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창경궁
창경궁.jpg
건축물 정보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소유 문화재청
대지면적 216,774 m2
문화재 정보
종목 사적 제123호
지정일 1963년 1월 18일

창경궁(昌慶宮, Changgyeonggung)서울특별시에 있는 조선 시대 5대 궁궐 중 하나로 종로구에 위치한다. 사적 제123호 이다.

비슷한 이름 때문인지 의외로 창덕궁과 헷갈려하는 사람이 많은 궁궐이다. 후술하겠지만 창덕궁과 창경궁을 나누는 게 별 의미가 없다. 자세한 건 춘당지 항목 참고.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창덕궁과 창경궁을 비교해 보면.... 창덕궁은 일단 국뽕을 진심으로 빨 만한 엄청나게 화려한 퀄리티를 자랑하지만 창경궁은 창덕궁의 엄청남에 한참 못 미친다고 느껴진다. 심지어 전각의 상당수가 사라진 경복궁에도 한참 못 미치는 수준. 창덕궁을 먼저 보고 창경궁을 보았을 때의 실망감은 생각보다 큰데, 심하면 보잘것없다(...)고 느낄 정도이다.

이유는 당연하다.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의 전각이 사라졌으니까. 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 시대에도 화재 등으로 많이 망가져있던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 역시 조선시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임진왜란부터 고종때까지) 폐허로 방치되었었듯이.

애초에 창경궁은 절대로 초라하게 지은 궁궐이 아니다! 애초에 창경궁의 용도는 왕이 자신의 어머니나 할머니 등이 거처할 수 있게 만든 궁궐이다. 효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유교사회에서, 왕이 자신의 부모가 거처하는 곳을 허름하게 지으면 체면이 설 리가 있겠는가? 왕이 살던 궁궐보다 화려하게 지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왕이 자신의 궁궐을 부모의 거처보다 작게 짓는 경우는 없다.

창경궁이 결코 초라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들어가는 길목만 봐도 알 수 있다. 창경궁으로 들어가는 코스는 여러 곳이 있는데 홍화문으로 들어가는 코스와 창덕궁에서 바로 들어가는 코스가 있는데, 창덕궁으로 들어가는 코스를 골랐을 경우 중간 길목에 통명전과 양화당이 있는데, 통명전이 그 비싸다는, 무량각 양식을 채택한 걸 볼 수 있다. 즉, 처음 보이는 건물부터 엄청난 돈을 들여서 지었다는 얘기가 된다.

사실 창경궁의 외형 논란은 뒤로 접어두고라도, 창경궁은 그 자체로도 역사적으로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장소이다. 조선 왕조의 슬픈 역사를 두 번이나 안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첫번째는 영조사도세자의 이야기. 영조는 원래 자신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와 함께 어린 시절부터 왕비의 거처인 창경궁에서 자랐는데, 이 때문인지 본인은 창덕궁보다 창경궁에서 지내기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집무도 대부분 창경궁에서 보았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어머니와 보낸 순간을 잊지 못하는 효자 왕의 미담같지만...창경궁의 비극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사도세자 문서에서도 나오지만 영조는 당시 정치적인 문제로 사도세자와 불화를 겪게 된다. 참고로 이때의 유명한 일화인 영조가 귀를 씻으면서 그 씻은 물을 동궁에 버리라고 했던 일화에서의 '동궁'이란 창경궁의 동궁이자 세자가 거처했던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결국 자신의 아들에 대한 불화 끝에 영조는 결국 창경궁의 편전인 문정전에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서 굶겨죽이게 된다.

두번째는 대한제국 말기.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907년 순종은 왕위에 오르자 창경궁에서 거처하게 되었는데 일제는 정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순종을 능욕한다. 그 일제의 엄청난 활약상은 후술.

구조[편집 | 원본 편집]

홍화문 (弘化門)[편집 | 원본 편집]

홍화문.jpg
창경궁의 정문이다.

명정전 (明政殿)[편집 | 원본 편집]

명정전.jpg
창덕궁의 정전이다.

문정전 (文政殿)[편집 | 원본 편집]

문정전1.jpg
창덕궁의 편전으로, 겉으로 보기엔 굉장히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슬픈 이야기가 숨어있는 곳이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굶겨죽인 곳이 바로 이곳.

문정전.jpg 문정전 우측 뒷쪽.jpg
문정전 뒷쪽에 보이는 건물들의 모습.

사실 단순하다는 것도 앞의 거대한 건물이 뒤의 건물들을 가리고 있어서 드는 착각일 뿐이고, 직접 가보면 생각보다 건물들이 굉장히 복잡하게 되어있다.

환경전 (歡慶殿)[편집 | 원본 편집]

환경전.jpg
창경궁의 침전 중 하나이다.앞의 사람들은 무시하자.

1484년 만들어졌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 광해군 때 중건하였다. 왕이 늘 거주하던 곳으로, 중종효명세자가 여기서 세상을 떠났다. 효명세자가 죽은 이후부터는 빈궁으로 사용되었는데, 1830년 대화재가 발생해 빈을 여기서 꺼내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동궐도에는 누마루가 있지만 현존하는 건물에는 누마루가 시설되지 않았다.

경춘전 (景春殿)[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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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침전 중 하나로 왕비의 침전이다.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난 곳이자, 정조헌종이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참고로 현판은 순조가 손수 쓴 어필이다.

함인정 (涵仁亭)[편집 | 원본 편집]

함인정.jpg
창경궁의 정자 중 하나로서 경춘전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통명전 (通明殿)[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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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창경궁의 침전 중 하나로서 독특하게 용마루가 없다. 왠지 무슨 건물이 생각나지 않는가?

양화당 (養和堂)[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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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가 거처하던 전각으로 통명전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영춘문 (永春門)[편집 | 원본 편집]

영춘문.jpg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갈 수 있는 관문. 물론 지금은 창경궁 관람을 위해선 추가적으로 요금을 내서 다른 경로로 가야 하기 때문에 문이 잠겨있어 들어갈 수 없다. 저 멀리 창경궁 식물원이 보인다.

구 창경원이라 불리던 일대[편집 | 원본 편집]

대온실 (大溫室)[편집 | 원본 편집]

창경궁 식물원.jpg

대온실 입구에 있는 분수.

춘당지와 함께 조선 왕실의 비극의 역사의 증표와도 같은 곳.

흔히 창경궁 식물원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1907년 순종이 왕위에 오르자 일제는 사실상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실업자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 허수아비 왕 순종이 할일없어 심심할까봐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식물원과 후술할 동물원을 만들게 된다. 그뿐인가? 1911년에는 아예 이름을 창경궁에서 창경원(昌慶苑)으로 고쳐버린다.[1] 말로만 생각해준다는 거지 사실상 이게 조선 왕실한테 대놓고 조롱하는 거지 뭔가?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된다면, '궁(宮)'이란 왕이 사는 곳이고 일반인은 물론 신하들도 멋대로 출입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원(苑)'이란 동물원, 유원지같은 그냥 아무나 놀러갈 수 있는 장소에 붙는 말이다. 즉 위엄있는 왕의 거처를 지들 멋대로 동물원 같은 곳으로 격하시킨 것.여기 조센의 마지막 황제가 있데스~신기하죠? 우쭈쭈 끽끽 ^오^ 순종 황제가 평생 안고 가야 했던 수모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올 따름이다.

후술할 창경궁 동물원은 이후 철거되지만, 이 대온실은 여태까지 철거되고 있지 않다. 이 육시를 할 놈의 식물원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식물원이기 때문. 조선총독부와 창경궁 동물원이 철거되어도 이곳만큼은 철거되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대온실의 대문.
창경궁 식물원 내부.jpg
창경궁 식물원 내부2.jpg
창경궁 대온실 내부의 모습.

겉에서 보면 수정궁에 맞먹을 정도로 깨끗해 보이지만 일단 들어가 보면 생각보단 낡았다(...) 뭐 세월이 세월이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일단 건축 양식 자체는 물론 내부 인테리어도 굉장히 뛰어난 편이다. 솔직히 인정하긴 싫지만 잘 만들었다는 건 인정해야겠다 싶을 정도. 대온실 내에는 울릉도, 제주도 등 한국의 여러 지역에서 자생하는 희귀 식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궐내각사 (闕內各司)[편집 | 원본 편집]

현재는 존재하지 않고 터만 남아있어서 취소선을 쳤다. 궐내각사는 창덕궁 문서에서도 설명했지만, 왕실 관련 집무실로, 지금의 중앙청사랑 비슷한 개념의 일을 하는 곳인데, 궐내각사 건물들 자체는 일제강점기에 이미 없어진 지 오래이고, 그 자리엔 한동안 동물원이 있었다!

원래 창경궁 궐내각사의 홍문각 앞쪽에는 궁중의 과 마구들을 전시하던 내사복시(內司僕寺)가 있었다고 한다.[2] 즉, 궁중 마굿간이었던 곳. 근데 이것이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 건물을 나름 현대식으로 계승(?)한다고 여기서 기르던 말들을 치워버리고 코끼리, 기린, 홍학 등 다른 나라의 희귀동물들을 기르기 시작한 것(...)

다음 사진들은 한국전쟁 전~후쯤(1940년대~1970년대)에 촬영된 창경원 사진들이다.

위 사진들을 보고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지 않는가? 왜 일제가 조선 왕실을 능욕하려고 지은 건물을 광복 이후에도 멀쩡히 써먹어서 돈을 벌고 있는 것인가?사실 잘 생각해보면 이쪽도 만만치 않다 이거 해서 얼마 벌길래 야단법석이냐고? 1974년 서울시내 5대 궁의 입장료 수입이 8억 9600여 만원이었는데, 창경원에서만 5억 8000만원을 벌어들였다고 한다.[3]

그런데 사실 이상할 것도 없는 게 대한민국은 더 이상 왕국도 제국도 아닌 시민 공화국으로 출범했기 때문에 굳이 순종황제나 나라를 말아먹은 이씨 왕조의 자존심을 다시 세워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창경원을 계속 공원으로 이용한 것이기도 하다. 일본이 대한제국 황제 가문을 일본제국의 일개 귀족으로 강등시킨 것도 사실이지만 이씨 왕조 본인들도 그다지 그런 처우를 거부하지 않았고 그래서 독립투사 중 그 어떤 사람도 이씨 왕족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없었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도 임시정부를 만들 때부터 시민들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선언했으며, 창경궁을 원래 궁궐로 되돌려서 이씨 왕족에게 돌려주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창경원 동물원 시절 최고 인기 스타는 왈츠에 맞춰 군무를 추는 홍학이었다고 하며, 지금의 서울랜드처럼 놀이기구도 있었는데, 회전목마나 '하늘을 나는 노아의 방주' 등이 있었다.

옛날 전국체전 개막식 때 날린 비둘기, 전부 여기서 기른 거예요. 그 비둘기 숫자 맞추는 게 얼마나 중요했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어. 호되게 훈련하는 쇼도 없앴고. 요즘은 거의 모시고 살아요.
— 전돈수(58) 사육사[3]

그리고 요새 한국인 최고의 웬수 중 하나인 비둘기를 대량 사육했다는 점으로도 까여 마땅하다.[4]

지금은 창경원에 있던 동물들을 전부 서울대공원으로 옮기면서 지금은 창경궁에서 동물원을 볼 수 없게 되었다.다행이다.

춘당지 (春塘池)[편집 | 원본 편집]

춘당지.jpg
일제가 창경궁에서 벌인 훼손 중 가장 희한한 훼손.

이 평범해 보이는 연못이 뭐가 문제냐는 사람이 있겠지만, 이걸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처럼 조선에서 만든 연못이라고 생각하면 심히 곤란하다. 원래 이 곳은 춘당대의 일부분으로, 청의정과 마찬가지로 국왕이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농사를 시연하는 땅인 권농장(勸農場)이 있던 곳이었다. 즉 원래는 여기는 그냥 논밭이 있던 곳으로 창덕궁 부용지의 춘당대와 그냥 이어져 있던 곳이다.

그런데 이걸 일제가 1909년에 없애고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지네 입맛에 맞게 뜯어고쳐 일본식 정원으로 만든 것(...) 참고로 일본인들은 연못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인들이 창덕궁 후원에 핡핡대는 것도 그것 때문이고. 즉, 춘당대와 춘당지는 원래 담장이 없었으나, 이때 생긴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면, 원래 창덕궁과 창경궁은 하나였다.

더 웃긴 건 광복 이후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이 춘당지를 복원할 때 일본식 정원을 한국식 정원으로 개조하였다(...)로컬라이징 말고 원래 권농장을 복원하라고

창경궁 팔각칠층석탑.

연못 말고도 일본인들이 춘당지를 지네 입맛대로 뜯어고쳤다는 증거는 수두룩하다. 대표적으로 춘당지 근처에서 볼 수 있는 창경궁 팔각칠층석탑(昌慶宮 八角七層石塔)을 들 수 있는데 이 탑의 경우 원래는 이 권농장에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숭유억불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던 나라의 왕궁에 이 있을 리가? 탑이야말로 불교의 상징 아닌가? 그럼 탑을 왜 갖다 놨냐고? 당연히 일본인들이 불교를 많이 믿기 때문이지 뭐겠어?

만약 이 탑이 한국에서 만든 탑이라면 말도 안하지만, 이건 우리나라에서 만든 탑도 아니다! 양식을 보면 석탑이라서 한국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형태는 전형적인 중국 양식으로, 하단 안내문에도 나오지만 1470년경 중국에서 만들어진 중국 탑이다. 즉 다시 말하면 애초에 한국식 탑도 아니고 전혀 궁에 있을 이유도 없는 탑을, 그냥 일본인들이 자기들 보기 좋으라고 억지로 갖다 놓은 것. 이는 춘당지를 연못을 판 이유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상술한 식물원도 그렇고, 동물원도 그렇고 일본인들은 어디까지나 창경궁을 자기네들 관람용인 유원지로 개조한 것이다.

이런 내막이 있긴 해도 어쨌든 문화재적 가치가 있기는 한 것인지 1992년 1월 15일에 보물 제1119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과 위의 춘당지의 내막을 알고 나면 여러 모로 기분이 찜찜해진다. 경관은 창덕궁 후원급은 아니지만 역시 출중해서 정말 아름다운데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보면 정취를 느끼기가 조금 힘들 수 있다. 쓸데없이 춘당지 위를 고고하게 헤엄치는 원앙들의 아름다움이 얄미워 보일 정도.

이 탑은 조선 성종(成宗) 원년(元年, 1470)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일제 강점기인 1911년에 창경궁에 이왕가 박물관(李王家 博物館)을 건립할 때 상인으로 부터 구입하여 세운 것이다.

석탑의 기단(基壇)은 사각형의 받침돌과 팔각의 2중 기단으로 되어 있다. 그 위에 놓인 팔각형 돌의 각 면에는 꽃무늬를 새겼다. 팔각의 납작한 돌 위에는 밥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의 둥그스름한 탑신 받침을 놓고 화려한 연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1층 탑신은 위층에 비해 매우 높으며, 지붕돌은 팔각으로 목조 건물의 지붕처럼 표현하였다. 지붕돌 윗부분은 그 재질로 보아 후대에 보완한 것 같다. 이 석탑의 전체적인 형태로 보아 공주(公州) 마곡사(麻谷寺) 석탑과 비교되는 라마탑(喇嘛塔)을 연상케 된다.
— 해당 안내문 표지판.

풍기대 (風旗臺)[편집 | 원본 편집]

창경궁 풍기대.jpg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넘어가는 관문으로 가다 보면 있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재는 풍기를 세웠던 석대이다. 제작 시기는 조선시대 후기로 추정된다. 보물 제846호로 지정되어 있다.

각주

  1. http://www.rekor.or.kr/03sub_0302.html
  2. http://www.seoulstory.kr/mobile/theme/list/2/2537
  3. 3.0 3.1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Print.aspx?news_id=NB10476660
  4. 실제로도 이때 풀었던 비둘기들이 현재 한국 도시들의 골칫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결코 농담이 아닐...지도 모른다.