 후술하겠지만 왕이 몸소 농사를 지으면서 농업을 장려했다면, 왕비는 몸소 누에를 치면서 잠업을 장려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조선시대엔 왕들이 왕이라는 위치에서 결코 백성들의 삶에 관심없이 마냥 호의호식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애련지

애련지.jpg

관람지로 가는 길목에 있는 뽕나무.


과거 조선시대엔 이 애련정 바로 앞의 연못인 애련지에서 연꽃을 키웠으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련지란 '연꽃을 사랑하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화려한 부용지에 비하면 좀 심하게 수수한 면이 있지만 조용하고도 은근한 자연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어서 부용지보다 이쪽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애련지에서 관람지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거대한 뽕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상술했던 서향각 건물에서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칠 때 누에의 먹이인 뽕잎을 여기서 얻었다고 한다.

애련정 (愛蓮亭)

애련정.jpg
화려한 부용지에 비교되는 상당히 수수한 연못과 마찬가지로 정자도 굉장히 수수한 편이다. 그러나 최대한 자연스러움을 추구했음에도 너무 화려해서 자연에 비해서 비교적 튀는 느낌이 있는 부용정에 비해서 더 자연에 파묻히기 때문인지 더 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불로문 (不老門)

창덕궁 불로문.jpg
말 그대로 늙지 않는 문. 애련정을 정면에서 보기 위해 들어가야 하는 담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독특하게 기와나 나무를 쓰지 않고 바위로만 제작되어 있는데 엄연히 생명이 있어서 세월이 지나면 늙어 죽는 나무와는 달리 생명이 없고 영원히 늙지 않는 바위처럼 영원히 늙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한다.

참고로 경복궁에도 창덕궁의 불로문과 거의 같은 불로문이 있다.

의두합 (倚斗閤)

의두합.jpg
순조의 맏아들이었던 효명세자가 공부하던 곳이다. 효명세자는 어린 나이부터 이미 후원에 여러 건물을 지으며 정치를 구상했다.[4]

그 중에서도 공부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물인 의두합은 편리함을 위해서 만들어진 건물이 결코 아니고, 오직 독서와 사색을 위하여 지어진 건물로 그 건축양식은 그야말로 기와집 최악의 싸구려 양식. 단청을 하지 않아 정말 단촐하고 소박하며, 궁궐 내 유일한 북향건물로 되어 있다(!). 북향건물이 왜 문제가 되냐 하면, 원래 집을 지을 땐 낮에 햇빛이 잘 들게 하기 위해 남향으로 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일부러 북향으로 지은 것. 이렇게 하면 겨울에 개춥고 여름에 개덥다.

이렇게 한 이유는 일부러 공부하기 힘든 환경에서 독서를 하면서 더 큰 공부를 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토록 총명했던 효명세자는 순조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으나 결국 요절하여 조선은 중흥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비록 효명세자는 요절했지만, 현대의 호의호식하면서 초호화 환경에서 편한 공부를 하는 강남 어린이들이나 중국의 소황제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건물이다.

관람지 (觀纜池)

관람지의 모습. 저 너머로 관람정이, 그 너머로 희미하게 존덕정이 보인다.

굉장히 예쁘게 생긴 호수와 특이하게 생긴 정자들이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

관람정 (觀纜亭)

관람정3.jpg
독특하게 지붕이 부채꼴 모양으로 생겼다.

여담이지만 정자 안에 들어갈 수 있다. 또 이 정자 옆에서 관람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굉장히 잘 나온다.

존덕정 (尊德亭)

존덕정.jpg
우리나라의 정원치고는 특이하게도 이중지붕과 이중기둥의 형태이다. 별로 튼튼해보이지도 않은데 대체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의문이지만 몹시 화려하다.

기둥 하나씩마다 큰 기둥 하나 앞에 작은 기둥 3개가 에워싼듯한 독특한 4줄 기둥 구조를 하고 있다.

참고로 존덕정 앞에는 관람지에서 흘러오는 물이 다리 밑으로 흘러오는데 이 흘러온 물은 존덕정 뒤에서 또다른 연못인 존덕지를 형성한다.

존덕정 앞에서 관람지를 찍은 사진.

창덕궁 은행나무.jpg
존덕정 바로 뒤에는 짱 큰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궁궐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로 25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5]

승재정 (勝在亭)

승재정.jpg
관람지 연못 너머 언덕 위의 숲 속에 위치한 정자.

정자 자체의 디자인은 굉장히 단순하지만, 언덕 위에 계단까지 쌓고 지어서 상당한 위압감을 준다.

폄우사 (砭愚榭)

폄우사.jpg
작은 집같이 생긴 건물.

폄우(砭愚)라는 말은 어리석은 자에게 돌침을 놓는다는 뜻으로, 임금이 자신을 되돌아 보고 어리석움을 깨우쳐 덕을 높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옥류천 (玉流川)

관람지, 존덕지를 다 구경하고 나면 그 다음 옥류천으로 이동하게 된다. 여태까지 관람했던 것들은 대부분 연못이었지만 옥류천은 독특하게도 흐르는 시냇물이다.

옥류천으로 가는 길 중간의 쉼터인 취규정.

존덕지에서 옥류천으로 가는 길은 꽤 먼데, 이쯤되면 다리가 아프고 힘든 사람들이 꽤 생긴다. 하지만 다행히도 길목 중간에 취규정(聚奎亭)이라는 정자가 있어서 여기서 쉬어갈 수 있다.

소요암 (逍遙岩)

옥류천.jpg 옥류천 인조 친필.jpg
위 사진의 커다란 바위의 이름은 소요암으로,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하단의 옥류천(玉流川)이라는 글씨는 인조가 쓴 것이고 상단의 4줄의 시는 숙종이 쓴 것이다.

위쪽에 새겨진 숙종의 어제시(御製詩)의 내용은다음과 같다.

飛流三百尺, 삼백 척 높이에서 날아 흐르니
遙落九天來. 저 멀리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듯.
看是白虹起, 바라볼 땐 흰 무지개 일어나더니,
?成萬壑雷. 갑자기 온 골짜기 우레 소리 이루었네.[6]
태극정 (太極亭)

태극정.jpg

청의정

청의정.jpg
기와로 지붕을 만든 다른 정자들과는 달리 볏짚으로 지붕을 만들어서 정자보다는 원두막에 가까워보이는 디자인이 특징.

뭔 정자가 이렇게 초라하냐고?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 겉으로만 보면 초라해 보이지만 밑에 보면 화려한 단청 쩐다.[7]

하단의 갈아엎어진 흙들은 뭐냐고? 왕이 백성들에게 농사를 장려하기 위해서 직접 농사를 짓던(!!!) 곳이다. 상술했듯이 왕비가 서향각에서 직접 누에를 쳤다면, 왕은 청의정에서 직접 농사를 지었다.

참고로 지금도 그 뜻을 이어받아(?) 여기서 농사 체험을 해볼 수 있다. 약간 창덕궁관리소에서 행사 비슷하게 하는 것.

농산정 (籠山亭)

농산정.jpg
정자보다는 행랑채에 가까운 형태로 지어진 건물로, 방 2칸, 마루 2칸, 부엌 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8]

왕이 신하들과 함께 옥류천에 들러 제례를 베풀 때 음식과 다과 등을 대접하기 위한 용도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가 옥류천에서 유독 좋아하던 정자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으로 행차할 준비를 할 때, 창덕궁 후원에서 혜경궁이 타고 갈 가마를 메는 연습 등을 한 후 농산정에서 신하들에게 음식을 대접했다고 한다.[9]

소요정 (逍遙亭)
기타

창덕궁 주목.jpg
옥류천에서 낙선재로 가는 길목에는 거대한 주목이 하나 자라고 있는데 그 거대한 규모와 희한할 정도로 삐딱하면서도 곧게 자란 형태는 경이로운 느낌을 준다.

장락문 (長樂門)

장락문.jpg
연경당과 낙선재의 정문이다. 장락(長樂)이란 '오래도록 즐거움이 있다'는 뜻이다.

참고로 창덕궁의 장락문은 2개다(...) 낙선재의 정문 이름도 장락문이기 때문.

안 그래도 연경당이랑 낙선재가 둘다 건축 양식이 비슷해서 헷갈리는데 정문 이름까지 똑같으니 헷갈려하는 사람이 많다.

연경당 (延慶堂)

연경당의 뒷간 사진.

연경당의 정말 특이한 점을 꼽으라면 황당할 정도로 수수하게 지어졌다는 사실. 물론 일반 양반집이라 생각하면 엄청 화려한 거긴 하지만 여긴 왕궁이잖아....

이런 희한한 모습이 된 것은 재밌는 사유가 있는데 원래 왕이 연경당을 지으려 할 땐 신하들이 모두 나서서 백성들이 힘들어하는데 예산을 들여서까지 궁을 확장해야겠냐고 반대했었는데 왕이 꾀를 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해보면서 백성들을 생각하겠다고 해서 겨우 받아들여진 것. 따라서 현재 궁의 형태는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부유한 백성의 집의 형태와 거의 같다.

연경당 기둥.jpg
위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기둥이 모두 원통형인 다른 전각들과는 달리 여기는 모든 기둥을 직육면체 모양으로 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직육면체 모양의 기둥이 원통형 기둥보다 훨씬 싼 편이다. 왜냐하면 원통형 기둥을 만드려면 딱 원통형 모양의 나무를 구해서 깎아야 하기 때문에 엄청 비싼데 직육면체 모양의 기둥을 만드려면 아무 모양의 곧은 나무나 골라서 사각형으로 깎으면 되니까.

연경당 부엌.jpg
부엌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던 건물이다.

사랑채

연경당 사랑채.jpg
연경당의 사랑채의 모습.

노둣돌

사랑채에 들어가면 독특하게 생긴 계단(?)이 눈에 띄는데 사실 이건 계단이 아니고 노둣돌, 또는 하마석(下馬石)이라고 해서 말을 타고 온 사람이 말에서 내릴 때 밟는 디딤돌이다.[10]

선향재 (善香齋)

선향재.jpg
보물 제1770호이자 창덕궁에서 가장 이색적으로 생긴 건물.

딱 봐도 정말 비범하게 생긴 건물이다. 서재로 쓰이던 건물로, 특이하게도 지붕을 동판으로 했다(...)슬레이트? 그뿐만 아니라 벽돌들도 특이하게 청나라식 벽돌을 썼다.

선향재 도르래.jpg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진정한 충격은 이 지붕의 아랫쪽을 보면서 느낄 수 있다. 보이는가? 이 도르래가?(...) 이 지붕의 구조는 특이하게도 도르래식 차양을 썼다는 것인데 도르래로 차양을 접었다 폈다 하는 것이 가능해서 햇빛이나 비바람을 피하는 것이 가능하다. 안 그래도 지붕 때문에 황당한데 이것까지 보고 나면 진짜로 이국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11]

농수정 (濃繡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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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향재 사랑채에서 안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정자. 용도불명의 별 볼일없는 정자이긴 하지만 상당히 높은 계단 위에 우뚝 솟아 있어서 위압감을 준다.

우신문 (佑申門)

우신문.jpg
연경당의 사랑채와 안채는 특이하게 담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 담장을 넘어갈 수 있는 두 개의 문이 존재하는데 사랑채 기준 왼쪽에 위치한 문은 정추문(正秋門), 오른쪽에 위치한 문은 우신문으로 상당히 낮기 때문에 가다가 머리를 박지 않도록 주의를 요한다.

이렇게 낮게 지은 이유는 안채를 오갈 때 조심스러움을 사람이 절로 느끼도록 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12]

우신(佑申)이란 '돕기를 거듭한다.'는 뜻이다.[13]

안채

연경당 안채.jpg
연경당의 안채. 상당히 넓은 뜰이 눈에 띈다.

통벽문 (通碧門)

통벽문.jpg
안채 누다락의 좌측 뒤에 있는 문.

여길 지나면 작은 울타리 속에 별채가 있다. 이것이 연경당의 부엌공간인 반비간(飯備間)이다. 단 현재는 들어갈 수 없다.

통벽(通碧)이란 `푸른 곳으로 통한다`는 뜻이다.[13]

낙선재 (樂善齋)

낙선재는 원래 창경궁 영역에 속해 있었으나 현재는 창덕궁 영역에 속해있다. <승정원일기>와 낙선재 상량문을 통해 낙선재가 헌종 13년인 1847년에 만들어졌음이 확인되었다.

1997년 낙선재에 지었던 일본식 건물을 없애고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14]

낙선재 장락문.jpg
낙선재로 들어가는 장락문.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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